
약사가 아닌 간호사 등에게 약을 조제하게 한 병원에 대해 대법원이 법리를 오해했다며 병원 측 패소를 명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 제2부는 최근 사기, 약사법위반으로 기소된 의사 A씨에 대해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방법원 본원 합의부로 환송했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B병원의 원내약국 약사 C씨가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해 마약류 의약품만 관리하고, 의약품 조제는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B병원 소속 담당 실무자에게 지시, C씨가 상근 약사로 고용돼 입원환자 의약품을 조제한 것처럼 허위신고를 했다.
B병원의 약 조제는 C씨나 의사인 A씨가 아닌 병원 조제실 직원들에게 맡겼다.
이로 인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A씨에게 수급자 2907명과 관련해 1847만 704원을, D보험사로부터는 수급자 516명과 관련해 733만 6665원을, E보험사로부터는 362명과 관련해 687만 9967원을 교부받아 이를 편취했다.
1, 2심 모두 유죄 판결을 받은 A씨의 소송이 뒤집어진 것은 대법원에서였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2심 재판부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 이유에 의하면 A씨는 약사를 고용해 1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약사로 하여금 약을 조제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법원은 “이 부분 공소사실의 편취금액에는 간호사가 아닌 약사가 약을 직접 조제한 부분과 관련된 보험금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라며 “병원을 운영하면서 1주일에 2회 약사로 하여금 약을 조제하도록 한 A씨로서는 이 부분 공소사실의 기재에 의해 개별 수급자와 수급자별 피해금액 조차 알 수 없어 방어권 행사에 지장을 겪게 되므로, 이 부분 공소사실이 특정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원심은 이 부분 공소사실이 특정됐다고 보아 실체 판단을 하고 말았으니, 이러한 원심판결에는 공소사실 특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다시 말해 약사가 조제한 금액과 약사가 아닌 간호사나 직원들이 조제한 금액을 구분해 기소를 했어야했는데 이를 뭉뚱그려 기소한 것은 위법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여기에 재판부는 A씨와 검사의 불이익변경금지 원칙 위반에 대해서도 상고이유 주장에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제457조의2는 피고인이 정식재판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약식명령의 형보다 중한 형을 선고하지 못한다고 규정해 정식재판 청구사건에서의 불이익변경 금지의 원칙을 정하고 있다”며 “검사의 약식명령 청구에 따라 수원지압법원 평택지원은 A씨에게 벌금 300만원에 처하는 내용의 약식명령을 했고, 이에 대해 A씨만 정식재판청구를 하자 1심 법원은 공소사실 중 일부를 유죄로 판단,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어, “그러나 원심은 검사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판결을 파기하고 A씨에게 벌금 400만원을 선고했다”며 “원심은 약식명령의 형보다 중한 벌금형을 선고했기 때문에 원심판결은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을 위반한 위법이 있다”고 선고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지난 2013년 선고된 H병원 사건과 유사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시 H병원은 병원 약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 3일 약사 2명을 고용해 원내 조제업무를 맡겼고, 병원 소속 의사들이 조제실 직원의 조제행위를 감독하도록 했다.
그러나 지난 2011년 약사 면허가 없는 조제실 직원에게 의약품을 조제하고 이에 대한 조제료를 청구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1, 2심 모두 이런 혐의가 인정돼 벌금형이 선고됐고 병원은 즉각 상고하며 의사의 직접 조제를 규정한 약사법 제24조 제4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지만 이 역시 기각돼 벌금형이 최종 확정됐다.
여기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은 H병원이 약사 면허 없이 의약품을 조제하고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했다는 사유로 23억 2294만 3090원의 요양급여비용 환수처분까지 받았다. 면허정지와 업무정지도 10개월의 처분도 내려졌다.
벌금형에 요양급여비용환수처분, 면허정지, 업무정지 등 줄줄이 패소판결과 행정처분을 받은 H병원은 병원 문을 닫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의사의 ‘직접 조제’를 규정한 약사법 제23조 제4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지만 이마저도 각하돼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