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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마태복음(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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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마태복음(1964)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7.01.3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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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일찍이 ‘인간세상은 얼굴이 지배한다’ 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의 세계도 얼굴이 지배할까.

피에르 파올리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을 보면 그렇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예수( 엔리케 이라조퀴)의 얼굴을 보자.

관상의 대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척 봐도 풍기는 외모가 범상치 않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는 이마를 거쳐 커다란 귀밑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한 눈매는 날카롭지만 선한 빛을 띠고 있으며 그 위의 눈썹은 검은 머리보다 더 검어 눈동자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눈썹은 특히 양미간에도 이어져 있는데 이것은 미련(눈썹이 이어진 것) 하기 보다는 어떤 초능력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턱 선은 V자형으로 산뜻하게 마무리 됐는데 전체적인 형상은 둥근 계란형이다. 한 마디로 카리스마가 넘친다.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음에도 예수의 생모 같다는 인상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참사람인 예수를 감독은 이런 배우로 뽑았다. 감독의 선구안이 대단하다. 예수역의 엔리케 이라조퀴는 당시 학생이었고 전문 배우가 아니었다고 한다. 마리아 역의 마거리카 카루소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출연 당시 아마추어 였음에도 맡은 역을 제대로 수행해 냈다.

예수가 이탈리어로 빠르고 정확하게 내뱉는 목소리도 범상치 않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오는 신의 소리로 착각할 정도다. 특히 광야를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말대신 눈으로 쏘는 레이저 광선 장면은 압권이 따로 없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회개하라 라고 전하는 복음의 소리는 거역할 수 없는 묘한 힘이 느껴진다.

일단 예수는 생김새로 인간세상을 지배했다. 거기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 하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맡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는  성경말씀을 읊을 때면 하늘의 세상도 지배한 듯하다.

네가 하느님의 자식이라면 돌을 황금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조롱에는 감히 하느님을 시험하느냐고 호통을 치면 끝난다. 그도 부족하면 믿음이 부족한 것을 질책하고 왜 의심하느냐, 사탄아 물러가라고 쐐기를 박는다.

 

표식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물으면 너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지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어떤 바리새인도 여기에 토를 달수는 없다. 

지방의 고을 원님이 인기가 높으면 중앙의 임금님은 그를 칭찬해 더 높은 벼슬을 내리지 않고 반역을 두려워해 제일 먼저 처단한다고 했다.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제 저자를 죽일 때가 됐다는 세도가들의 의기투합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일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잘 알려진 방식대로 진행된다.

헤롯의 칼날을 피해 에굽으로 피했으니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3일 만에 부활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경을 읽어 나가는처럼 적나라하다.

감독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자신만의 목소리로 성경을 해석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다.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나 네오리얼리즘 등을 양념으로 가미해 그만의 예수를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감동적인 복음서가 감독의 손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해 비 기독교인들도 무리없이 감동의 도가니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제곡으로 불릴 만한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는 우리의 '아리랑'처럼 가슴을 저리게 한다. (노예 시대 흑인들이 즐겨 불렀던 영가의 하나로 핍박받는 백성들의 삶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영화가 끝난 후 미국 가수 겸 배우인 줄리 런던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기분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국가: 이탈리아, 프랑스

감독: 피에르 파올리 파졸리니

출연: 엔리케 이라조퀴, 마거리타 카루소

평점:

 

: 설 연휴가 끝났다. 오랜만에 떨어진 가족을 만났다. 즐거움도 있었고 다툼도 있었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제사도 지냈다. 정성스레 음식도 장만했다.

그러다 사소한 충돌도 있었다. 믿음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화근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해하면 된다. 예수는 광야에서 이렇게 외치지 않았는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 내가 온 것은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니라.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아니하고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치 아니하다.”

모친과 동생을 대할 때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 고 설파한다. 그러니 모처럼 모인 가족이 제사 문제로 싸울 필요 없다.

예수의 설교는 이어진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이밖에도 영화에는 이미 알려진 숱한 명언들이 등장한다. 살인을 하지마라, 간음을 하지 말라,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등의 십계명을 외칠 때 그의 눈빛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혁명가를 닮았다.

예수같은 배우의 입을 통해, 정갈하고 감칠맛 나는 목소리를 통해 복음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어렵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대주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배신한다” 고 말할 때는 신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니 화면은 빨리 움직이기 보다는 느긋하고 장면은 자주 바뀌기 보다는 전에 봤던 곳을 여러 번 다시 반복해서 비춘다.

그가 기도를 할 때는 이방인과 함께 중언부언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기도문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새해에 한 번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는 것은 영화가 바라는 의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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