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수많은 의료법 개정안들에 대해 의협이 ‘개정 반대’ 의견을 줄기차게 제출했다. 이런 배경에는 해당 개정안들이 의료의 전문성,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법안들이란 지적이다.
최근 대한의사협회 상임이사회 자료를 살펴보면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수많은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 ‘개정 반대’ 의견을 제출하고 있다.
의료계는 관련 법안들이 발의되는 것만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쁘지만 이와 동시에 많은 법안들이 의원들의 실적 쌓기 용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의료계 관계자 A씨는 “의료가 가지는 특수성이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법안들이 많이 발의됐다”며 “국회 관계자조차도 발의된 의료법 개정안들을 보면 ‘좀 너무하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하더라.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개정안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지난 7월 20일 열린 의협 제65차 상임이사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이 발의한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신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병원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감염의 매개가 될 우려가 있는 물품은 소지·이동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문제는 해당 물품에 의사 가운이 포함이 된 것. 이에 의협은 “의료기관 내 물품, 특히 의료인의 가운 등의 복장과 병원감염사이의 연관성 및 관련한 명백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병원감염 매개체를 단순히 추론만으로 설정해, 마치 의료기관 내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품이 병원감염의 주원인인 것처럼 법으로 규정하려고 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어 의협은 “실제 메르스 사태에서 의료인의 가운, 수술복, 진료복장 등의 물품이 감염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며 “개정안은 의료인 자체를 감염매개체로 인식해 법률로써 강제화하는 것은 과잉입법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진료와 자율적 병원감염을 위해 노력하는 의료인에 대한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7월 27일 열린 제66차 상임이사회에서도 또 다른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번엔 의료법이 아닌 노인복지법·지역보건법 일부개정안이었지만 내용은 의료계와 충분한 연관이 있었다.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개정안들은 경로당에 대한 주치의제·경로당 활용한 정기적 건강검진 등의 내용을 담은 법안들로, 의협은 이에 대해서도 ‘개정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의협은 경로당 주치의제에 대해 “현재 일부 지자체에서 ‘경로당 주치의제’ 등의 명칭으로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는 월 1회 정도 단순 봉사활동”이라며 “의료법 제33조는 의료기관 내 진료를 원칙으로 하고 있고, 대부분 어르신들은 의료기관 접근성이 좋은 우리나라 의료시스템내에서 건강관리·질병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 지역보건소가 경로당을 활용해 건강검진을 하도록 하는 개정안에 대해서도 “의료기관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의료기관에서 이뤄지는 제대로 된 건강검진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며 “보건소는 예방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민간의료기관에 전염병 관리를 위임한 상황이고, 전국 6만 4000개의 경로당을 보건소에서 검진, 건강상담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의료계와 관련된 여러 개정안들이 발의가 됐다. 새누리당 김기선 의원은 미용의료기기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공중위생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의협은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의협은 “이 개정안은 자칫 무자격자가 의료기기에 준하는 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국민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저해할 우려가 있다”며 “의료기기 분류에 있어 치료목적과 미용목적 두 가지 방법으로만 분류하기에는 기기별 적응증이 다양해 단순 분류가 어렵고, 개정안에서 제시하고 있는 분류의 기준 또한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윤소하 의원은 부당한 진료거부를 근절하겠다며 ‘의료인뿐만 아니라 의료기관 개설자 역시 환자기 진료·조산 요청을 하는 경우 정당한 사유 없는 한 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의무화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새누리당 김승희 의원도 이 개정안과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에 의협은 “이미 현행법상 의료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 개정안은 의료기관에 진료거부 금지에 대한 추가적인 책임(시정명령 등의 제재조치)을 지우고자 의료인뿐만 아니라 의료기관 개설자에게도 환자에 대한 진료거부 금지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의료인의 정상적 의료행위를 보장해야할 법이 오히려 진료를 방해하는 등 여러 문제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높다”고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여기에 김승희 의원은 1회용 의료기기 재사용 기관으로 의심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의료기관 운영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의협은 “개정안에서는 국민 건강 보호와 안전을 위해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감염병 발생 의심 의료기관의 의료업을 정지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 없이 의료기관의 운영을 제한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처럼 수많은 의료법 개정안들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의료의 특성과 전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막무가내’ 입법안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의료계와 척을 지기로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악법을 내놓고 있다”며 “이런 악법들은 지난해 의사들이 메르스 사태때 국민 건강을 위해 헌신했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료 관련 법안들을 보면 의료가 가진 특수성이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포퓰리즘에 매몰된 법안들이 여럿 발의됐다”며 “앞으로 보다 의사직역에 대해 일정부분 올바르고 건실한 방향으로 법을 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의료계 관계자는 “모 의원은 보건의약계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해 의료계에서 나름 기대가 컸다”며 “전문적이고 국민을 위한 입법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와는 거리가 있는 법안들을 내놔 실망이 크다. 보다 공익적, 현실적 측면을 고려한 법안을 내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