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5-07-18 13:53 (금)
눈물 젖은 달러
상태바
눈물 젖은 달러
  • 의약뉴스
  • 승인 2005.04.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5년 전, 개발 도상 국가인 우리나라가 조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달러였다. 어떤 돈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 당시 우리가 벌어들인 달러엔 뜨거운 눈물이 배여 있었다.

가발을 만들어 이역 만리에 수출한 여인의 머리칼엔 생명처럼 아끼며 소중히 다듬은 여인의 정결함이 배여 있었다. 1965년 당시, 머나먼 서독에 파견된 2천여 명의 간호사들과 5천여 명의 광부들이 하루 14시간씩 중노동을 하며 벌어들인 달러엔 구슬 같은 땀방울과 향수로 얼룩진 눈물이 배여 있었다.

광부들은 고국에 두고 온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더욱 열심히 곡괭이 질을 했고, 간호사들은 가족을 떠올리며 환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 주었다. 그것만이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그럴수록 한국인들의 근면성은 인정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한국 경제 개발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불모로 잡힌 백의의 천사였으며 용병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박정희 군사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원조마저 중단했다. 박대통령이 미국까지 찾아가 구걸 외교를 펼쳤지만 냉혹한 홀대를 당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박대통령은 서독 정부에 손을 벌렸다. 서독 정부는 외국 은행의 지불 보증을 얻어 오면 달러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맹방이었던 미국이 외면하는 한국 정부에 지불 보증을 서 줄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그 때 ‘쾰른’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던 某인사가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냈다. 한국에서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 명의 인력을 보내 주면 그들의 5년 치 월급을 담보 삼아 달러를 빌려주겠다는 협약을 받아 낸 것이다.

박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한국 근로자들이 근무하는 탄광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창한 환영식이 준비되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애국가 반주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따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박대통령과 수행원들은 석탄 가루에 까맣게 물들다 못해 반들반들해진 얼굴에 눈만 초롱초롱한 광부들을 보고 기가 막혀서 였고, 광부들은 이역 만리에서 대통령을 맞는 순간 객지 타향의 외로움과 설음이 북받쳤기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이어지던 애국가는 마지막 소절에 이르자 통곡 소리로 변하고 치사를 준비해 간 박대통령은 강인한 장군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한 줄도 읽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나라가 가난한 탓에 여러분들을 이역 만리 타향에서 고생을 시켜 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인사를 거듭할 뿐이었다.

탄광을 떠나기 앞서 영부인이 검고 거친 광부들의 손을 부여잡는 순간 그들은 ‘어머니’ 하고 외치며 와락 안긴 채 오열을 터뜨렸다. 광부들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 박대통령은 돌아가는 차안에서 손수건을 두 눈에 댄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독일 대통령은 박대통령의 어깨를 감싸주며 ‘울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통역을 위해 합석했던 某씨 역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린 채 눈물을 감추느라 통역을 제대로 못해 드렸다는 비화가 전해 오고 있다.

IMF 국난을 벌써 망각했느냐며 서민들에게 근검 절약을 채찍질해 오던 고위층이 부인들의 수입 모피를 비롯한 고가 의풍(衣風) 사건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기사를 대하는 순간 떠오른 35년 전의 눈물겨운 일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