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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5-07-18 13:53 (금)
입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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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찬소리
  • 의약뉴스
  • 승인 2005.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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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자신 만만해 하며 큰소리 치는 사람에게 인생의 선배들은 ‘입찬소리를 삼가라’며 조용히 타이른다. 혹은 ‘말이 씨가 된다’는 반대급부의 따끔한 경고를 하기도 한다. 설마가 사람잡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막을 내린 TV 연속극 ‘인어 아가씨’의 장면이 떠오른다. 혼사를 앞두고 방황하는 친구의 딸을 손가락질하던 여인이 ‘딸 가진 부모면서 입찬소리 하지마! 어디 네 딸은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는 저주(?)를 받은 후 나이 많은 이혼남을 사위로 맞아들인 내용이다.

며칠 전, 진천 화랑정에서 열린 흥무대왕 김유신 탄신 1408주년 기념 제4회 전국남녀궁도대회에 참가하며 설마가 사람 잡는 입찬소리를 직접 겪었다.

이왕이면 대회 전날 도착해 습사(習射)를 해야 좋은 성적이 나겠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수면을 취할 수 없는 까다로운 습관 때문에 대회 당일 새벽 6시에 인천을 출발했다. 설마 그 시간에 출발하면 이른 시간에 응사(應射)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산밑에 주차를 하고 힘들게 산꼭대기 행사장에 도착하니 이미 30분전에 작대(作隊) 순번이 마감되어 저녁때나 사대(射臺)에 서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설마가 빗나간 것이다.

인내심을 키우는 일도 궁도의 한 부분이라고 자위하며 행사장을 떠나지 않고 궁사들의 자세를 지켜본다. 그 중 한 궁사의 화살이 과녁 저 만치에 서있는 시동 쪽으로 연거푸 날아간다. 초심자인가 싶어 허리에 맨 궁대(弓袋)를 살펴보니 2단을 증명하는 무궁화 두 송이가 활짝 웃고 있다.

과녁을 놔두고 고전 앞으로 화살을 보내는 궁사의 실수를 마음속으로 조소하며 일행과 함께 산아래 식당으로 향했다. 그때, 시위를 당길 때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깍지(角指)를 분실한 궁사는 본부석으로 오라는 주최측의 방송이 계속 흘러나온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방아쇠를 잃어버린 격이지 어떤 칠칠치 못한 친구가 깍지를 다 잃어버리느냐며 나는 박장대소를 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내가 사대에 들어설 차례가 가까워지자 사정(射亭) 출입문 안에 세워 두었던 궁시(弓矢)를 꺼내 궁대를 풀었다. 순간 나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팔다리가 굳어 버린 듯 꼼짝 할 수 없다. 활 끝 고자에 끼워 둔 깍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깍지가 없으면 시위를 당길 수 없기에 정신 없이 산아래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달려갔다. 혹시나 했지만 차안에도 떨어져 있지 않다. 비상용으로 챙겨간 활에서 손에 익숙지 않은 깍지를 꺼내들고 거친 숨을 들이 내쉬며 산기슭을 타고 행사장으로 올라 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국 최고 유단자(9단)인 친구 심재성 신궁(神弓)은 바닥에 떨어져 조각이 난 깍지를 오전에 주워 주최측에 맡겨 두었다며 다시 찾아온다. 부러진 쪽을 강력 접착제로 대충 붙인 후 사대에 들어서니 저녁 6시다. 인천을 출발한지 꼭 11시간 만이다.

화살을 걸어 당긴 시위를 놓자 화살은 엉뚱하게 과녁 저 만치 떨어져 서있는 시동 앞으로 날아간다. 산 밑 주차장을 급히 뛰어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 탓일까. 활을 잡은 지 20년 만에 난생 처음 겪는 실수다. 그제야 아침나절, 시동에게 화살을 날려보내던 그 궁사의 피치 못할 사연이 헤아려진다.

궁대를 풀 때마다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궁대 안에 고이 보관해 둔 깍지를 누가 꺼내어 행사장 바닥에 떨어트렸는지, 화살이 왜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도 활에는 입찬소리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일깨워 주려는 도깨비 장난이 아닐까 싶다.

야당시절엔 선명성과 참신성을 호언 장담하던 정치인들이 집권 후 그들이 비판하던 여권의 전철을 밟는 것도 입찬소리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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