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203. 도살자 (1970)
상태바
203. 도살자 (1970)
  • 의약뉴스
  • 승인 2015.12.27 1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혼식장의 주인공은 신랑신부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객이 들러리가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클로드 샤브롤 감독은 <도살자>(The Butcher)에서 동료선생의 결혼식에 손님으로 초대된 엘렌( 스테판 오드랑)과 포폴(장얀느)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들 외의 등장인물은 주연급 조연이니 하는 말이 생길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주변인으로 배치됐다.

식장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초등학교 교장인 엘렌과 무려 15년 동안 군 생활을 하고 고향에 온 포폴은 쉽게 친해지고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엘렌은 아이들과 행복하고 포폴은 아버지가 했던 도살 업무에 충실하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고 하는 일에 만족하니 여유가 있다. 그러니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좀 더 착하다.

넓은 강과 숲을 사이에 둔 디자인이 예쁜 집이 어울리는 마을은 조용하고 아늑하며 마치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 이겠구나 할 만큼 넉넉하다.

 

옆집과의 사이도  넓찍하게 떨어져 있어 느리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난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찰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우체부가 죽은 여자를 숲에서 발견했다는 소문에 놀라고 엘렌과 포폴도 그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죽은 여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므로 포폴은 엘렌과 벌이던 수작을 이어간다. 그는 가죽처럼 질긴 고기가 아닌 좋은 양고기 다리를 꽃처럼 종이에 포장해서 학교로 찾아간다.

엘렌은 지난주 까지 멀쩡히 춤추던 여자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을 포폴에게 이야기 하면서도 큰 동요는 없다. 엘렌과 포폴은 버섯을 따면서 산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살인은 남의 일처럼 두 사람 사이를 비켜나 있다.

하지만 쉽게 끝날 것 같던 살인사건은 누가 범인이고 왜 죽였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하면서 두 사람 사이로 점 점 다가든다. 관객들이 두 사람과 살인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전혀 눈치 못하는 사이에 또 다른 젊은 여자가 희생된다.

소풍 길에서 시체를 처음 목격한 엘렌은 피 흘리며 죽은 젊은 여자 옆에서 자신이 생일선물로 포폴에게 준 라이터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살인 사건은 엘렌과 포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엘렌은 경찰에게 라이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경찰은 강간 없이 살인만 하는 범죄는 해결이 쉽지 않다고 힘들어 한다. 엘렌은 라이터를 서랍에 숨기고 집에 찾아온 포폴에게 불이 있느냐고 묻는데 포폴은 똑 같은 라이터를 꺼낸다.

포폴은 엘렌의 서랍에서 라이터를 훔친다. 엘렌은 사라진 라이터를 확인하고 포폴이 범인인 것을 알아챈다. 포폴은 알렌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표정 감추기의 달인이다. 서로에게 이런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또 한명의 희생자가 나타난다. 알렌은 집으로 찾아온 포폴이 두렵다.

문을 잠그고 도피하는데 열려진 다른 문으로 포폴이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재크나이프가 들려있고 포폴은 살인은 이걸로 했다고 칼을 들어 보인다. 예쁜 알렌의 얼굴에 짧은 공포가 알 듯 모를 듯 지나간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암전. 그 사이에 화면은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알렌이 아닌 포폴에게 집중된다. 자신의 배를 찌른 포폴은 개나 돼지 대신 사람을 도살했음을 고백한다.

엘렌은 그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한다. 핏기가 빠져 나가는 포폴의 얼굴은 오래 전에 죽은 시체처럼 하얗다.

국가: 프랑스, 이탈리아
감독: 클로드 샤브롤
출연: 스테판 오드랑, 장 얀느
평점:

 

팁: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두주자인 평론가 출신의 클로드 샤블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세계적 감독으로 위상을 확고히 했다. 프랑스 영화의 진수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 한 편 만 보면 될 정도로 장면 하나 하나 대사 하나 하나가 예술적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클로드 샤브롤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향을 받아 소름 돋는 스릴러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 냈다. 한 때 감독의 부인이었던 여주인공 스테판 오드랑은 히치콕 감독의 <오명>(1946)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세련되고 우아하며 <현기증>(1958)에 나오는 킴 노박처럼 지적이며 청순하다.

여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으로 엄습하는 압박도 관객이 느끼거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연기는 보는 내내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지 하는 묘한 감정을 갖게 한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연민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감독이 의도하는 바다.

물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서서히 고조되는 공포는 유혈이 낭자한 여타의 스릴러와는 차원이 다르다. 포폴은 악몽 속에 갇혀 있어 칼로 살인을 해야만 숨을 쉴 수 있다고 엘렌에게 고백하는데 엘렌은 이해한다, 저에게 의지하라고 태연히 말한다.

그  순간 안도감인지 두려움인지 알지 못할 감정이 엘렌을 통과하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모호함이라는 말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포폴은 타당성과 자유 이 두 가지가 없는 군대생활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살인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인도차이나에서 군 생활하는 중에 머리가 날아가거나 몸이 잘린 시체, 아이들의 시체가 쌓여 있거나 산산 조각한 시체, 썩고 있는 친구의 시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해 죽음이 일상이었음을 알린다.)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나 냄새가 같다는 죽음 직전 포폴의 말은 대대로 이어온 도살자다운 유머 정도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사족: 주인공들이 담배를 자주, 너무 쉽게 핀다. 마치 공기를 들이키듯 물을 마시듯 담배를 피는데 앉아서, 서서, 걸어가면서, 교실에서 피는 장면이 담배라는 소품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맥이 빠졌을 거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든다. 손에 잡기 보다는 입에 물고 있는 엘렌의 모습은 금발과 잘 어울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