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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삼포 가는 길(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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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삼포 가는 길(1975)
  • 의약뉴스
  • 승인 2015.10.0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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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노가다 판의 인생살이는 고달프다. 잡범의 징역살이는 말해 뭐하겠는가. 

막노동꾼과 큰 집에서 10년 만 에 출소한 두 사내가 한 겨울 눈 덮인 벌판에서 만났다.

"불 좀 빌립시다, 고맙시다.”

담배를 나눠 피고 나란히 서서 오줌을 갈기니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다. 거친 입담을 내뱉다가 서로 맞다 싶으면 통성명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일이다.

노영달(백일섭)과 정가(김진규)는 척 봐도 행색이 군색하다. 엄동설한에 아침도 못 먹었으니 읍내에 가서 해장국이나 한 그릇하자는 말이 절로 나온다.

딱히 목적지가 없는 영달은 정가 꼽사리나 끼어서 따라 갈까 생각한다. 가진 거라고는 달랑 두 쪽 밖에 없으니 홀가분해서 좋긴 하지만 말 뿐이지 어디 그런가.

국밥집에서 두 사람은 작부 백화(문숙)가 손님과 긴 밤을 잔다고 말해놓고는 새벽녘에 빚 5만원과 가방까지 들고 줄행랑을 쳤다는 말을 듣는다.

 

주모는 기차 타러 역전으로 갈 것이니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키가 늘씬하고 빨간 저고리를 입고 22살 쯤 된 여자를 잡아 오면 1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할 일이 없던 두 사람은 그러 마 하고 흔쾌히 약속한다. 밖은 산채로 얼어 죽을 수도 있는 센바람 불어댄다.

16킬로미터 떨어진 월출보다 34킬로 미터 가야 나오는 감천으로 두 사람은 방향을 뜬다. 아니나 다를까. 오줌을 누다 들킨 백화가 두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걸쭉하다.

“뭘 보고 지랄들이야. 잡아가 보라지. 뜨내기들 주제에.”

도망치던 백화는 쫒아오는 사내에게 훔친 흰 가방을 휘둘러 쓰러트린다.

“덩치만 크고 별거 아니 구만, 나 백화는 이래 뵈도 인천 노란 집, 부산 남포동, 대구 자갈마당, 진해 일구 다 겪은 년이야. 내 배위로 남자들이 한 두름으로 지나갔어. 조용한 데서 봐 달라고 하면 모를까 이것들이 어디서.”

씩씩대는 영달과 달리 정가는 활짝 웃으며 자네 말이 공자님 말씀이라고 무릎을 탁 친다.  3만원만 내라는 영달이 머쓱해 진다.

"이거 순 걸레구먼.”

화가 덜 풀린 백화는 하얀 눈 위에 가방을 뒤집어 안에 있는 것을 쏟는다. 고무줄 끊어진 분홍 빤스, 짝 잃은 화투짝, 거울, 잡지책이 어지럽다. 화류계 3년에 남은 것은 고작 이것이다. 쭈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만하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 두 사람은 잡아가는 대신 어물쩍 동행하게 된다.

가는 동안 내내 영달과 백화는 티격태격한다. (영달은 지난해 겨울이 좋았다. 월세 3000원짜리 방에 기집 끼고 살면서 3일에 한 번 돼지불고기를 먹었던 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자가 백화처럼 다 가지고 토꼈다. 그래서 인지 화류계 여자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고 믿지 못한다.)

백화가 반말을 하면 영달은 야, 너 몇 살이나 처먹었어? 하고 성질을 부린다. 그러면 백화는 화류계에서 누가 나이 따져서 언니, 동생 하니? 마신 술잔과 거쳐 간 사내 숫자로 정한다고 이 병신아 하고 고함을 친다.

그러면 영달은 고향도 가짜고 이름도 가짜고 오장육부 전체가 거짓말로 만들어 졌다고 비웃는다.

그렇다고 풀이 죽을 백화가 아니다. 나도 냉수 목욕하고 100일 기도 하면 백화가 아냐, 야! 넌 태어나면서부터 뜨내기였냐? 하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면서 정이 쌓인다.

세 사람은 팔도유람이나 다니는 것처럼 태평하다. 개가 있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 굿판에 끼어들어 신명나게 놀고 노스님의 반야심경 독경이 가득한 상갓집에서는 고인과 죽고 못 살았던 사이인 것처럼 상주에게 보여 실컷 얻어먹는다.

삐닥 구두를 신은 백화는 가다가 힘에 겨워 쓰러지고 영달은 그런 백화를 가뿐하게 업고 간다.

영달의 벌판 같은 등짝에 기댄 백화는 코맹맹이 소리로 가만 보니 댁 괜찮은 사람 같아요. 처음엔 건달인줄 알았는데. 하고 살짝 꼬리를 친다. 그러면 영달은 정씨 들었죠? 이게 다 헛 방구라는 거요.

영달은 백화를 다 믿지는 못하는 눈치고 그런 영달에게 백화는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면서 사랑을 조금씩 고백한다. 세 사람은 빈집으로 파고든다.

산세는 수려하고 세상은 온통 눈 천지 인데 밥 짓는 연기는 멀리 모락모락 향수를 자극한다.

영달은 과거 잘 나갔던 시절의 영화를 회상하고 백화는 그런 영달의 가슴팍에 발가락을 찔러 대면서 수작을 부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달의 꿈속은 온통 고향산천인데 돌아 갈수 없는 신세가 한스럽다.  

밖으로 나간 영달은 훌쩍이는지 들썩인다.

백화는 영달을 달랜답시고 안방에 군불도 뗐겠다. 어때, 나 한 번 까무러치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놀다 가라고 창녀처럼 옷자락을 잡아끄는데 영달은 확 뿌리친다.

내가 너 같은 화냥년에게 동정을 받느냐, 더럽다 더러워 하고 막말을 한다.

그러면 백화는 뭐가 더러워 이 새끼야, 이 떠돌이 놈아, 하고 대꾸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싶지만 이후 두 사람은 겁나게 열정적으로 몸을 섞는데 성공한다.

정가는 두 사람이 짝이 되길 원하지만 영달은 고민이 깊다.

나 진짜 이름은 이점순 이야, 이점순, 아무 한 테도 말하지 마. 백화 대신 진짜이름을 알려주는 점순의 영달을 향한 구애. 아이도 낳을 수 있고 실제로는 남자도 많이 거치지 않았다는 점순의 처절한 몸부림.

과연 영화는 해피 앤딩으로 끝났을까. 정가는 여전히 변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그의 고향인 남쪽나라 삼포로 가고 영달과 백화는 서로 손잡고 백년해로를 약속했을까.

시골 역전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기이한 마지막 인생 나그네길이 궁금하다면 삶은 계란 두 알과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 지금 당장 영화를 보면 된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등 그 시절의 노래를 듣는 재미는 덤이다.)

국가: 한국
감독: 이만희
출연: 문숙, 백일섭, 박진규
평점:

 

팁: 황석영의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이 애잔하니 영화도 그렇다.

원작에는 없는 장면들이 조금 들어갔는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 영화로 이만희 감독은 한동안 겪었던 슬럼프를 벗고 한국 영화에 큰 족적을 하나 더 남겼다.

필름이 사라진 걸작  <만추> 와 반공일변도의 전쟁영화 대신 전쟁의 본질을 파헤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만들었던 감독은 이 영화가 나온 후 사망했다. <삼포 가는 길>이 유작이 된 셈이다.

한국영상영화원에 따르면 이만희 감독은 15년간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한 해3~4편을 제작한 셈인데 67년에는 그가 만든 영화가 무려 10편이나 개봉됐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다작이다.

이만희 감독은 국가의 검열에 반대했고 한국 사회에 비판적 시각을 보인 자유로운 예술가적 기질을 선보였다. 그의 짧은 45년 인생을 기리는 이만희 40주기 회고전이 올해 ‘영화의 시간’(A Time Of Cinema)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 영화를 다 보고나니 정말로 아름다운 한국의 눈내린 산하를 나도 세사람처럼 하염없이 걷고 또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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