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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반딧불의 묘(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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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반딧불의 묘(1988)
  • 의약뉴스
  • 승인 2015.08.0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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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나이 50에 명작 ‘안나카레리나’를 완성한다.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불행한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

행복은 비슷하고 불행은 다르다는 말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곱씹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Grave Of The Fireflies)는 한 때 행복 했던 가정이 불행에 빠지는 이야기다. 영화의 첫 문장은 안나카레리아의 첫 문장처럼 기억에 남을만하다.

“1945년 9월 21밤 나는 죽었다.”

내가 주인공인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죽었으니 영화는 죽기 전의 내가 어떠했는지를 회상형식으로 살펴보리라는 짐작이 가고 그 짐작은 맞다.

죽기 전의 나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맛봤다.

 

아버지는 해군제독이고 어머니는 자상하고 여동생은 예쁘다. 살림살이는 풍족하고 집에는 웃음꽃이 핀다. 하지만 웃음은 곧 울음으로 바뀐다.

행복한 가정은 가정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잘못으로 불행으로 치닫는다.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은 승리보다는 패배의 위기에 몰려있다.

미군은 2차 대전의 종식을 위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 편대비행을 하는 폭격기는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연처럼 꼬리를 흔들며 내려오는데 엄청난 양의 폭탄을 쏟아 붓는다.

고베의 하늘 아래는 불바다다. 목조건물의 집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불에 타고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다 죽는다.

헝겊으로 온 몸을 감싼 어머니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는다. 경우 10살을 갓 넘겼을 나에게 5살 정도의 여동생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제부터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온통 불행뿐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불행은 동생이 죽고 내가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내가 죽기 전 일본함대는 전멸한다.

그러니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죽었다는 것을 안다. 부모도 죽고 어린 여동생도 죽고 나도 죽었으니 이 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존엄한 인간성의 말살은 전쟁은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인간들은 그것을 잊어버린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전쟁이 언제 일어났으며 전쟁의 참화가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여기고 다시 총을 쏘고 포탄을 던진다.

다행히 나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전쟁의 참상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슬픈 영혼은 그것을 알기에 더욱 괴롭다.

집이 불에 타고 오갈 데 없는 나는 해변가의 친척집에 얹혀산다. 처음 얼마 동안은 부서진 집에서 찾아낸 옷가지며 반찬가지 때문에 구박을 면하지만 쌀도 떨어지고 팔아 치울 옷도 없어지자 남매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집을 나온 남매는 근처 동굴에서 노숙을 하는데 그 생활이 오죽하겠는가. 도둑질을 하고 저금한 돈으로 간혹 음식을 장만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남매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시달린다.

어린 세스코가 아사하기 직전 죽은 반딧불의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는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깊은 슬픔이 가득차 오른다.

특별히 배급받은 숯으로 수박을 안고 죽은 동생을 태울 때 차라리 나는 담담하다.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있겠는가.

전쟁이 끝나고 나는 그것도 모른 체 기차역의 대합실에서 죽음을 맞는다. 청소원들은 이제 미군이 들어오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눈동자가 풀려 곧 시체가 될 노숙자들을 멸시한다.

패망한 일본은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가해자의 나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군비와 전력은 세계 최강이다.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는 우리는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심각한 걱정을 하고 있다.

그들이 다시 전쟁의 총구를 우리에게 돌릴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자의 말로를 우리는 역사에게 배워왔다. 하지만 그것은 교훈이 아니다 라고 애써 망각하려는 세력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으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비슷한 행복을 원하며 각기 다른 불행을 원치 않는다.

국가: 일본
감독: 다카하라 이사오
출연(목소리): 타츠미 츠토무, 기라이시 아야노
평점:

 

팁: 영화의 팁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반딧불의 묘>가 일본인이 만든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록이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자연스럽게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에 대한 저주가 떠올랐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상기한다는 차원에서 그의 인물과 그가 패망 후 조선을 떠나면서 한 말을 팁 대신으로 하고자 한다.

다음 백과사전에 따르면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의 총독이었다.

그는 1944년 7월에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 색출에 광분했으며, 심지어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렸다.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9월 9일 이후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 참고로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이 되려면 앞으로 한 세대,  30년이 더 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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