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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사람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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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사람의 행복
  • 의약뉴스
  • 승인 2014.02.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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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가에 우울한 빛이 떠돌 때, 촉촉하게 11월의 가랑비가 내릴 때, 나 자신도 모르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 멈추고 번번이 장례 행렬 뒤를 뒤따를 때, 그런 때는 되도록 빨리 바다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이것이 권총과 총알 대신이다."

허먼 멜빌이 소설 '백경'의 첫 머리에 쓴 구절입니다.

꼭 그런 날이 아니더라도 바다위에 떠 있다는 것은 삶의 충만이 하늘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벽의 문을 열고 여행을 떠나는 자는 행복하다고 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다음은 류시화 시인의 '여행자를 위한 서시'라는 시 입니다.)

여행자를 위한 서시/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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