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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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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
  • 의약뉴스
  • 승인 2013.03.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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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관객이라면 굳이 이런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 솔직히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설사 킬링 타임용이라고 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그런 영화를 왜 만들었느냐고.

언젠가 감독은 “사고의 복잡성과 그 기제들을 포착해 보려고 한 조악하고 원시적인 시도”라고 말한 바 있으니(물론 겸손의 표현이긴 하겠지만) 궁금한 사람들은 말의 의미를 참고해 보면 된다.

영화를 만든 사람의 표현이 이 정도이니 알랭 레네 감독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는 난해하고 복잡하고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작품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표현에서는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다시 말해 일반적인 영화의 작법과는 너무나 다른 시공간을 뛰어넘는 시제의 구성 등이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그런데 이 작품은 루벨바그의 걸작이며 모던이즘 영화의 선구자이고 전후 프랑스 영화의 시금석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니 일관 관객과 전문가들이 느끼는 시각은 다른가 보다.

어쨌든 영화는 바로크 풍의 거대한 성과 성을 둘러싸고 있는 공원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왔다 갔다 하면서 관객들에게 좀처럼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단 큰 줄거리를 살펴보면 X라고 불리는 잘생기고 언변이 좋고 떠벌이이며 집요한 한 남자 (조르지오 알베르타치)와 조각 같은 미모와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귀거리와 목걸이 등 장식구가 잘 어울리는 A라는 여자 (델핀 세이티) 그리고 전형적인 하인의 표정으로  강한 흡인력을 자랑하는 여자의 남편 M 역의 사샤 피퇴프의 관계가 중심축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우리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그러니 오늘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고 매우 상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데 나중에는 서로 사랑을 했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 했으며 데리러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강조한다.

여자는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그런 남자와 여자의 뒤를 따라 다니는 남편의 로봇 같은 언행이 기괴한 음악과 웅장한 성과 일직선의 공원을  배경으로 되풀이 되고 이어졌다가는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인물의 컷은 벽에 달라붙어 있는 그림이나 사진처럼 움직임이 없는데 그렇다고 생동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끝까지 봐도 해답이 없을 거라는 답답함 때문에 이제 그만 봐야지 할 무렵 러닝타임 94분의 영화는 끝난다.

한없이 지루하고 심오한 수도승의 설법처럼 모호하고 난해하지만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1959년에 만든 알랑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재미있게 봤으니 이 영화도 볼 만하겠지 하고 덤벼들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유럽 철학에 미친 실존주의나 베르그송의 철학이론 혹은 당시 프랑스의 사회와 정치적 혁신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된다나, 나 원 참.

 
어쨌든 보고 나서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정도만 얻었어도 큰 수확이겠다. 찐득이 처럼 달라붙어 함께 가자고 여자를 설득하는 조르지오의 목소리에서 마치 깊은 산속에서 나직히 울려 퍼지는 득도한 노스님의 목탁에 섞인 독경소리를 연상했다면 수준있는 관객이다.( 사족: 세련된 옷차림, 수준 높은 디자인 솜씨 부럽다~)

시인 박정대는 영화를 보지 않고도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대단한 시인이다.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박정대

그녀의 방은 그녀의 머릿결 속에 숨어 있었네

숲은 잎사귀들만으로도 어두웠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우리는 만났네

그녀의 방은 아주 조그만 다락방이었네

하늘은 칸칸의 별들을 하숙방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네

그녀의 옆구리에는 하나의 밤바다가 있어

물고기들 사이에서 외로웠네

외로움으로 하숙비를 지불하던 그녀를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는 사랑했네

겨울 내내 도마뱀의 꼬리처럼 툭, 툭

끊어지며 눈이 내렸네 추억은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부터 생겨나네

나는 개들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네

그녀의 방은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한 낮달처럼 꽂혀있었네

그녀의 문을 열면 아주 어두운 대낮이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는 떠나갔네

그녀는 하나의 숲과 하나의 바다를 가지고 떠나가버렸네

툭, 툭 끊어지며 추억이 내렸네 눈이 내리고 있었네

추억은 또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창문을 닫고 있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잉크로 그려진 애인들 노래를 부르네

아무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하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의 방은 어디에도 없었네 그녀는 그녀의 방을 가지고

그녀의 기억 속으로 떠나가버렸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로브그리예 원작.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시로 쓴다. 무지하다는 것은 때때로 무지하게 자유로운 것이다.

국가: 프랑스/이탈리아
감독: 알랭 레네
출연: 조르지오 알베르타치, 델핀 세이티, 사샤 피퇴프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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