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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학생부군신위(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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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학생부군신위(1996)
  • 의약뉴스
  • 승인 2012.11.1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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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가 되고 시는 영화가 된다. 황지우 시인의 ‘여정’이라는 시는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의 모티브가 됐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완도 무선국에서 걸려온 시외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새벽길을 나섰다.”

이 후 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식들이 모여들고 장례절차의 시작과 끝나는 과정들이 진솔하게 그려진다. 영화도 시와 얼추 얼개가 비슷하다. 시아버지(최성)가 외출하는데 착한 둘째 며느리(방은진)가 용돈을 쥐어준다. 시어머니( 문정숙)는 다방에만 있지 말고 자전거 페달부터 고치라고 한다.

큰아들(박철수)은 영화감독이다. 바쁜 촬영현장에 전화가 걸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부터 5일장이 시작된다. 검은 옷을 입은 여동생이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마을길로 들어선다.

이승을 떠난 망자는 칠성판에 뉘어져 몸이 묶이고 붉은 이불을 덮고 조용히 누워 있다.

 

콧구멍에는 솜털이 넣어져 있다. 전화연락은 계속된다. 술집에 있는 막내딸도 LA에 있는 셋째 아들에게도 연락이 닫는다. 큰아들은 말한다. 남은 것은 영혼과 분리된 아버지와 독특하고 까다로운 장례절차라고.

마을 스피커에서 노인의 사망소식을 전한다. 안내방송은 뒤이어 들려오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에 묻혀 버린다. 이어 꼬마가 등장해 망자에게 바치는 음식을 들고 손살 같이 뒷문으로 사라진다. 음식을 돼지에게 준다.

마을 김노인( 권성덕)은 공손히 무플꿇고 앉아 있는 상주들 앞에서 손님접대 문제 등 장례 준비에 대해 세세한 지시를 내린다. 그 와중에 만득아 하면서 망자를 막아 놓은 병풍이 쓰러질 정도로 흔들며 노인이 곡소리를 내면서 상가집으로 들이닥친다. 젊은놈이 먼저가고 늙은놈이 나중에 간다고 통곡한다.

밖에서는 돼지를 잡는다. 잔칫날 기분이다. 도끼로 머리를 내리쳐 반죽음 시켜놓은 상태에서 멱에 잘 벼린 칼날이 들어가고 이어 검붉은 피가 파란색 그릇에 쏟아진다. 죽기 직전의 돼지 멱따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쓴 돼지는 사내들의 거친 손길에 털이 뽑히고 칼질에 살점들이 이러저리 떨어져 나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은 그 즉시 썰어져 소주와 함께 안주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들어간다.

그런 모습을 본 꼬마가 돌을 던져 화풀이를 한다. 죽은 자를 위해 산 돼지가 죽었다. 조화가 실린 트럭이며 소주와 맥주 박스가 안바당에 쌓이고 천막에는 지짐이를 부치는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망자가 있는 방에는 많은 문상객들이 들락거리고 그 때마다 상주들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곡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일정한 운율이 있다. 흰색 마르샤를 타고 젊은 여자와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성이 차에서 내린다.

사내는 뒷자석에서 공기총을 꺼내 사냥 흉내를 내기도 하는 등 성공한 사업가 모습이 역력하다. 팔봉이(김일우)다.  팔봉이 역시 망자앞에서 심하게 흐느끼며 이복동생이라고 아무도 안 보는데 피붙이라고 형님이 챙겨 줬다며 대성통곡한다.

마을 어른이 예를 지키라고 하지만 내 식으로 한다고 막무가내로 절을 하고 울고 불고 한바탕 소송을 벌인다. 제멋대로인 팔봉이 처럼 그의 젊은 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어 주기에 바쁘다. 그 때 큰 며느리가 검정색 구형 그랜저를 타고 내린다.

청바지를 벗고 검은 상복으로 갈아 입는 폼이 인정머리 없는 사나운 큰 며리에 진배없다. 곡을 안한다고 타박하자 격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맞받아 칠만큼 전형적인 서울내기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여동생은 보험영업에 열을 올리고 꼬마는 맥주병을 들고 다니면 여전히 철이 없고 팔봉이의 처는 마을 앞에서 그네를 타고 논다. 만삭의 둘째 며느리는 혼자 분주한 가운데 연속을 보자고 아낙들이 일은 제켜 두고 방으로 몰려든다.

그 때 남정네 하나가 뉴스를 보자고 하고 뉴스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측근들을 모아놓고 백담사 유배에 반발하는 모습을 전한다. 공교롭게도 영화의 배경도 합천이고 전두환의 고향도 합천이다.

문상객들이 돌아간 늦은 저녁 상주들은 모여 조의금을 정리하고 붓으로 쓰면 하루 걸리네 마네 하면서도 격식을 지키자는데 의견이 모아진다.

미국 같던 셋째 아들도 오고 장례절차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다. 수의도 마련됐고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발인 절차만 남았다. 미국 아들은 곡소리 대신 성경을 읽고 상여꾼들은 분주하다. 국회의원 조합장 지서장 등 마을 유지 들이 찾아 오고 여야로 갈려 싸우다 조화를 서로 발로 차 부수기도 하는 등 난장판을 만든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는 팔봉이 처는 영화를 찍는 감독과 덤불속에서 섹스를 하고 평소 다방을 잘 갔던 망자를 위해 로타리 다방 아가씨들도 문상을 온다.

다방 아가씨들은 빈 맥주 박스위에 올라가 ‘비내리는 호남선’ 등 유행가를 부르고 밤새 떠들고 웃고 논다. 잔칫집에 따로 없다. 큰 며느리는 땅 문제로 다투다 차를 타고 서울로 먼저간다.

장례 마지막 절차로 분주한 상가집에 사이렌이 울리며 민방위 훈련 소식이 들리기도 하고 고기가 부족해 돼지를 한 마리 더 잡기로 한다. 도망다니는 돼지를 사냥총으로 잡은 팔봉이에게 복수하듯 꼬마는 차에 불을 지르고 꼬마를 패려는 팔봉이게 어머니는 그 애도 이 집 아들이라고 눈물로 통곡한다.

망자를 힘들게 하고 도망쳤던 윤기사는 두 개의 돈가방을 놓고 사죄를 한다.

상여가 나간다. 꽃상여에 올라탄 상주를 앞세우고 이제가면 언제오나~상여꾼들의 구성진 만가가 우렁차다. 장례절차의 하이라이트다. 발인이다. 이 집안의 액을 모두 가져가라고 바가지를 깨고 상여가 대문을 통과한다.

당산나무를 지나고 들판을 지나고 언덕을 올라 가파른 산으로 향한다. 마당에는 눈 보다도 더 흰 기저귀가 바람에 펄럭인다. 둘째 며느리는 애를 순산하고 큰 아들의 컷 하는 목소리와 함께 앤딩 크레디트가 오른다.

학생부군신위는 지극히 한국적인 영화다. 완성도가 높다. 망자를 통해 산자들의 이해다툼이 해결된다. 잘 만든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후련하다. 마치 “다 끝났어. 나 지금 서울 올라가.”하고 영화감독으로 나오는 맏아들의 앤딩처럼 홀가분한 마음이다.

황지우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섬의 부족한 흙으로 할아버지를 묻고 사람들은 돌아갔다. 통통배로 직행버스로 고속버스로 택시로 혹은 비행기로 모두들 일이 밀렸다고 목포로 광주로 부산으로 서울로 혹은 엘에이로.

국가: 한국
감독: 박철수
출연: 권성덕 김일우 방은진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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