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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언어로 세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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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언어로 세상을 보다
  • 의약뉴스
  • 승인 2007.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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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박용하, <견자>
▲ 박용하, 『견자』(열림원, 2007)

랭보는 폴 드므니(Paul Demeny)에게 보내는 한 서한에서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며 논리적인 착란을 통하여 견자가 되는 법”이라고 썼다. 견자란 누구인가? 그는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를 스스로 탐구하여 그 모든 독소를 자기 내부에서 고갈시켜 그것들의 정수만을 간직하는” 자이다. 랭보는 시인이 모든 감각의 착란에 의해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견자(見者),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랭보 이후, ‘견자’라는 개념은 하나의 문학적 아우라로 기능해 왔다. 박용하의 『견자』가 지속적으로 랭보의 시론(詩論)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용하의 ‘견자’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의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순간의 영원”에서 “하늘 눈동자가 열리는 소리”(「배터리도 없이」)를 듣는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받는 자”가 아니라 “고통하는 자”(「강물」)이며,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이다. 견자,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언어의 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언어의 그물을 드리우는, 그러면서도 끝내 인간과 말을 그리워하는 존재. 이 이율배반의 심적 상태는 침묵을 잃어버린 말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고 있다.

시인은 「새털구름」에서 “줄줄 새는 낙원의 말들”과 “질질 새는 약속의 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답변기계’(「……최악을 다하겠습니다」)들의 맹목적인 반복이 보여주듯이 세상은 온통 ‘빈말’(「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 천지이다. “도취와 심취 없는 날들”, “깊이와 높이 없는 날들”의 연속이 어찌 삶의 문제이기만 할까. 그리하여 “말만 많은 세상”(「원수」)에서 인간은 그 숱한 언어에도 불구하고 삼중의 ‘비애’를 감당해야만 한다. “말은 통하는데 몸은 안 통한다/비애다/말은 안 통하는데 몸은 통한다/그것도 비애다/말도 안 통하고 몸도 안 통한다/비애도 그런 비애가 없다”(「성욕」) 너무 많은 말들이 난무하지만, 말의 홍수는 곧 말의 빈곤이다. 말의 홍수 속에서 ‘말’은 그 원초적 기능을 상실하고 기계음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말할 수 없는 것들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하나 마나 한 것들
말하고 나면 후회할 것들
말 안 하면 우습게 보는 것들
기어코 말해야 하는 것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것들
말만 많은 것들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들
그 말이 그 말인 것들
말만 잘하는 것들
닳고닳은 것들
말 없이는 안 되는 것들
말로는 안 되는 것들
할 말 안 할 말 막하는 것들
말없어도 되는 것들
아예 말없는 것들
말이면서 노래인 것들
여벌이 없는 것들
이번 생만 있는 것들
수평선만 있는 것들
까진 무르팍만 있는 것들
심장인 것들
번개인 것들
말없는 손들
말없는 발들
말없는 입김들
숨들
목숨들
           - 「입김」 전문

세상에는 “말 없이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말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말 안 해도 되는 것들”도 있다. 시의 언어는 이 불가해한 경계의 시점에서 발화된다. “말이면서 노런인 세계, 말 없음의 말의 세계, 침묵의 언어, 그 속에서 시는 순간의 영원을 발견한다. “지껄이는 게 싫고 노래하는 게 좋다”(「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갯)에서 ‘지껄임’과 ‘노러는 언어의 상반된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로 상징되는 언어에 관한 자의식은 『견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견자(見者)의 시선과 언어가 맺는 상관성을 암시하는 시적 장치처럼 보인다. 그는 “말만 많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 “여벌이 없는 것들”이 내뿜는 침묵의 언어를 소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이 언어에 대한 단순 부정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싫고 인간이 좋다/말이 싫고 말이 좋다”(「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갯)라는 구절처럼, 박용하의 시적 태도는 대상에 대한 시비(是非)의 차원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 취향의 비편향성은, “질질 짜는 게 싫고 환히 웃는 게 좋다/지껄이는 게 싫고 노래하는 게 좋다”처럼 종종 호오(好惡)의 판단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사유하는 취향 이상의 가치를 지시한다. 말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침묵을 잃어버린 말의 범람이 문제이듯이, 인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깊은 광활함, 아득한 유한”(「심장이 올라와 있다」)을 상실한 인간들의 비자연성이 문제인 것이다. 시는 곧 언어(말)의 문제이며, 때문에 언어의 길이 끊긴 곳에서는 시도 끊어지고 만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자연스럽게 사는 일”의 가치에 주목한다. “좋은 것은 아무래도 자연이 제일 좋았어”(「연하장」)라는 표현은, 그러므로 단순한 긍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에서 ‘느긋함’(「욕조」), ‘무심함’(「카리스마」), ‘평심’(「잡념과 집념」) 등은 “자연스럽게 사는 일”의 다른 표현들이다.

박용하의 시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일”은 자연(nature)의 문제이자 자연(natural)의 문제이다. 시인은 「욕조」에서 ‘잡설’의 틈입을 끊고 ‘생각’을 방치해 두는 일의 자연스러움을, 「카리스마」에서는 슬픔의 기억과 공포로부터 벗어난 ‘무심한 하루’를 갈망한다. “큰마음은 또 얼마나 무심한갚(「잡념과 집념」)는 두 가지의 ‘자연’스러움이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자연’이 지닌 최대의 미덕은 ‘특별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일이다. “돌이 제자리에 있는 일/고구마가 감자가 아닌 일/박태기나무가 박태기나무인 일”, 그리하여 특별한 일조차 무의미해지는 세계. 시인은 ‘자연’에서 “지금 사는 곳이/늘 가장 깊은 곳”(「행성」)이라는 긍정을 본다.

그리고 「虛平線」에서 그 긍정의 세계를 표현한다. “만고의 밤낮을/별은 빛나기만 할 뿐/지배하려 들지 않는다/그저 빛날 뿐이다//지구의 낮과 밤을/해와 달은 비추기만 할 뿐/개입하려 들지 않는다/그저 비출 뿐이다//가끔 비나 진눈깨비가/그 빛을 씻어주기도 한다”(「虛平線」 전문) ‘자연스럽게 사는 일’은 무심한 공존의 세계이다. 별과 달은 지구의 밤낮을 무심히 비출 뿐 지배하거나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이라는 무심의 자연스러움, 시인은 자연의 이러한 속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바다는 나날의 유한을/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즐거이 호흡을 맞추”(「[견자]」)지만, 그 “다채로운 고락”은 ‘자족’(「족보」)할 뿐 간섭하지 않는다. 견자는 이 무심한 자연 속에서 숨겨진 삶의 비의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갚(「견자見者」)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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