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허구이지만 위협적인
상태바
허구이지만 위협적인
  • 의약뉴스
  • 승인 2007.01.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리뷰] 대통령의 죽음

▲ 부시의 죽음 이후 영화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멀지 않다는 측면에서 더욱 섬뜩하다.
2007년 10월 19일, 전세계 모든 방송국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속보를 전한다. “미국 대통령 부시가 암살당했다!” 언론은 앞 다투어 암살의 배후를 추적하고, 미국 국민뿐 아니라 전세계 국민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가브리엘 레인지 감독의 ‘대통령의 죽음’은 ‘미국 대통령 부시가 죽는다면’이라는 가상의 설정에서 시작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경제포럼에서 연설하기 위해 시카고에 도착한다. 그는 따뜻한 환대가 아닌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대를 맞이한다. 부시 대통령은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포럼에서 성공적인 연설을 하고 고무적인 느낌을 받지만, 경호원들은 시위대의 격렬한 시위를 걱정하며 대국민 인사를 취소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국민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행사를 감행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쓰러지고 만다. 그는 급하게 병원에 후송되지만 사건 5시간 만에 사망한다. ‘대통령의 죽음’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암살한 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후 미국과 전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물론 이 영화는 허구이다. 가브리엘 레인지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막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정부 관계자들과 FBI 요원 등에게 사전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았으며, 사건은 꾸진 것”이라고 밝힌다. 이같은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설명은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영화와 현실의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면 이러한 거리감은 지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작진은 실감나는 영상을 위해 1년 동안 부시 대통령이 나왔던 수십만 개의 뉴스 자료들을 모두 찾아보면서 그의 손동작 등 세세한 행동과 의상 스타일 등을 모두 분석하고,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스토리 보드를 맞추었다고 한다.

제목 ‘대통령의 죽음’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백미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부시 대통령이 죽기까지의 과정이다. 경호원들과 시위대는 부시 대통령을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다. 시위대는 부시 대통령이 탄 차량에 뛰어들기도 하고, 경호원들은 시위대를 피해 숨바꼭질을 벌이듯 시카고 도심을 헤쳐 나간다.

   
▲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미국 시위대의 모습. 2006 한국사회와 유사한 모습이다.
부시 대통령이 경제포럼에서 연설을 마치고, 행사가 시작되자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성공적인 연설에 한껏 고무돼 있는 부시 대통령, 1만 여명이 넘는 시위대의 돌출 행동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경호원들 그리고 부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소리를 높이고 있는 시위대까지. 카메라는 이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기도 하고, 한 화면에 보여주기도 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결국 부시 대통령을 향해 날아온 총탄은 정확히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수사 당국은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은 한편 미국이라는 제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인종차별 문제가 전면으로 제기된다.

시리아인 자라 아비 지크리(헨드 아요브 분)는 부시 대통령이 저격당한 바로 그때 근처 건물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저격범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는 이유도 모른채 아이가 보는 앞에서 끌려가 감옥에 구금되고,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취급받는다.

지크리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수사 당국 내부에서 조차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외부에서는 지크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조속한 사건 해결을 강요받은 이들은 지크리를 희생양 삼아 사건을 종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 체니는 시리아와 전쟁을 벌이고자 지크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영화는 유색인, 무슬림 등이 겪는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고발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지크리 아내의 인터뷰는 이런 맥락에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암살을 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부시를 죽이면 우리(유색인, 무슬림)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 것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나. 앞으로 나의 아이는 고개를 들 수도 없으며, 밖으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죽음’이 제기한 또 하나의 문제는 대테러 방지법 통과에 이은 인권탄압이다. 부시 대통령 암살 이후 미국 의회는 대테러 방지법을 통과시키고, 시위주동자를 비롯한 일반 시민들의 검열을 강화한다. 정부는 개인의 이메일 기록을 수시로 점검하고, 인공위성으로 위치를 추적한다. 이제 시민은 정부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고, 정부는 시민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부시의 죽음 이후 영화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멀지 않다는 측면에서 더욱 섬뜩하다.
영화가 그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더욱 섬뜩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비단 영화 속의 허구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는 테러에 대한 반감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벌어지고 있다.

또 미국의 신자유주의적인 팽챙이 지속되는 한 테러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테러를 빌미로 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감시하는 모습들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토니 스콧, 1998)을 비롯한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죽음’이 보여준 개인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그 어떤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허구임에도) 현실적이고, 그래서 위협적이다.

‘대통령의 죽음’은 2006년 10월 캐나다에서 열린 31회 토론토 영화제에서 공개돼,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는 심사위원들로부터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더 큰 진실을 드러내는 대담함의 미학을 갖춘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죽음’의 미국 내 개봉이 결정되자 가브리엘 레인지 감독을 비롯한 영화 제작진은 극우세력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또 미국 내 6천 300개의 스크린을 거느리고 있는 리얼 엔터테인먼트 그룹과 2천 500개 스크린의 시네마 USA 등의 극장에서 상영 거부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CNN과 미국의 라디오 네트워크로부터 ‘영화의 소재가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이유로 영화 광고 불가 입장을 통보받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머리 속에 끝임 없이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영화가 나타나면 어떨까’라는 의문이었다.

순간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2004)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다룬 영화는 명예훼손으로 3분 여 간 삭제된 채 상영됐다. 법원의 판결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원본이 상영되기는 했으나, 명예훼손에 대한 책임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대통령의 죽음’은 영화의 표현의 자유와 그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다시 떠오르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