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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탱크를 보니 살벌한 정권의 녹화교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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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탱크를 보니 살벌한 정권의 녹화교육이
  • 의약뉴스
  • 승인 2006.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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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인가, 장갑차인가 헷갈리지만 탱크라고 치자. 이 탱크의 해치를 열고 나는 좁고 어두운 공간속을 헤맨 적이 있다. 탱크 포 발사 소리는 매우 크고 포탄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우연히 선로에 얹혀진 탱크를 보았다. 위풍당당한 포신을 보는 순간 20년 전 군대 생활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탱크 부대 소속은 아니었지만 탱크를 직접 만져 보고 해치를 열고 안에 들어가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다.

사진에는 케리버 50 기관총이 거치되지 않았지만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탱크 위에 올라가 50을 손에 잡았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어떤 특수 임무를 띄고 민간인인 대학생들은 교육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때 탱크를 접했고 어스름 달빛 아래서 탱크 포의 굉음을 1년내내 들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탱크포 한발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600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 정확한 건 아니다.)

탱크를 일렬 횡대로 10여대 세워 놓고 1번 탱크에서 부터 10번 탱크 까지 순차적으로 발사하는 과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그 비싼 포탄을 1주일에 무려 10여발씩 발사했다. 전방 400미터 거리 정도의 야산에 발사되는 탱크포는 목표한 조준물을 정확히 격파 했는데 그 굉음 소리며 날아가는 야광 불빛은 지금 생각해도 황홀했다. 얼마나 타격의 강도가 셌는지 어떤 때는 뜨뜻한 파편 조각이 주변으로 떨어지기 까지 했다.

나는 당시 탱크의 50여 미터 후방에서 입을 벌리고 장관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한마디로 지축이 흔들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짬밥을 제법 먹은 정규군인도 약간 쫄고 있는데 민간인인 대학생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대북 대남 방송도 들리는 살벌한 시절이었으니 학생들의 기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업이 바로 녹화교육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나는 당시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국방의 의무와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는 잘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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