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어떤 인생은 고요하다. 잔잔한 해수면처럼 시종일관 차분하다. 또다른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저 이런 인생도 있고 저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상기할 뿐이다.
영화 제목이면서 주인공인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고요보다는 폭풍우 한 가운데 있다. 그냥 재스민이 아니고 앞에 블루가 붙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롤러 코스트를 타는 것만큼이나 곡예에 가깝다.
일단 시작은 좋다. 최상류층에 어울릴 만큼 화려하다. 좋은 집과 화려한 파티. 두 손에는 명품 쇼핑백이 가득하다. 그녀의 남편 할은 사업가답게 통이 크다. 재스민이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다. 비록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일류 대학에 다니는 천재 아들도 있다.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그러나 행복의 정점에는 나락이 있다. 90프만 가졌으면 좋으련만 다 가졌으니 이제 잃을 것만 남았다. 할의 외도와 사기질. 파혼이다.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 신세의 재스민. 그녀에게는 비록 부모는 다르지만 여동생 진저(실리 호킨스)가 있다.
진저는 언니처럼 똑똑하지도 예쁘지도 돈도 많지도 않다. 루저의 삶이 그녀의 몫이다. 진저의 동거남 칠리는 똑부러지기보다는 칠칠맞다.
그런데 인생이란 묘한 것이 루저 인생에게 위너가 기댈때가 생긴다. 바로 재스민이 나락으로 떨어진 바로 이 순간이다. 하늘에 있다가 땅에 내 팽개쳐진 기분을 누가 알까. 뉴욕의 화려한 삶을 접고 재스민은 진저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의 누추한 곳으로 향한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가 간다고 했듯이 쫄딱 망한 재스민은 일등석을 고집하고 명품 가방을 여럿 챙겼다. 여전히 허영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다. 진저가 보기에 꼴사납다. 얹혀사는 주제에 명품이라니.
자, 재스민이 진저의 집에 합류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예상하는 대로다. 빗나가지 않는다. 좁은 방구석에서 진저의 아들 둘과 떠벌이 동거남이 재스민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그러나 비치는 것과 생존은 다른 것이다. 일단 살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치과병원의 접수원이 새 직장이 되겠다. 그 일 제대로 될까. 더구나 원장이라는 작자는 재스민의 미모에 치근덕거리고 급기야 말썽까지 부린다.
한 번의 취업 실패로 낙담한 재스민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화려한 외모와 상류층에서 갈고 닦은 고급진 매너와 패션 감각, 인테리어를 보는 안목 그리고 상대를 홀리는 말 빨. 누구든 걸려들면 화사한 독니를 잽싸게 박아 넣을 만반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신경안정제는 버리자. 우울한 마음을 한 방에 날리자. 파티장이다. 거물들과의 접촉 기회다. 앞서 인생이라고 거창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인생이 뭐 별건가. 새옹지마 따로 없다.
사별한 외교관이 재스민의 눈빛에 춘삼월 눈 녹듯 녹아내렸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할과 살았던 것보다 더 나은 집이 눈앞에 있다. 창문을 열면 넘실대는 파도가 유혹한다.
꼭대기에 올라본 자만이 정상에 다시 설 수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재스민은 다시 상류층의 사다리에 올라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과거가 들통난 재스민은 외교관과 외교 관계를 끝냈다. 결혼은 물건너 갔다.
그녀가 갈 곳은 한꺼번에 400명이 모여 파티를 열만한 대저택이 아닌 볼품없는 진저의 집. 어미 잃은 새끼 사슴처럼 가련한 눈빛의 재스민은 이제 재기를 완전히 놓쳐 버렸을까. 현재까지는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도 과연 그럴까. 아직은 아닐 것이다. 재스민은 자체 발광하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받쳐 줄 학식과 언변과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상위 1%의 제스처가 있다.
영혼은 자유로우나 쉬운 여자는 결코 아닌 재스민의 재비상을 기대한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다. 할같은 사기꾼 말고 외교관 같은 하수 외교인 말고 진정한 사랑꾼이라면 재스민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
감독: 우리 알렌
국가: 미국
출연: 케이트 블란쳇, 샐리 호킨스
평점:
팁: 우디 엘런 영화는 믿고 본다. 아무리 못해도 보는데 걸린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블루 재스민>도 그렇다.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아주 진지하고 코믹하고 눈 물짜게 만들고 희희낙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쉼 없이 떠벌이지만 쓸데없는 말은 없다. 말은 다 이유가 있고 그 다음 말을 받쳐 준다. 톱니바퀴처럼 제대로 맞물려 돌아간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회상. 배우를 쓰는 재주도 남다르다.
어느 역이든 그가 고른 배우는 역을 제대로 해내는데 주인공 케이트 블란쳇 역시 그렇다. 이 역에는 그녀 말고 다른 배우가 없다는 식의 느낌이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끝날때까지 변함 없다.
비행기 옆자리 노부인에게 섹스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을 할 때부터 관객들은 알아봤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일이 잘 안 풀려 속상하거나 오늘처럼 체감온도 마이너스 20도나 하는 날에 보면 몸이 좀 훈훈해 진다.
끝내 아들과 화해하지도 남편과 재결합 하지도 원래 있던 꼭대기에 오르지 못했어도 위너가 아닌 루저의 자리에 있어도 불쌍하지도 동정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묘한 여운이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