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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빨리 나온 날짜가 보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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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빨리 나온 날짜가 보름 뒤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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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삼일 후라고 했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어수선한 시국이 문제였다. 비행기 편은 더더욱 어려웠다. 이번에도 영사관이 나섰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겨우 나온 제일 빠른 날짜가 보름 뒤였다. 잘됐어. 서두르다가 빠트리는 게 있거든. 유마가 말했다. 언제나 그는 결론이 나면 그것을 자기것으로 해석했다. 부정해 봐야 달리 이득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점례의 마음에도 들었다. 그래요.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 꿰어 쓸 수 없어요. 유마는 질문 대신 그냥 웃었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 어떤 상황이든 문장을 끌어다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무리 바빠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겠지. 당장 내일 떠나자고 한 내 허풍도 잘 받아 넘기고. 점례는 웃음을 뜻을 알아듣고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때로는 그것이 중요했다. 물어 보지 않는 것을 자꾸 말하면 아는 체 하는 지각없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를 일이다. 상황이 정리되자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 동료나 지인들에게 조선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고마웠어. 보름 후에 난 조선으로 돌아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조선이라는 말에 유마의 문학 동료들은 잘 알지 못해 너 일본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 조선도 우리나라야. 일본과 조선은 내선일체거든. 30년 넘게 같이 생활하고 있어. 말도 글도 통일되고 있고. 국제사회가 인정했거든. 그러니 이제는 한나라라고 해도 무방해. 한 나라라. 식민지의 다른 표현이로군. 말하자면 그렇지. 전쟁 후에도 그렇게 될까. 그야 모르지. 상대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겠지. 아직 조선은 스스로 무슨 일을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일본이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해. 조선 사람은 그걸 원해, 지금처럼. 그렇다면 하등 문제가 없겠네. 우리와는 다르네. 죽으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는데. 결국 나찌를 몰아 냈잖아. 조선은 미개인들이 사는 나라인가 보지. 그렇다면 문명화된 일본이 그것을 전파해야지.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거든. 스스로 문제 해결할 능력이 없는 학생을 선생이 도와주면 감사한 일이지. 이런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유마는 작가 모임 회원들과 일일히 악수를 나눴다. 그러나 술은 피했다. 이별주로 술을 하자고 말할 기미가 보이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짐을 싸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술을 좋아했지만 무턱대고 마시지 않는 유마의 습관은 이런 경우에도 철저히 지켜졌다. 

술이야 어디서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술을 먹어야 이별의 의미가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술이라면, 조선 막걸리가 술 중에는 최고다. 숭늉처럼 구수하면서도 뒷맛이 깨끗한 조선 막걸리를 생각하면서 유마는 입맛을 다셨다. 조선에 가서 편하게 마시자. 굶었다 마시는 술은 더 맛있거든. 유마가 이렇게 조선 술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을 때 점례는 가까운 지인에게만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알더라도 서운하지 않도록 미리 방책을 세웠다. 사정이 워낙 급하다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유마처럼 발이 넓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 보다는 소수의 사람과 어울렸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과도 맞았고 그림을 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그녀는 사람보다는 집과 세간살이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챙기는데 더 열중했다. 난 사람을 챙기지 않아. 대신 짐을 챙기지. 아까워. 놔두고 가는 것이. 내 피붙이나 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는 것들인데. 영원히 이별하는 것은 아니니 참자, 참으면 되겠지. 넌 이대로 꼼짝 말고 있어. 그대로 있어야 해. 점례는 앉을 때마다 디자인과 편리함 때문에 감탄하는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의자게게 말했다. 다정한 친구와 작별하는 것처럼 악수대신 쓰다듬고 만지고 닦았다. 그새 정들었다니까. 그래서 정이 무서운 거야. 이층 지붕을 봐. 이 붉은 벽돌. 기와는 정말 감탄이 나와. 그녀는 눈에 넣어가겠다는 듯이 붉은 기와의 이층 집을 고개가 아플 정도로 올려다 봤다. 두고 떠나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 죽마을 초가집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었다. 그때는 어서 돈 벌어 오겠다는 일념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럴 거라는 예감 같은 것도 있었다. 이 집을 살아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거실이며 부엌이며 쇼파며 유마와 자신의 체취가 남은 방들을 둘러 보는 점례의 마음은 착잡했다. 어디서든 마음이 무거웠다.

가져갈 것을 일단 챙겼다. 부피가 작고 무겁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작은 손거울 하나. 이건 꼭수 아이템이야. 펼치면 거울이 있고 닫으면 모나리자의 그림이 있어. 마치 그녀를 내가 소유한 느낌이야. 나를 바라 보는 군. 그녀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 이방인이라고 눈흘기며 쳐다 보지 않았다. 모나리자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예술혼만이 그녀가 추앙하는 가치였다. 이제 그만. 그녀는 거울을 손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림이 있는 작은 방으로 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단 때문이었다. 청소하지 못한 화단에 플라타너스 잎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여기에 눈이 오면 좋을 것이다. 날은 그래도 좋을만큼 쌀쌀했으나 아직 눈은 내릴 기미가 없었다. 눈을 기대하고 있는데 여름 꽃이 지지 않고 몽우리를 터트리는 것도 있었다. 검고 큰 나비가 날아 다녔다. 저들만 본다면 봄과 다를바 없는 날씨였다. 그녀는 봄에 심기로 한 찔레꽃 위치를 확인하고 그 넝쿨이 담을 타고 넘어가는 장면을 그려봤다. 지금이라도 심어볼까, 하다가 점례는 그만 두었다. 싹이 나왔다 하더라도 자라지는 못할 것이다. 초록의 줄기가 얼어서 회색이 되고 그것이 부서지는 꼴은 보지 않는 게 낫다. 가고 싶지 않다. 조선에 가고 싶지 않다. 여기에 익숙해 지고 있는데. 점례는 날짜가 다가오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준비는 다 해놨다. 벌집에 가서 유명인, 비 유명인, 막 떠오르는 신예와 초보들의 그림을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구입했다.

자신것과 합치면 백여점이 훌쩍 넘었다. 종이로 둘둘 말아도 제법 짐이라고 할 만했다. 이건 유마가 들고 갈 거야. 난 양산 하나만 족하지.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꼭 필요한 짐만 챙기자 일주일 후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영사관 사람들이 짐 꾸리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가 차만 먹고 갔다. 마침 집에 돌아온 유마는 그 사람들을 보고 적어도 한 달 후면 돌아온다고 집을 처분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이 집은 우리가 살 집이요. 그러니 우리가 떠난 후에도 다른 사람 들이지 마시오. 영사관 대신 온 부영사관에게 유마는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가 하이 하이를 외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유마만 본다면 그가 굽신거린다고 표현할 만큼 과도하게 친절을 베출 이유는 없었다. 다 아버지 후광 때문이다. 내무대신은 아들이 조선에 다녀 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영사관을 연결해 비행기 표 등 일체의 편의를 부탁했다. 에펠탑도 못 올랐어요. 다행인 것은 성당에는 들른 거지요.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가서 맥주한 잔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당신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미술관 빼고요.

나는 카페지. 노랑카페. 거기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 예술이 뭔지도 예술가의 자세가 뭔지도. 그리고 영감도 얻고. 그 사람들과 떨어지는 것이 싫어. 유마 역시 조선행을 반가워 하지 않고 있다. 처음에 서두르더니 이제는 작별이 아쉬운 모양이다. 굳이 그가 조선행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조선에 가서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런 모양새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한 달 쯤 후에는 다시 이곳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 돌아오면 에펠탑부터 오르자. 내가 왔다 파리여, 얼마나 낭만적이야. 벌써 돌아온 느낌이 드는군. 가기도 전에 돌아오다니. 역시 당신은 영락없는 낭만파 작가, 순수한 열정의 피가 가득한 예술가의 본색, 당신에게는 노랑이 어울려요. 내가 노랑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지. 가슴이 따뜻한 사람. 어, 당연. 당연한가. 유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잘 웃는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지. 상이 웃는 상이야. 이런 상은 쉽게 배신하지 않아. 나도 따라해야지. 곧잘 웃지만 더 그래야지. 대문을 노랑으로 칠할까요.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생각났어요. 바로 노랑 페인트를 사는 것. 어때요. 붓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하지요. 그럼 돈 들어 갈 일이 없겠네. 앞치마만 만들어 줘. 칠하는 건 내가 칠할 게. 칠을 마치고 마르면 그 위에 무얼 그릴까. 조선 호랑이 한 마리 어때요. 갑자기 생각난 듯 점례가 말했다. 무서워. 조선호랑이는 싫어. 너무 크고 눈이 그 노랑눈. 같은 노랑이라도 해바라기의 노랑과 호랑이의 노랑은 달라. 알아 모실게요. 호랑이는 빼고. 당장 결론 내리려고 달려들지마. 차근 차근 생각하자. 그것도 알아 모실게요. 

아 생각 났다. 내가 언젠가 당신에 떠준 학 자수 어때요. 자수를 그림으로. 그림은 당신 소관이니 알아서 해요. 난 그림옆에 시나 쓸까. 좋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어때요. 이 시. 볼테르의 시인가. 아니면 랭보. 그도 아니면 푸르스트. 다 빗나갔네요. 조선의 윤동주라고. 젊은 시인인데. 그러셔. 내가 몰랐네. 지금 활동하고 있나. 벌써 하직 했어요. 어떤 이유로. 그건 잘 몰라요.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깝군. 유능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 간다더니. 이제 됐네요. 학 그림에 서시를 새기면 파리의 명물이 되겠어요. 노란 대문집을 지나면 카페 하나 있지. 거기서 만나. 카페 이름은 몰라도 노란 대문집은 소문이 날 겁니다. 벌써 칠하는 거야. 점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자 유마가 농담했다. 그래요. 자신이 넘쳐요. 여기 경험은 돈주고 살 수 없어요. 조선에 가면 더 자신감 있게 터치하겠지요. 내가 파리 유학파 출신이다 하고요. 보란듯이 그려내면 다들 입을 벌리고는 파리의 신물결이 출렁인다고 호들갑을 떨겠죠. 조선미술전은 그야말로 북새통이고 매일신보는 대서특필하고. 설레는데요. 그래, 우리가 괜히 조선에 가는 제 아니라고. 다 당신 때문이야. 고마워요. 그리고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파리 살롱전에서 대상을 차지해야지요. 당신을 믿어. 그 자신감은 근거가 있거든. 나도 당신을 믿어요. 노벨상을 품어야지요. 그 정도는 아닐거야. 아니에요. 당신말고 그 상을 탈 사람은 없어요.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말해요. 근거 있는 자신감. 유마가 껄껄 웃었다. 심사위원이 당신이라면 모를까. 점례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파리와 이별했다.

점례는 다시 조선땅을 밟았다. 그리고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이번 조선행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큰 전환점이 될 처지에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몰려 있는 것은 점례였다.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점례는 서랍속의 삼촌 편지를 읽을 때를 기억했다.  식탁위에 있던 편지. 그냥 서랍 속에 넣으려고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꺼내서 읽어 보았다. 유마가 읽어준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거기에다 삼촌과 함게 지낸 세월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더해졌다. 낯익은 글씨체를 보고 떠오르는 인자한 얼굴에 점례는 잠깐 동안 작은 미소를 짓고 행복했다. 그러다가 추신 부분에 눈이 머물렀고 그 역시 유마처럼 숨은 내용을 알고 말았다. 편지의 진짜 목적과 조선행을 재촉하는 이유를. 그것은 아침 햇살은 아니었다. 지는 저녁놀에 일렁이는 검붉은 파도였다. 백년 묵은 사쿠라의 뿌리를 뽑을 만큼 강력한 바람이었다. 아니 본만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운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순간 점례는 몰라서 행복한 것보다 알아서 가여운 편을 택했다. 몸이 가랑잎처럼 떨어지면서 떨리는 것을 느꼈으나 읽은 것을 후회하는 마음은 없었다. 유마가 단순히 휴의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의심했다면 점례는 그렇게까지 떨 필요가 없었다. 조선에서 최고로 높은 몸값을 하는 사람이 휴의라는 것이 문제였다. 김구나 밀양사람보다 높다면 휴의는 도대체 어떤 중책을 맡고 조선에 잠입했는가. 현상 수배범 휴의. 점례는 그가 그 일에 빠져든 것이 질긴 자신의 운명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여기서 점례는 삼촌을 나무랄 수 없었다. 삼촌은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나름대로 휴의를 잡기 위한 덫을 차곡차곡 쌓아놓기 시작했다. 귀국에 맞춰 그녀에 대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가 파리 유학 1년 3개월 만에 대작 수 십점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각 신문에 보도됐다.

동행인은 일본 내부대신의 아들로 태평양 전선에서부터 함께 한 유마 호사카로 소개됐다. 점례가 주 내용이었으나 마지막 두 줄은 유마에게 할애했다.동행하는 유마는 파리에서 단편과 중편을 각 하나씩 발표했는데 그곳 문단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만큼 문학적 성취를 이룬 거물이라는 평이었다. 지금은 장편을 준비하는데 이것 역시 벌써부터 출판사 끼리 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 신문에 이런 기사를 제공한 삼촌은 조선에 있는 휴의가 반드시 이 기사를 볼 것이라는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총독부 이차 공격을 준비하는 그라면 신문의 기사 한 줄도 놓칠 수 없고 그것은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정보 업무의 일환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내무대신의 아들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은 일종의 역정보였다. 내부대신의 아들이 조선에 온다면 총독과 면담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조선의 고위급 인사들과의 접촉은 필연적이다. 점례는 그의 동선을 알 것이다. 휴의는 점례의 동선을 살피면서 디데이를 결정한다. 둘이 서로 만나는 것. 예측가능한 미래였다. 과연 그 예측대로 흘러갈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삼촌이 점례를 통해 휴의를 잡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면 휴의는 점례를 통해 총독의 일정을 파악하고 파괴 작전을 세우려 들것이다. 이 역시 예측 가능한 상황이다. 이처럼 점례는 양쪽에서 필요한 존재였다. 조선총독부는 휴의가 미군 특수부대의 폭파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다. 인간 병기로 변신한 그가 조선에 온 것은 지난번 총독부 습격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각오였으며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결기라고 판단했다. 어떤 식으로든 공격전에 그를 체포해야 한다. 몸값이 높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탓이다.

유마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점례가 편지 내용을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한 가상이었다. 점례와 휴의가 알고 있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어쩌면 나를 알기 전에 둘이 미래를 언약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만난 후에 만났다면 그건 문제 삼을 수 있다. 더구나 삼촌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휴의와 몰래 만났다면. 휴의가 찾아왔든 그녀가 제 삼의 장소에서 갔든.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때 둘이 했던 언약을 재확인 하기위해서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어떤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떤 신뢰이길래 조선독립에 목숨을 건 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위험을 자초하나. 유마의 상상은 끝이 없었으나 밑도 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상상했고 상상은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 맴돌았다. 그가 점례와 만나는 순간 삼촌 집 주변을 꼼꼼하게 에워싼 일경은 때를 놓치지 않고 휴의를 체포한다. 놓칠 수도 있지만 일단 체포했다고 치자. 자, 그러면 점례는 어떻게 되는가. 휴의의 체포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아닐 것이다. 점례에게로 튀는 불똥은 무시 못한다. 점례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면 먹혀들까.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것은 나에게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실제로 점례는 이 놀라운 체포작전을 알리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아는 사람이, 한때 연정을 품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오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잠깐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죄가 되는가. 된다면 되고 안 된다면 안 된다. 이쯤에서 유마는 점례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가졌던 인연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할지 심사숙고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곧 중단됐다. 그녀는 여러모로 대단한 존재고 그냥 버려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정치와는 더구나 아무런 연관이 없다. 괜한 희생양일 뿐이다. 그러나. 유마에 머리에 손을 갖대 댔다. 그 전과는 다른 눈으로 봐야한다. 조국의 역적을 연모하는 여자를 똑같은 눈으로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유마는 혼란스러웠다. 나의 처신은 그 뒤로 미루어 두자. 일단 가보자. 가보고 나서 편지 내용을 점례에게 알려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논의하자. 논의하고 생각을 정리했으나 유마는 알려 준다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점례는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면 점례에게 불리하다. 아버지에게는 이 일을 철저히 비밀로 하자.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아버지에게 부담을 줄수는 없다. 삼촌에게는 두말할 필요없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당연히 점례는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니. 비행기는 일본 땅에 곧 도착한다. 거기서 군용기로 조선에 가야 한다. 그러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만날지 아니면 조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는 길에 만날지도 유마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점례가 눈치챘다. 그래서 덜어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아버지를 뵈어야지요. 점례가 확신하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유마는 자신이 아버지 생각을 하는데 점례가 아버지를 꺼내자 자신의 생각을 들킨 사람처럼 이건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나는 이처럼 생각도 일치한다. 유마는 그런 점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하면 좋겠어. 유마가 물었다. 글쎄요, 이번 경우는 나도 판단이 잘 서지 않네요. 난 당신이 하자는 대로 따르겠지만 아버님께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조선에 가는 것이 불난 집 불을 끄는 것처럼 시급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군. 거긴 전쟁터가 아니잖아요.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알아 듣는군요. 아버님을 만나 편지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나눌수도 있고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썩 내키지가 않아. 그러면 다음으로 미뤄요. 그게 좋겠어요. 아버지에게 잡히면 일본에서 오래 머물지도 몰라. 당신 그림을 삼촌에게 보여주고 칭찬하는 모습을 어서 듣고 싶어. 조선에 도착하면 기자회견을 해야 할 거야. 나도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어요. 삼촌은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니까요. 내 그림이 삼촌에게 도움이 됐으면 싶어요. 아마 숙소도 마련했겠지. 아니면 바로 조선호텔로 가자. 거기에 짐을 풀고 삼촌에게 연락하자. 서운해하실 텐데요. 이층의 넓고 쾌적한 공간을 두고 호텔로 들어가면 화를 낼지도 몰라요. 아니야, 우린 이제 독립했어. 성인이고. 혼자가 아니고 둘이잖아. 간격은 지켜야지. 삼촌이라고 해도 너무 가깝고 너무 모든 걸 맡기면 되레 서먹해지는 것야. 적당한 비밀도 있어야 하고. 이 말을 하고 나서 유마는 그 비밀이 삼촌이 자신에게 쓴 편지글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인정. 점례는 유마가 간혹 쓰는 말을 따라했다. 뭐라고. 당신 말이 맞네요. 숙소는 조선호텔로 하자고요. 어때요. 굿 아이디어. 거기라면 총독부하고도 가깝고 여러모로 편리하겠네요. 국밥도 먹을 수 있고요. 그 집이 아직 그대로 있을까요. 그 집 아주머니도 무사하고요. 내가 별 걱정 다하지요. 사실 나도 궁금해. 그 집 맛이 변하지 않았을까 하고. 호텔은 됐고. 기간은요. 일단 삼 일로 잡자고. 점례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할 때가 좋았다. 당신이 결정을 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요. 나는 결정하는게 너무 어려워요. 그러니 왠만한 것은 상의하지 말고 통보해줘요. 그러면 난 당신을 따를게요. 인터뷰 걱정안돼. 나야 뭐, 막히면 당신이 대답해 주면 되잖아요. 내가. 아냐 당신 질문을 내가 대답하다니. 유마가 정색을 했다. 내 질문에 대한 답도 버거울 거야. 상황봐서 하자고. 현장 분위기라는 것도 있으니. 그래도 걱정되면 기자들에게 부탁해 질문 내용을 사전에 받는 방법도 있을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뭐, 안될 게 뭐 있겠어. 이런 질문을 하고 이런 질문은 하지 말라고 미리 삼촌이 언질을 주면 기자들은 알아서 할거야. 그런 게 있었네요. 몰랐어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 그리고 뭐, 우리가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니잖아. 예민할 필요없어. 대답하나로 세상이 어수선해질이 없으니까. 

점례가 잡은 유마의 손에 힘을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찻잔을 잡았을 때처럼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무렵 종로서장 완용은 일생일대의 모험에 직면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휴의를 산채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몸 속의 모든 것을 짜내서라고 그를 잡아야 한다. 사진은 확보했다. 중요한 길목마다 초특급 현상 수배범 휴의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총독부 담벼락에도 여기저기 붙였다. 경성역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서든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총독보다 더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을 듯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에서 활약하며 완용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꺽정이 같은 놈이야. 도대체가 흔적이 없어. 가서 보면 이미 줄행랑이고. 그렇다고 꺽정이가 승리한 건 아니지. 그의 최후는 다들 아는 일이고. 휴의 역시 마찬가지야. 시간 끌어서 득될 게 없어. 고통스런 일정을 빨리 마무리 하자고. 그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야. 완용은 환자를 앞에 놓고 최면을 거는 사람처럼 중얼 거렸다. 

경찰을 믿지 못하는 총독부는 조선헌병대 사령부까지 동원해 휴의 체포작전에 나섰다. 완용을 불러 놓고는 너만 믿는다고 했다. 치안은 경찰이지. 군은 형편없어. 그러니 이번 건은 자네가 해결하세. 이렇게 말해놓고는 뒤돌아서는 저 놈은 무뎌. 군인이 나서야 해. 하면서 양쪽을 경쟁 시켰다. 경찰과 군은 서로 공을 차지하기 위해 공조를 하는 척 하면서 서로 역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는 어쩔 수 없이 협력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사진 같은 거. 완용은 사진 을 건네 주면서 생색이라란 생색은 다 냈다. 이거 어떻게 구했는지 제가 말씀 드리면 놀라 자빠지실 겁니다. 헌병대사령관의 눈이 정말 둥그래졌다. 어떻게 사진을. 몽타주와 사신은 달라요. 사람들이 한 번 보면 잊는 그런 몽타주가 아니라니까요. 고맙소. 체포는 이제 시간 문제군. 가능하면 서로 공조해서 잡읍시다. 한쪽이 공을 다 가져가면 나머지 한쪽은 곤란해지니까. 그럽시다. 그러나 완용이나 사령관이나 그럽시다가 그러지 맙시다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반목했다. 그들이 이런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매일신보가 도착했다. 이거 보시오. 여기 유마 호사카 각하가 귀국했네요. 점례라는 조선여자와 함께. 그림 전시회를 대대적으로 할 모양입니다. 총독부가 후원하니 행사가 제법 크게 열릴 모양입니다. 왜 그 당신이 체포했던 조선제일 화랑 그 주인이 주선했나 보군. 사령관이 유마를 쳐다봤다. 둘이 삼촌 지간 이라면서요. 내무대신의 아들이 왔으니 그나저나 경호에 신경을 써야지요. 그런 건 종로서가 맡아서 하니 마음 놓으시고요. 그래 왔구나. 내 품으로 저절로 기어 왔어. 세게 품어 주지. 이 넓은 가슴으로. 휴의를 만나야지. 조선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가슴이 뛰었어. 내 알지. 여자가 남자를 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서 만나. 인사동 찻집. 거기 좋지. 분위기도 있고. 내가 잠시 피해줄게. 회포 풀 시간은 줘야지. 내가 누구냐. 너희들 친구 아니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 정도 인정은 베풀어야지. 내가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시간에 짠 하고 나타나마. 죽마을 친구 넷 중 셋이 모이는구나. 그나저나 여순이 년은 죽었나 살았나. 에잇, 내가 그것 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일단 너도 잡고 휴의도 잡자. 지금까지는 용케도 견뎌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네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다. 네가 태어난 곳으로 보내주마. 아니 군용막사로 보내주마. 너도 그곳이 싫지는 않았지. 그걸 내무대신 아들에게 알려줄까. 그러기 전에 죽마을 동창회를 열자. 술잔에는 술 대신 붉은 피가 들어 있을 거다. 그러자 완용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휴의가 보였다. 그는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멧돼지의 씩씩한 기운이 그를 감싸고 돌았다. 그래, 이거야. 내 애국의 앞길을 막는자는 그가 누구든, 신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가차 없거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부득이 그랬다면 다른 곳에서 삶을 좇아야 했다. 나와 대결한다고 이 완용과 대결을. 완용이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과 함께 침을 뱉었다. 숨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해주마. 그 때와는 차원이 다를 거야. 많이 배웠거든. 해부학을 공부했어. 어디 살을 어떻게 찢고 어느 뼈를 어디로 비틀어야 고통이 극에 달하는지 배웠거든. 고문 기술자, 조선 제일 고문기술자에게 한 번 걸려봐. 완용은 인상을 쓰면서 한 번 더 침을 입밖으로 던졌다. 천황과 대일본 제국을 욕보이는 짓을 한 자, 더이상 이땅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너에게 최선책은 나에게 체포되는 것이다. 차선책은 스스로 죽는 것. 완용이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한 번 피 맛을 본 칼이다. 애도 막부 시대 장인의 손에 걸쳐 무려 일년 만에 완성 됐다니. 칼 한자루 만드는데 일년을 공을 들였어. 봐. 명품이란 이런 거야. 여전히 살기가 느껴. 너를 잡으면 닭살이 돋을거야. 그때 푹 찔러야지, 암 베어내고야 말거야. 완용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허공을 향해 몇 번 휙휙 날을 세워 휘둘렀다. 다급한 날이 바람을 갈랐다.

호텔에 짐을 푼 유마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삼촌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짜고짜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다고 화를 냈으나 이내 진정하고 점례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어, 아니 편지 내용을 말했느냐고. 당황스러운 목소리였다. 말 안 했어요. 잘했다. 다 내게 생각이 있다. 지금 조선은 겉으로는 잘 통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용광로처럼 끓고 있다. 당장 제압하지 않으면 화를 면키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하자. 내가 저녁에 그리고 가마. 만날 사람도 있으니. 수건을 걸치고 점례가 욕실에서 막 나오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유마를 보았다. 머리를 털고 있는 점례에게 유마는 삼촌이라며 저녁에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곳으로 온다는 구료. 우리가 거기로 갈 걸 그랬어요. 미안하잖아요. 여기서 볼 일이 있대. 잘됐네요. 같이 보는 거죠. 물론이지. 아마 삼촌은 나보다 당신이 더 보고 싶을거야. 그럴까요. 그림이 더 우선이겠지요. 삼촌은 예술에 강한 애착이 있어요. 제 그림에 어떤 평가를 어떻게 내릴지 두근거려요. 떨리죠. 내 가슴에 손을 대봐요. 정말로 그렇군. 진정해 자기. 유마가 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 신문을 봤는데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한다는 내용이 있어. 당신이 신문사에 연락했을 리는 없는데, 아마 이것도 삼촌이 일정은 잡은 모양이야. 우리가 딱히 할 일은 없네요. 다 알아서 하시니. 유마가 걸터 앉은 침대에서 등을 뒤로 뉘며 푸념했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기자회견을 하면 기자들이 어떤 질문을 할까요. 뻔하지 뭐.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요. 준비랄 게 뭐 있겠어. 당신 그림과 내 글에 대한 것이겠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서 잘들 쓸거야.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비행에 익숙치 않아 저는 머리가 아직도 어질 거려요. 당신이 쉬어야겠군. 난 괜찮아. 근데 말이야, 여기 호텔은 프랑스 호텔만큼이나 깔끔하고 좋아. 방에 욕실도 딸려 있고. 전화기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조용하네. 무엇하나 부족한게 없어. 일본 작품이지요. 조선은 일본 때문에 많이 문명화되고 있어요. 그렇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마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당연한 걸 뭘 물어요. 이런 호텔은 아직도 조선이었다면 언감생심이지요. 아, 이건 사자성어예요. 일본 아니면 감히 바랄 수 없다는 뜻이죠. 그래, 일본이 조선에 참 좋은 일 많이 하고 있어. 유마가 다시 드러 누었다.

여기 이방이 어떤 방인지 알아. 팔베개를 한 유마가 한 뜬끔없는 질문이었다. 어떤 방이라니요. 이곳이 히로히토 황태자가 묵은 방이야. 예약할 때 돈을 더 주고 이방을 고집했어. 그러니 더 의미가 있지. 점례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궁을 향해 참배를 드려야 할까 봐요. 감동했어요.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남산이 어느쪽인가. 신사 참배를 해야지. 그러더니 유마는 참배는 하지 않고 이내 가는 코를 골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다. 노곤한 몸에 점례도 한 잠 잤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창가 쪽으로 갔다. 언제나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방에만 들어서면 어느 방이든 그녀는 창가를 선호했다. 밖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좋았다. 아래쪽으로 기와를 얹은 삼층 건물의 환구단이 보였다. 날개를 편 지붕선이 고왔다. 사각형의 건물도 보기 좋지만 기와가 가져다 주는 편한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덕수궁 정문도 보였고 그 아래 넓은 길에는 전차가 지나갔다. 자동차도 있고 인력거도 지나가고 보행하는 사람도 북적이고 경성은 활기차 보였다. 좋구나.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날로 발전해 가는 도시였다. 그러나 점례는 마음 한 구석의 답답한 기운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만약 휴의가 상하이에서 조선 땅으로 잠입해 있다면 신문에 연거푸 난 자신의 귀국 소식과 기자회견 소식을 모를리 없다. 묵고 있는 호텔까지 신문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이곳 직원들이 아는 기자에게 알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들락날락하다 우연히 한 기자가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짐작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경성에서 조선호텔은 일등을 상징했다. 특히 본국의 행세께나 하는 인사들은 죄다 이 호텔을 선호했다. 외국의 유명인사들이 오면 묵는 호텔이었다. 지배자든 사신이든 부자든 세력가들에게 조선호텔은 신분에 맞는 위상을 지켜 주는 적당한 장소였다. 그러니 유마가 묵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점례는 호텔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유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환구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아래에 휴의가 있을까. 어쩌면 호텔외곽이나 아니면 일층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점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번 그와 짧은 만남에서 가졌던 입맞춤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점례는 휴의의 열기를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지리라 생각했으나 질긴 인연처럼 그녀는 그 장면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은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우려고 하면 되레 더 살아나서 가슴을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문을 열고 일 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는 아닌 척하면서 주변을 흘끔 살펴본다. 홀로 있는 남자라면 더 시선을 끌 것이다. 달려간다. 저기 휴의가 있다. 피해요, 어서. 완용이 당신을 추격하고 있어요. 여기는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어서요. 달려요. 죽마을 백사장을 달릴 때처럼 전속력으로 질주해요. 놈들이 따라와요. 고개를 숙여요. 어서요. 권총을 재고 있어요. 점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숨이 막혔다.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눈을 감았다. 이 상태라면 진정할 수가 없다. 그녀는 챙겨온 수면제를 꺼내 단박에 물과 함께 마셨다. 파리에서 간혹 먹던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으나 다 부질없다며 유마옆에 누었다. 그리고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전화기 소리였다. 분명하다. 아까부터 여러번 울리고 있다. 노크 소리다. 그것도 여러 번 두드린다. 일어나야 한다. 머릿속은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잘 안된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뜬다. 유마는 없다. 어디로 갔나. 그대로 있으면 다시 잠이 들것이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달리다시피 창으로 가 문을 열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서너 시간을 잤다. 당신, 어디있어요. 정신을 차린 점례가 유마를 찾았다. 방문을 열었다. 화장실에도 없다. 어디로 갔지. 점례는 세수를 했다. 냉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인사동 화실로 전화를 걸었다. 삼촌 대신 점원인듯한 여자가 받았다. 아니 삼촌의 여자인지도 몰랐다. 누구냐고 낯선 목소리로 묻던 여자는 점례라는 말에 그만 목소리가 바뀌더니 삼촌은 조카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에 갔다고 말했다.

아마 세 시간 정도 된 것같아요. 점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단장을 했다. 파리에서 가져온 유마가 사준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왔다. 휴의를 생각하며 상상해 보았던 그런 로비와는 달랐다. 훨씬 더 고급지고 세련됐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유마의 등이 보였다. 맞은편에 시가를 물고 있는 사람은 삼촌이었다. 점례는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삼촌 하고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멀찍이서 말했다. 손을 들고 삼촌이 환하게 웃었다. 점례야, 깬 거야. 보기 좋구나. 모자를 쓰니 더 예뻐 보여. 아, 이거요. 점례가 모자에 한 손을 대고는 삼촌 조카님이 사 주신 겁니다, 하고 말했다. 유마는 어릴적부터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좋아했지. 자신이 받는 것보다 상대가 선물 받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나. 점례가 앉을 수 있도록 유마가 몸을 안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삼촌에게 보라는 듯이 신발을 조금 들어 올렸다. 이건 점례가 사준 거예요, 삼촌. 좋구나. 그런데 내 건 없니.  점례가 핸드백을 뒤적였다. 왜 없겠어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요. 삼촌과 잘 어울릴 거예요. 은색 파이프였다. 언제 산 거야 당신. 나도 모르게. 유마가 놀란 듯이 물었다. 조선행을 결정하고 나서 그림을 사러 벌집에 드렀을 때 산 거에요. 그림을 사고 나니 삼촌이 떠올랐지 뭐에요. 그래서 발길을 돌려 백화점에 갔지요. 비싸 보이는구나. 네, 좀 비싸요. 삼촌에게는 고급이 어울려요. 당신에게 이야기 한다는 게 깜박 했네요. 유마보다 낫네. 흡족한 얼굴이 삼촌 얼굴에 가득했다. 

삼촌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시가를 내려 놓았다. 대신 은빛 파이프를 입에 물고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도 좋지만 네 그림이면 충분하다. 오늘 커피값은 내가 내마. 삼촌이 환하게 웃었다. 유마가 점례를 보았다. 이제 좀 눈이 떠진 것 같군. 아까는 반쯤 잠겨 있었어. 잠은 다 잔거지. 저녁이 걱정이군. 걱정말아요. 잠이 안 오면 스케치나 하고 있지요. 그나저나 당신 말도 없이 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일어나고 보니 밖은 어두운데 당신이 없어진 거예요. 순간 무언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잠깐 생각해 보니 삼촌이 온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화실에 전화를 하고 부랴부랴 내려왔고요. 제 꼴이 말이 아니지요. 아니다, 그만하면 충분해. 너무 좋아. 삼촌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내일 기자회견 하는 거 알지. 네 들었어요. 아마 대대적으로 나올 거야. 사회면 한 페이지를 차지할지도 몰라. 이제 점례는 조선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 거지. 점례가 쑥스러운 듯 손사레를 쳤다. 그럴 자격이 없어요. 충분해. 유마가 참견했다. 당신도 참. 점례가 점잖을 빼자 삼촌은 그럴 것 없다면서 내일 기자회견에는 좀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겸손은 사양하라고. 그러면서 사진용으로 마음에 드는 그림 서너 장만 가져오라고 했다.

네것 두 점과 샤갈이나 유명 서양화가 작품 하나가 필요하다고 삼촌은 말했다. 점례는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에 실을 거거든. 그나저나  식사해야지. 네, 배가 고파요. 한숨 달게 잤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여보, 무교동으로 곰탕먹으러가요. 당연히 그래야지. 파리에서 부터 먹고 싶었어. 입에서 침이 도는데 삼촌 때문에 꾹 참았어. 삼촌도 같이 가시죠. 아니야, 난 여기서 또 만날 사람이 있어. 화랑가 사람인데 그림을 사줄 사람이야. 유마야, 삼촌이 크게 한몫 잡게 해줄게. 조선 최고의 부자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 최고는 싫어요. 둘째라면 몰라도요. 점례가 말하자 두 사람은 껄껄 웃었다. 그 시각 휴의는 종로통을 걷고 있었다. 천천히 걷다가 빠르게 걷다가 불빛이 들어온 가게를 구경하기도 하고 정거장에 서는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 흉내를 내기도 했다. 차림새는 완전히 노인 복장이었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머리는 희게 센지 오래였다.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어깨에는 작은 보따리를 맸다. 언뜻 보면 평범한 노인이 소일 삼아 거리로 나온 행색이었다.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만한 것이 못됐다. 조선에 잠입한 후 보름간 휴의는 낮에는 주로 이렇게 활동했다. 걷는 것은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일상의 관찰은 무심한 듯 보여도 큰 흐름을 보는데 요긴하게 작용했다. 경성에서 용산까지 갔다가 방향을 틀어 마포에서 신촌으로 다시 아현동까지 와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뒤를 쫒는 자가 있다면 노인치고는 다리 근육이 대단한 걸음걸이라고 추어올렸을 것이다. 

그는 걷도 또 걸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힘이 들면 휴의는 노래를 흥얼 거렸다. 백년설이 불렀지. 그래 꼭 내 신세가 이렇군. 그런데 가사는 처량해도 부르면 기운이 생겨. 노래란 신기한 거여. 군가를 부르면 다 죽었다가다도 적을 향해 돌격 하거든.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한이 없다고. 나에겐 있어. 타관 땅 발바서 돈 지 십년 넘어 반평생. 이건 나와 똑같네. 벌써 십년이 넘은 거야. 세월이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난 이렇게 오늘도 걷고 또 걷고 있어. 그래도 여전히 난 사나이. 사나이 가숨속엔 한이 서려 있어. 지금처럼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이 그리워져. 아니 고향은 잊었어. 그립지 않아. 그리운 건. 그래 그리운 건 점례뿐. 거리가 낯이 익어. 그런데 정말로 이국보다 차가워. 이렇게 냉대해도 되는 건가. 내 조국인데.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려고 하는데. 서러워 마라.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이슬이 내려도. 여기는 경희궁이네. 황성옛터나 불러볼까. 성은 허물어 졌으니. 대신 학교가 들어섰어. 학교는 좋은 것이지. 배우는 내용이 중요하지.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자. 이런 내용을 배운 학생들이라면. 그들이 자라서 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면. 아찔 하군. 자, 다시 종로로 돌아가 볼가. 광교 다리를 한 번 봐야겠군. 그리고 인사동을 거쳐 안국동으로. 오늘은 노인네 같지 않아. 청량리까지 가볼까. 휴의는 이렇게 매일을 걸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라는 것이 가지를 쳐 주듯이 정리가 됐. 보이지 않던 시류를 읽는 힘도 생겼다. 자, 디데이는. 언제로 할까. 다 풀었는데 이것만 풀지 못하고 있어. 동지들에게 물어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내 주위를 맴도는 동지들. 언제나 나와 동행하고 있지. 그들은 절대적인 존재야. 난 그들에게 모든 걸 주었고. 내가 아는 폭약지식을 다 주었어. 심지어 폭판 제조법까지. 이제 불발탄은 없어. 두번째까지 불발탄이라니. 동지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난 그 혼을 이어받았어.

임정의 선생은 나를 동지라고 불러. 동지.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지. 동지, 휴의 동지 잘 선택했소. 만약 미군부대 소속으로 동남아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작전은 큰 손실을 불러 왔을 거요. 탈출해서 무사히 여기 있다니 동지는 참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이오. 휴의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준비는 됐소. 자금은 넉넉하고 다이너마이트는. 조선에 가면 접선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거요. 광산에서 빼내온 것인데 양은 충분하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에 따라 조선독립에 큰 전환이 될 겁니다. 가능한한 총독 포함 고위 인사들을. 처리하라는 말이겠지.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다니. 일단 동지 두명과 먼저 가시오. 작전의 실행은 오로지 휴 동지의 결단에 따라 정해 집니다. 이곳과 접선이 없더라고 알아서 실행하시오. 

대대병력의 독립군 투입은. 언제 이뤄지나요. 그것은 아직 미정이오. 조선청년이 준비하고 있으나 제약이 있어요.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사적인 복수에 대한 원한이 문제요. 그는 총독부가 아닌 서대문형무소를 일차 목적으로 하자고 주장해요. 못할 것도 없지요. 거기에는 부인이 잡혀 있었어요. 만신창이가 돼서 걷지도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가 송장 신세로 그렇게 갔지요. 딱하지요. 남자도 아닌 여자의 몸으로 조선독립을 외치다 그렇게 됐으니. 휴동지의 마음도 조선청년과 다르지 않을 거요. 휴의가 고개를 숙였다. 여성독립군과 같이 침투해서 자신은 살아오고 그녀는 전투중에 부상을 입고 체포된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현장에서 죽은 걸로 보도됐으나 실상은 살았지요.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선생이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눈물방울을 닦았다. 휴의도 여러번 그 생각을 했다. 죽었더라면, 모진 고문과 여성의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형무소에서는 죽음 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지요. 조선청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조율을 하는 중이오. 조선청년은 자신이 이끄는 의열단과 독립군 부대를 지금 모처에서 지휘하고 있어요. 조만간 결정할 것이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서대문형무소는 빠집니다. 총독부 공격이 우선이오. 선생은 어느 새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분명한 것은 휴 동지의 폭파에 달려 있오. 동지의 작전이 성공하면 조선청년이 이끄는 대대병력은 서대문 형무소가 타깃이 됩니다. 내각의 허락은 이미 받았소. 이것은 임정의 공식 명령이오. 휴 동지. 선생은 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휴의와 눈을 마주쳤다. 안경 너머로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작전의 성공을 바라는 간절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이번 작전은 지난번 침투보다 더 위험하다. 폭약을 설치하는 과정은 어렵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은 영원히 작별인사라도 하듯이 그런 눈으로 한동안 휴의를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성공하고 오겠습니다. 저 때문에 한숨 짓는 일은 없을 겁니다. 되레 휴의가 선생을 안심시켰다. 그런 대화를 나눈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다. 해가 가기 전에 처치한다는 결심을 굳힌 휴의는 디데이를 언제로 할지 여전히 망설였다. 단 한번으로 작전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점례의 귀국소식을 들었고 그것이 자신은 물론 조선독립에 기여를 한다는 좋은 징조로 여겼다. 점례라면 총독의 일정을 알것이다. 잠깐이면 된다. 분 단위도 필요없다. 점례와 접촉만 한다면 일은 절반의 성공이다.

휴의는 같이 온 동료에게도 자신이 점례를 만나려는 사실을 함구했다. 생사를 같이 하는 동지라면서도 휴의는 그 일 만큼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알던 사이는 물론 그 어떤 관계를 암시할 수 있는 일체의 언급도.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하거니와 해서 도움이 될 것도 아니었다. 동지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작전상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종로 삼가 파고다 공원 앞에서 그는 노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경운궁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궁궐의 담을끼고 그는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숱하게 다녔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었다. 기와와 연달아 붙은 한옥집에 감 두세 개가 걸려 있었다. 나머지들은 잎까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드러나 있었다. 까치밥이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 흉내를 냈다.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직은 이르다. 그는 다시 인사동으로 향했다.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국밥집에 들었다. 의자 하나 사이를 두고 한 명의 동지가 따로 앉았다. 다른 동지는 맞은편 집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휴의의 눈은 맞은편의 화랑을 계속 힐끔거렸다. 혹시 점례가 드나드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안은 실내등이 켜졌으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일거리가 없는 다른 가게의 불이 꺼졌다. 그러나 점례가 일하던 화랑은 여전히 환하다. 삼촌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 잠깐 아주 잠깐, 그림자처럼 안쪽으로 나왔다가 다시 내실로 들어가는 여자가 보였다. 느낌상으로 그는 점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휴의는 뒷모습이나 옆모습 혹은 앉은 모습만 봐도 점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점례는 아니다. 그래, 그녀는 지금 경서부청쪽에 있을 것이다. 경성부청. 일자모양의 조선총독부와 본자 모양의 경성부청. 두 건물이 일본을 상징하고 있어. 두고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어디 두고 보자.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을 통치할지. 두고 보자고. 그런 뒤로 미루고 자, 다시 점례의 행방을 따라가보자. 

어제 조선호텔에 짐을 풀었다. 신문에 난 사실이니 확실한 거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 화실에 오지 않는다. 내일 기자 회견이 예정돼 있으니. 그런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휴의는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좀 먼거리였지만 이른 저녁이라 걸어서 거기로 가볼 참이었다. 휴의가 다시 종로 쪽으로 걸어갈 무렵 유마와 점례는 무교동의 한 국밥집에 들렀다.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와 반갑게 맞았다. 여기 국밥 두 그릇 주세요. 유마가 다가오는 아주머니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는 손님인 것처럼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이면서 반갑게 웃었다. 점례가 대신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점례는 아주머니를 알아봤으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우리 아는 사이에요. 몰랐어요. 점례는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아주머니 등뒤에 아주머니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맞아. 그 집이야. 주인장이 바뀌지 않았군. 유마가 말했다. 탁자아래로 유마가 발을 흔들었다. 복 떨어져요. 밥 먹을 때 그러면. 그런가. 아 참 여기는 조선이니 조선식으로 해야지. 점례가 웃으며 유마의 상체를 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양복을 입으세요. 그래요. 회견장에서 그런 꼿꼿한 자세가 어울려요.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유마가 몸을 세우자 점례가 말했다. 이렇게. 지적받은 아이처럼 유마가 최대한 등을 뒤로 더 젖혔다. 아니, 아니요.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당신은 당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간혹 잊을 때가 있어요.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세요. 넘어지면 어쩌겠어요. 웃음 거리가 되겠지. 다쳐요. 다친다고요. 점례가 꾸짖듯이 말했다. 가져온 곤색 양복이 기자회견장에 어울릴 겁니다. 바지는 일층 로비에 다림질을 부탁했어요. 아니, 언제 했단 말이오. 당신이 삼촌을 만나고 있을 때 문득 생각했어요. 겉옷은 괜찮은데 바지가 많이 구겨져 있더라고요. 대단해, 그리고 고마워. 유마가 습관처럼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당신은. 내 옷차림요. 이 상태는 어때요.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만 혹시 기자 중에 우리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잖아. 어제와 같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어제 같은 옷을 입은 점례. 이런 제목이라도 나와바. 망신이지. 모던 걸은 옷을 하루만 입어. 바꿔 입어야지. 왜 그 있잖아. 가슴에 사쿠라 장식을 한 그 옷 말이요. 레이스가 달리고 단추가 금색인 브라우스 말인가요. 그래 바로 그거요. 거기다 겉에 가벼운 가운을 걸치자고. 스웨터 같은 거 말이요. 현장에서는 그것을 벗고. 그러면 당신은 공주처럼 환하게 빛나겠지. 이 모자는요. 당신 마음대로 해. 쓰고 갈게요. 혹시 질문할지 모르잖아요. 당신 칭찬좀 대놓고 할게요. 파리 백화점에서 사준 거라고. 그럽시다. 그때 서너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노무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이런 곳에 올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차림새로 보아 한 가닥 하는 사람들 같았다. 일본어를 주로 쓰면서 간혹 조선말이 튀어 나왔다. 조선사람이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지 일본 사람이 조선말을 배워서 써먹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서는 술부터 시켰다. 주모 막걸리 한 주전자. 명령조였다. 의자를 거칠게 빼고 자리를 잡은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무슨 짓을 해도 문제없다는 태도였다. 유마는 불쾌했다. 점례는 조금 두려웠다. 그래서 빨리 이 자리를 파하고 호텔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유마는 그런 마음도 모르고 주모를 불렀다. 여기도 조선술 하나 부탁해요. 구석에 앉은 세 사나이 중 하나가 이쪽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마는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하는 시선을 했으나 실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누군가. 세력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 그러니 반칙 정도는 상관 없다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술이 오자 유마는 감탄하는 기색으로 노란 주전자를 보다가 한 두번 흔들었다. 이래야 잘 섞이거든. 지난 번에 배웠어. 놀라는 눈 좀 치우고. 유마는 잔을 들고 있는 점례에게 먼저 따랐다. 누런 빛깔의 잘 익은 누룩이 잔이 차오르면서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 간바이. 두 사람이 가벼운 말을 하면서 잔들 갖대 댔다. 옆 사람들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잔 더해. 아니 전 됐어요. 아직 어질어질해요. 단숨에 잔을 비운 점례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도 딱 한 잔 만 더해요. 내일 일정을 생각해서. 나 혼자 마시라고. 알았어요. 그러면 조금만. 점례가 잔을 내밀었다. 간바이, 간바이. 둘이 주전자와 같은 색인 노란 양은잔을 부딪쳤다. 저쪽에서도 간바이 간바이 간바이 하는 소리와 함께 천황만세, 하는 합창이 울렸다. 무리 가운데 목소리가 제일 큰 자가 종로경찰서 서장 완용이었다. 그는 호텔 체크인 당시부터 유마와 점례를 미행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변 보호 차원에서 경호임무를 하는 일이었으므로 숨기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그는 드러내기보다는 일부러 먼 거리 경호를 택했다. 경호 받는 대상이 알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완용은 다른 속셈도 있었다. 점례를 확실히 관찰하면서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직 아는 체를 해도 될 지 안 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점례는 완용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지난번 인사동 술자리에서처럼 점례는 완용을 의식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유마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보 장군의 촉감은 언제나 정확했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자가 혹시 휴의는 아니겠지. 저렇게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리가 없어. 건방 떨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그러면 나와는 무관한 그런 자들이거나 경찰서 정보요원들 일거야. 유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두어잔 술이 들어가자 뱃속이 따뜻해졌다. 피곤이 몰려 왔다. 장시간의 여행이 가져오는 기분좋은 노곤함이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내일 아침까지 푹 잘 것이다. 유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데 만족했다. 그는 일어섰다. 점례가 따라 일어섰다. 그때 구석에 있던 세 남자 가운데 유독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던 남자가 저 신사분 식사는 자신이 내게 해달라고 청했다. 유마나 점례는 그 말을 생생히 들었다. 두 사람이 멈칫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우리 식사를 대신 내겠다고. 그 때 완용이 다가왔다. 신사, 숙녀분이 일본 제국을 위해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 같으니 밥값은 자신이 내겠다고 했다. 신분은 묻지 말고 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코앞까지 와서 유마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일본 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시오. 그리고 사모님도요. 깍듯했으나 일부러 위엄을 담은 말이었다. 건방 떤다고 느꼈다. 이 놈이 감히.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마의 손을 떠난 완용의 손이 점례의 손을 잡았다. 짧게 깎은 머리와 왼쪽 얼굴의 길고 가느다란 상처 그리고 굵은 목소리까지 그는 젊은 시절의 완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납작한 코는 어쩌지 못했다. 작은 귀와 짐승처럼 뾰족하게 솟은 귀도 점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점례는 그가 완용이라는 것을, 그가 틀림없다고 순간 확신했다. 그러나 완용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하듯이 예의를 갖추면서 고개를 숙였다. 뒤통수도 영락없는 완용이었다. 왼 머리의 일부가 동전처럼 빠진 것도 여전했다. 완용은 말이야, 눈은 번뜩이는데 코가 못쓰게 생겼어. 그리고 귀도 사람 귀처럼 너그럽지 못하고 짐승처럼 뾰족해. 그래서 눈에서 얻은 점수를 다 까먹었어. 언제가 엄마는 휴의에 대해 잔뜩 칭찬을 늘어놓은 다음 완용의 관상을 평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그 말이 지금 갑자기 떠올라 점례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예의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유마는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꾹 참고는 나도 밥값은 하니 내가 먹은 것은 내가 내겠다고 말했다. 완용은 완곡하게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유마는 마지못해 다음에 만나면 오늘 신세를 갚겠다면서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당신이 내부대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았을까요. 그럴 리야. 알았다면 신분을 밝혔겠지.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조선에서 많지 않아요. 총독이나 그 아래 경무총감 그리고 헌병대사령관 정도일거요. 종로서장도 알지 않을까요. 당신 신변은 종로서 책임이잖아요. 점례가 일부러 종로서를 꺼냈다. 정식으로 대면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종로서라면 사진 정도는 가지고 있을거야. 그런데 그 작은 사진 하나로 나를 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게요. 처음부터 우리를 따라 왔을지도 몰라요.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호텔로 들어왔다. 점례는 뒤척였다. 아무래도 낮에 잔 영향 때문에 쉽게 숙면에 들지 못했다. 유마는 낮은 코를 골았다. 그는 원래 코를 골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간혹 골았다. 오늘의 코골이는 시차의 피로와 막걸리를 먹은 탓이었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난 점례는 밖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았다. 커튼을 열었으나 밖은 안과 비슷하게 어둠에 쌓여 있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서너 개 보였을 뿐 인적이 끊긴 경성은 적막 그대로였다. 그녀는 눈을 안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못 잘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점례는 기분좋게 잠이 들었고 아침이 돼어서야 눈을 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둘은 기자회견장인 일층 접견실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떨렸으나 점례는 곧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질문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까 봐 제가 파리에서 가져온 그림 몇 점을 이 자리에서 공개할게요. 점례는 이러면서 책상 아래에 미리 두었던 그림을 꺼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동작을 취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 하는 기자회견은 낯설었다. 그 전에 조선 미술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을 때 해 본 적이 있어도 여전히 어색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언제나 어려웠다. 여자가 무슨 그림을. 혹은 여자인 주제에 그리면 얼마나 그리겠어.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조선에 온 것은 아니니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억지로라도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회견을 해야 한다. 점례는 기왕지사 하는 거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이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겸손함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특히 유마와 하는 공동 인터뷰이므로 시선이 자신에게 너무 쏠리지 않도록 유마를 적당한 선에서 내세워야 한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데는 유마가 없으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점례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주인공은 나인것 같지만 실제로는 유마다.  그래서 도판 소개가 끝나면 공을 자연스럽게 유마에게 돌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나를 해방 시켰다. 마술을 부리는 치료사로 나의 깊은 슬픔을 없에 주었다. 잠깐이 아니라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동반자 이상으로 그의 추종자다. 나를 그를 추앙해. 그러니 내가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유마가 답변하도록 기다리자. 유마는 자신의 전부를 다 드러낼 수는 없어도 적당한 선에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기자들을 배려할 것이다. 이 질문은, 여기요. 당신이. 점례가 마이크를 옆으로 미는 시늉을 했다. 네, 제가 답변하도록 하지요. 유마가 대본을 읽듯이 선수를 쳤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겸손한 태도. 역시 대일본 제국 내무대신의 아들답다는 찬사는 당연히 그의 것이다. 점례는 무대 위에서 선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연 같은 역할이면 된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할 말은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자신의 당당함이 유마를 돋보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 만났나요. 이런 말랑말랑한 질문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꾸밀 것도 없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태평양 전쟁 때부터라고. 만주에서 그림을 팔다 아니 그리다 작전 나온 유마가 화풍에 관심을 보였고 그 이후 만남을 이어가다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면 될 것이다. 팔다나 그리다는 표현이 낮다면 화랑을 운영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고 바꾸면 된다. 유마가 이 대목에서 부연 설명을 해도 상관없다. 아니면 거기서 매듭이 지어질지 모른다. 결혼할 생각이 있나요. 이 질문은 유마를 웃음 띈 얼굴로 바라는 보는 것으로 바통을 그에게 넘기자. 아마도 유마는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면 기회가 되면 적당한 때에 발표할게요. 그런 사생활 질문에는 노코멘트 할게요. 다음부터는 하지 마세요. 지금과 같은 대답이 나올 게 뻔하니까요. 그가 다소 불쾌하게 나올수도 있다.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그것은 유마의 자유고 나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는 좀 미안했던지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 기왕 나온 질문이니 답변 하지요.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결혼한 그 어떤 부부보다도 신뢰가 깊고 그것은 서로 동지적 의리로 맺어진 까닭이다. 이렇게 나올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됐지요. 그림에 관한 것, 어려움이나 그곳 파리 분위기나 예술가들의 전후 움직임이나 하는 일상적인 질문이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겠다. 글과 관련된 것은 전적으로 유마 담당이다. 유마 선생이 투고 전에 미리 읽은 적이 있느냐. 작품에 대해 의견교환은 있느냐. 같은 질문이 자신에게 돌아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애매하게 말하겠다. 그것 역시 사실이니까. 간혹 스토리에 대한 의견은 주고 받아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저는 모르는 영역이에요. 

그림 말고 글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소설 쓸 생각은 없으신가요. 어떤 분야에 흥미가 있다고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여기 있는 기자분들이 그건 더 잘 알것이고요. 글과 그림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달라요. 창작의 고통은 비슷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오면 당황할까 봐 점례는 몇 가지 예상 질문을 뽑아 보았다. 그러나 딱히 이것이다라고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닥치면 할 수 있는 것이고 불편하거나 잘 모르는 것은 삼촌에게 미루면 될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유마 삼촌이 해주실 겁니다. 그러면 시선은 모두 그리로 쏠릴 것이다. 미술대전 출품 문제나 판매에 대한 것까지 친절한 삼촌은 설명을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기자회견도 마무리 될 터. 태평양전쟁에 대한 예상 같은 질문은 설마 나오지 않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유마가 내부대신의 아들이고 그가 작전 대장었기 때문에 애초 방향과는 다른 엉뚱한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것은 점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마가 유마가 답변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그러나 유마는 답변한다. 당연히 우리가 승리하지요. 지금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여기 계신 기자 여러분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기자들은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있다가 박수를 치거나 하이 하이를 연발하겠지. 점례는 이 정도로 정리가 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코 고는 소리가 그쳤다. 자세를 돌린 유마가 깊은 잠에 빠졌나 보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싶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말똥말똥한 정신이 점례를 그 자리에 붙잡아 놓았다.

침대에서 자기는 틀렸다. 여기 소파에서 잠드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될 것이다. 점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등을 편하게 뒤로 기댔다. 그러나 쉬이 올 잠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점례는 휴의를 생각했다.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마음 상태였다. 그가 다가와서 내가 알고 있는 총독 일행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지. 여보, 이틀 후에 총독과 점심 약속이 종로 한양성에서 있어요. 거기에는 총무경감, 총무, 내무, 사법 등 고위 정치인, 헌병대사령관, 종로서장 등도 참석할 거요. 이런 말을 들은 다음에 난 휴의를 만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그가 지난번 처럼 스쳐 가면서 혹은 모르는 행인처럼 다가와 길을 묻는다. 점례야 잘 있었어, 나 휴의 오빠다.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말할게. 난 적들을 쫓고 있어. 한편으로는 쫓기고 있고. 그건 그렇고. 총독 일행이 만나는 장소를 알아야 해. 급하다. 난 시간이 많이 없어. 한가한 사람이 아닌 건 너도 알지. 어디서 몇 시에 만나지. 그것만 말해다오. 서두르는 휴의의 얼굴이 반가움과 두려움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주저하다가 난 대답한다. 내일 정오 한양성에서 점심 하기로 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참석자는. 내각과 치안 담당자라는 정도만. 점례야 고맙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독립된 조선에서 우리 만나자. 살아서. 그 순간 휴의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둥글게 모아졌다. 그리고 해답을 찾은듯이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그리고. 급히 쥐었던 점례의 손을 풀고 왔던 길로 사라진다. 아니오, 나는 그런 것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내 앞에 나서지 마세요. 지난번은 그냥 넘어갔으나 이번에는 그대로 둘 수 없어요. 바로 신고하겠어요. 살려면 조선 땅을 떠나 다시는 들어오지 마세요. 조선독립 같은 되도 않는 일에 목숨걸지 말고요. 더는 당신은 나에게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할 것인가. 점례는  휴의와 일대일로 맞딱뜨린 상황을 이런 두가지 가정으로 정리했다. 두 길에서 점례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어찌할 것인가. 운명의 가혹함 앞에서 점례는 망설였고 두근 거리는 가슴의 진동을 느꼈다. 그런일이 왜 하필 나에게 왔고 하필 휴의인가.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그러나 점례는 그 가혹한 운명을 저주하기보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쥐어 짜내고 있다. 점례는 약하지 않고 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용은 왜 나를 모른 체 하고 계속 그냥 넘어갈까. 국밥집에서 완용은 분명 내가 점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 들어온 이후 그는 줄 곳 나를 미행했다. 유마를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탓할 일은 아니다. 자기 신분에 맞는 행동이었으니. 신분을 감춘 것도 그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끼어들기 좋아하고 함부로 나서는 그가 유독 내 앞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다.  아는 체는 꺼녕 생판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한다. 내가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점례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눈을 찔렀다. 흩어진 머리를 고르기 위해 점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좋다. 피가 거꾸로 돈다. 어지럼 대신 정신이 번쩍 든다. 그것은 완용이 판단할 일이다. 기분은 나쁘지만. 이 일을 유마에게 알려야 겠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외면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면전에서 따져야겠다. 왜 모른 척 하느냐고. 그러나 점례는 막상 그런 상태가 되면 그가 나서지 않는 한 먼저 알은 체를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잘된 일이면 된다.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다. 완용에게도 그럴까. 언제까지 그가 내 신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지. 침묵을 깰 경우 나에게는 좋은일인지, 아닌지. 

나를 이용해 휴의를 체포하려는 작전은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유리할 지 모른다. 내가 경계할 수 있으므로. 완용은 나와 휴의와의 죽마을 시절 관계를 안다. 점례가 휴의를 보호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을 수 있다. 완용은 그런 점에서 철저했다. 그럼 나는 그  보다 더 철저해야 한다. 현재는 그가 칼을 쥐고 있으나 나에게도 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휴의를 잡고 나면 다음 순서는 내가 될 것이다. 그 상황이 오면 완용은 내 존재를 유마에게 다 까발릴 것이다. 거짓말도 덧붙인다. 오해를 산 유마는 나를 버린다. 나는 그의 손에 불양선인을 보호하고 숨겨준 간첩죄로 체포된다. 점례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칼이 다시 눈을 찌른다. 내 패는. 유마에게 미리 나와 휴의와 완용의 관계를 다 말한다. 휴의를 만난 사실까지도. 완용이 모른 척 했던 일도. 그리고 무능하거나 아니면 부패혐의로 옷을 벗긴다. 종로서장 하겠다는 사람은 경성에서 넘쳐 날 터. 내가 아는데 완용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치부를 하고 있어요. 함께 데리고 사는 여자는 강제로 납치한 여자라고요. 실제가 아니어도 된다. 그렇게 말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그러면 실토한다. 완용이 쓰던 수법을 그대로 그에게 적용해 보자. 가슴은 좀 아플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것이 오는 것보다는 낫다. 상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내가 편하자고 한다고 해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어쩌지. 가슴이 답답해. 실토할까. 그 자가 나와 접선을 원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나를 통해 고급정보를 얻을 심산인 모양입니다. 나를 미행하세요. 그리고 내가 사인을 보내면 체포하세요. 헌병대도, 종로서도 해결하지 못한 독립군 최고의 불순 불자를 당신이 해결합니다. 유마의 표정이 어떨까. 나를 신뢰할까. 불신할까.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총독부가 현상금을 내건 수배범이 맞네요. 그러니 어서 사이렌을 울리세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그 얘긴 지난 번에 했었는데. 당신이 무심이 넘어가릴래. 내가 그랬었나. 유마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의 난처해 하는 표정. 이런 일로 순진한 유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내 손에서 해결하자. 

뭐가 문제지. 헤어진 이후로 난 휴의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해요. 휴의와 내통이라니요. 10년 째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 완용이 뒤집어 씌우는 거라니까요. 믿지, 난 언제나 당신 편이야. 단지 고향이 같을 뿐이고 휴의가 신문을 보고 나를 찾아왔으나 나는 거절했어요. 그리고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떤 정보도 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알리지 않았던 거고요. 묵고 있는 장소나 다음 만날 곳을 약속했다면 바로 당신께 말했을 거에요. 난 늘 당신편이었잖아요.  그건 내가 보증하지. 당신은 죄가 없어. 무죄야. 상상은 이어졌으나 점례는 심란해 정리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여순이 보고 싶다. 여순은 나보다 똑부라 졌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상의라고 하고 싶다. 여순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여순은 지금 대로만 하면 돼. 잘해 왔잖아. 죄 없는 네가 왜 불안해. 죄는 완용에게 물어야지. 왜놈이 휴의를 체포하다니. 그게 말이 돼.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여순은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리운 옛동무, 가끔은 너를 생각하는 나처럼 너도 나를 생각하겠지. 위로받고 싶다. 살갑게 대하며 웃어 주기만 해도 좋으련만.

멀리서 붉은 기운이 밝아져 왔다. 조선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점례는 순간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오랜 잠에 빠진 것처럼 많은 시간이 흐른 듯 했다. 그러나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실을 확인한 후 가벼운 화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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