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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5 22:42 (월)
꼬박 하루를 자고 휴의는 안전가옥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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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하루를 자고 휴의는 안전가옥에서 일어났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8.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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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안전가옥에 도착한 그는 일단 한숨 잤다. 한숨이라고 했지만 한숨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지 못한 것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지나갔다. 꼬박 그렇게 자고 났는데도 또 자고 싶었다. 하지만 휴의는 그러지 않았다. 꾸물거리기보다는 벌떡 일어났다. 더 잘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자지 않기 위해 훈련을 하는 듯이 좁은 방안으로 가볍게 뛰었다.창문도 열었다. 작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몸에 생기가 돌았다. 무너진 것이 일어서는 듯했다. 갑자기 모든 피로가 순간에 물러나듯이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엄마 품에서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거뜬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 몸의 개운은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명료한 머리 대신 뒷목은 조금 뻐근했다. 잘 때 베었던 개머리판에 눌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것 없이 정말로 좋았다. 상쾌해진 그는 일단 베게 대용으로 썼던 군장을 풀어헤쳤다. 안에 있는 것을 쏟아놓고 보니 산발한 여인의 머리칼처럼 방바닥이 가관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동안 그냥 그대로 두고 챙겨온 것들을 하나씩 눈에 넣었다. 이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구나. 버릴 게 하나도 없어. 급하게 튀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여기 나온 물건들은 모두 쪼그라든 군장 속에 다시 들어가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자 군장과 물건을 따로 놓을 수는 없었다.

특히 기관총이나 수류탄은 항상 같이 다녀야 했다. 분해된 기관총을 그는 꺼내서 결합했다. 노리쇠를 전진 후퇴해 발사 상태를 점검했다. 든든하기도 했고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다시 분해해 넣을 까 하다가 그러지 않았다. 유사시에 필요한 것은 원래 상태로 있어야 했다. 다행히 총신이 짧아서 배낭안에 넣어도 불쑥 튀어 나오지 않았다. 수류탄도 한 번 만져 보았다. 차갑고도 따뜻했다. 이것은 두려움은 없고 든든함만 손안에 잡혔다. 다이너마이트는 그대로 눈으로만 보았다. 닿을 까봐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것은 실행할 때 만져야 할 것이지 아무때나 손에 잡아서는 안 될 물건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휴의는 꺼내 놓을 것을 다시 집어 넣었다. 군장을 꾸리고 나니 다시 빼냈을 때 처럼 불룩해 졌다. 그래 성공했어. 탈출한 거야. 양쪽 다 앞면인 동전을 던지고 앞면이 나왔다고 좋아하는 것처럼 휴의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시덥잖은 행동이었으나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휴의는 그 모습을 풀지 않고 작은 손거울을 들었다. 그런데 얼굴의 반쯤은 웃고 다른 쪽은 무표정한 얼굴이 다가왔다. 이럴 수 있나. 한 얼굴에 두가지 표정이라니. 휴의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거울을 치운 그는 비누칠을 해서 옷을 빨고 흙 묻은 군화는 칫솔 뒤쪽을 이용해 털어 내는데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했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적다보니 금방 끝났다. 그러고 나니 다시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한가한 사람이었을 때 휴의는 습관의 무서움을 알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휴식이아니라 불안이 몰려 왔던 것이다. 손에 잡든 발에 걸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몸이 아니면 머리라도 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놀고 있는 꼴을 못보는 성격은 이런 것이다. 무엇을 하지. 우선은 임정을 찾아야 한다. 휴의는 그러나 아직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거리의 인파 속에 휩쓸리는 것도 위험했다. 그런 생각은 곧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임정은 자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알고 있을까. 훈련소를 탈출한 것을 알고 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 때문에 선생은 노심초사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아니면 미군쪽 통보를 받고 어떤식으로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선생은 다짜고짜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미군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휴의는 선생을 만나면 선생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대답은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대로만 보고하면 된다. 영리한 미군은 선생에게 알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휴의가 어디 있느냐고요. 내가 묻고 말이오. 그 사람은 아예 훈련소에 입소조차 안했어요. 만나지 안았어요. 요원을 보낸다고 하더니 임정도 믿을 수 없군요. 앞으로는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되레 이렇게 나올 것이다. 알져져서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을 시인할 만큼 저쪽도 한가한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서로 내통하고 있는데 자칫 알려서 이득이 될 게 없었다. 체포 한다면 그것이 더 유리한 길이었다. 

휴의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끈을 대기로 했다. 그것이 안전했다. 미군 특수부대는 틀림없이 탈영병의 뒤를 추적한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은가. 당분간 노출을 피해야 한다. 굳이 나서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밀봉한 밀서를 임정에 전달하는 임무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 밀서를 받은 선생은 휴의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입가에 물고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의 디데이를 짤 것이다. 내가 굳이 선생을 만나지 않더라도 받은 명령을 수행하면 된다. 동지 수고해 주시오. 그 말 외에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그 말은 지난번 작전에서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난 선생의 깊은 뜻을 알고 있다. 마음으로 통하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체된다면. 선생의 명령 없어도 단독으로 행동할까. 자신감이 생긴 휴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문제는 보조 인력이었다. 혼자서는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 숨어서 나오는 누군가를 저격하는 일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건물을 폭파하는 것은 다르다. 다이너마이트를 옮기는 것부터 시작해 선을 연결하고 타임어를 작동 시키는 일은 혼자서 하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적에게 노출될 수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우 체포되거나 현장에서 사살이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적어도 이인 일조라면. 하나는 방어망을 치면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짬이 생긴다. 휴의는 위험하더라도 형이라며 자신을 따랐던 조선족 청년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라면 믿을 만했다. 그러나 돈 벌어서 고향에 논 사겠다고 말하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배반할 수 없었다. 미군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게 왔다면 평생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탈출하면서 그 몫의 수류탄과 삽탄된 탄창을 두고 나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인접한 관물대를 쓰고 있어 휴의는 조선족 청년이 어디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 훤히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탄창을 잡을 수 있고 수류탄을 꺼낼 수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탈출이 확인되고 개별 장비를 점검하는 와중에 청년의 것이 사라졌다면 그 청년은 분명 의심을 살 것이다. 더구나 같은 조선인이 아닌가. 다행한 일이다. 그의 개인화기를 남겨두고 함께 탈출을 도모하지 않은 것은 그를 위해서다. 청년이 미군으로 임무를 수행해 월급 외에도 위험수당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일제와 싸우는 그 일은 나쁜 일도 아니니 양심이 손상될 일도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아니 전쟁 중에 휴가라도 나가는 일이 있다면 모아 논 돈으로 논을 샀으면 좋겠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그 청년이 대신해 주기를 바라자 휴의는 조금 신이 났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 처럼 만족했다. 보조인력이라. 여성독립군의 남편이라면. 의열단 단장 그 사람이라면. 보조인력에 휴의는 그 사람을 포함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가 내 대신 임정의 정식을 허가를 받아 온다면. 국무회의를 통과한 안건은 주석의 최종 승인을 받았어요. 이것입니다. 이 붉은 도장 보이지요. 선생이 꾹 눌러 찍은 것이오. 이로써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정식 정부의 명령을 받고 임무 수행을 하는 겁니다. 자, 갑시다. 

휴의가 중국 땅 어딘가에 박혀서 이런 생각에 빠졌을 때 또 다른 중국 땅 어딘가에서 여순은 말수와 함께 미술을 관람하고 있었다. 미술잡지를 틈틈히 보고 이런저런 서양미술사를 읽었던 여순은 병원이 문 닫은 어느 일요일 말수의 팔짱을 꼈다. 오랫 만에 하는 문화생활이었다. 여순은 조금 들떴다. 책 속의 그림을 한 두 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을 터이다. 말수는 아니었다. 여순이 보채니 한 번 가준다는 심사였다. 그는 미술보다는 포목점 주인과 연관된 독립운동에 관심이 부쩍 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순이 오랫만에 하는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미술관 가는 길은 조계지여서 거리 구경삼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그 길은 가는 독립군 활동가들의 활약상이 새겨진 곳이었다. 발길에 채이고 채이는 것이 조선독립군의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따라 가면서 말수는 자신도 그들과 무리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병원일만 아니라면 못할 것 없지. 그런 심산이었다. 그러니 미술관으로 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나도 그림을 보는 안목을 키우지 뭐. 설명을 부탁하자. 여순이 지식을 뽐낼 기회를 주자.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는 것도 재미지다. 말수가 팔짱낀 여순을 의식하기보다는 이런 생각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 결과 두 사람은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술관은 제법 컸으나 유명한 서양미술은 보기 어려웠다. 대신 고대 중국미술이나 조각들, 도자기류 등이 많았다. 다른 전시실에는 학생들이 그렸을 법한 아마추어 적인 것들과 일본 미술이 어린이 관객들을 위해 손님맞이용으로 걸려 있었다. 관람객도 많지 않아 감상하기에는 좋았지만 기대했던 작품들이 없자 여순은 조금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솜씨 좋은 작품앞에 다다렀을 때는 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녀에게도 미술에 대한 감식안과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말수는 억지로 따라나온 사람답게 여순을 앞질러서 보고는 미술관 열람실에서 미술잡지를 뒤적였다. 얼마 후에 여순도 그 옆에 앉았다. 미술잡지군요. 여기에 더 좋은 그림이 많아. 6월 호였다. 5월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나왔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호는 파리 미술을 한눈을 볼 수 있는 특집호로 꾸며져 있어 여순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혹시나 점례가 있을까. 거기서도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데 과연 점례는 여기에 있을까. 여순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조선 여류 화가가 그린 조선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림에 눈이 먼저 갔으나 여순은 글을 먼저 읽었다. 불어 옆에 영문으로 소개된 화가는 틀림없는 점례였다. 그녀는 읽다 말고 뒷장으로 넘겼다. 한 페이지를 넷으로 나눠 편집한 곳에는 점레의  그림 네 점 실려 있었다. 그녀는 점례가 자신의 길로 접어들었구나, 제대로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래,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면 언젠가 만나겠지. 둘이서 신나게 수다를 떨어야지. 네 그림 좋아. 정말. 하나 사라. 친구에게 그럴래. 알았어. 이건 팔기는 뭐해서 아끼는 건데 선물로 줄게. 우정의 표시로. 초창기 그림인데 의미가 있는 거야. 팔면 얼마하니. 집 한채 값. 정말. 모르겠어. 좋은 화상 만나면 될까. 어쩌면. 이런 대화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번졌다.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야기는 아마도 경성역에서 헤어진 뒤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다가 여순은 그건 아니다, 라고 못박았다. 굳이 그 시점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상해 병원을 개업한 순간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그 이전에 대한 물음을 점례가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어쩌다 그 순간이 오면 그렇잖아, 전쟁 시기에 다들 어려웠잖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이었어. 하고 뭉뚱그릴 참이었다. 그러면 눈치빠른 점례는 그래, 다들 그래.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우린 살아 남았잖아. 하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겠지. 점례가 보고 싶다. 점례는 파리 유학부터 꺼내야 한다. 만약 그가 그 이전의 어떤 시점에서 말을 이으려고 하면 일단 나는 점례의 표정을 살필 것이다. 그 표정에 생기가 돌고 있다면 오케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어두운 구석이 보이면 중단시킬 것이다. 그래야지. 난 밝은 게 좋아. 점례야, 네 그림을 내가 상해에서 봤다는 거 아니니. 글쎄, 미술관에서 잡지에 실린 네 그림 네 점의 도판을 본 거야. 그것도 파리에서 발간한. 놀랍더라. 그럴 줄 알았어. 어릴 때부터 넌 주관이 뚜렷했고 잘 흔들리지 않았잖아. 손재주도 좋았고. 점례는 아마도 웃을 것이다. 놀라움은 그 다음에 오고. 어떻게 그런 말과 칭찬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고 놀라지 않을까. 아냐, 난 그런 유명 인사와는 거리가 멀어. 겨우 초짜인걸. 운이 좋게도 기자가 잘 봐줬나 봐. 아직은 파리에서 명함도 못 내밀어. 이렇게 손사레 칠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녀는 웃으면서 미술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점례는 다시 전의 대화로 돌아와 내 그림을, 파리서 발간한 미술책을 상하이서 봤다고. 정말 세상은 좁구나. 이 난리통에도 할 것은 하고 만날 사람은 만나다고 하더니. 그러면 여순은 맞다고 맞장구 치면서 먹어봐, 이곳 만두 죽인다, 정말 죽인다니까 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들이밀 것이다. 냄새, 만두피와 그 속에 든 알의 고소한 냄새. 그런 것은 뜸을 들일 필요도 없다. 내민 젓가락에 걸린 만두를 냉큼 입에 집어 넣는다. 호호호. 맛있다 애. 넌 미식가가 됐구나. 정말이니, 고맙다 애. 파리지엥에게 미식가 소릴 다 듣고. 또 한 바탕 웃음이 터지겠지. 그리고나서 숨고르기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점례가 물을 차례다. 

어, 나는 뭐 보시다시피 이래. 의사가 체질에 맞는지 몰랐어. 어찌하다 메스를 잡았고 상하이에 병원을 차린 거야. 전공이 뭐냐고. 다해. 간호도 하고 아이도 받고 급할 때는 찢고 꿰매기도 하지. 내외산소. 다 말하자면 내 과목이야. 그건 또 뭐니. 아참 병원에서 쓰는 줄인말이야. 맞춰봐. 내과. 그래. 그러면 나왔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역시 넌 똑똑쟁이야. 아프면 너한테 달려갈게. 아프지 않게 잘 좀 해주라. 난 이제 백 살까지 거뜬하게 살겠네. 늙은이 꼬부랑 할매가 되어도 우리 이렇게 수다떨자. 오케이. 점례의 호들갑에 나도 맞장구치겠지. 그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를 마시겠지. 먹을 만큼 먹었으니 소화좀 시키자. 어디 차니, 맛있다 애. 원남성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거기서 왔어. 천년 넘도록 차 문화가 있었지. 차마고도는. 금시초문이야. 여기 사람들이 차마고도를 넘어 거기까지 갔다는 거 아니니. 거기라니. 거기가 어디더라. 그런 그렇고. 정말 중국은 대단한 나라야. 이런 나라가 어찌 일본에 먹히고 있는지. 여순은 피하려고 했던 말이 자신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랐다. 어때.  맛이. 깊은 맛이 나지. 그렇지. 여순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강요하지 마. 입맛은 내가 한 수 위야. 뭐야, 입맛 까지 이제는 접수한 거야. 그게 아니고. 평가할 시간을 줘야지. 뭐랄까. 음, 그래 대단해.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중국에서 처음 손님이 오면 어떤 차를 내오는지 알아. 점례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런 점례는 영락 없는 죽마을 그 점례다. 처음에는 보통차를 내와. 그리고 손님이 하는 말을 듣는 거지. 차에 대한 일가견이 있다 싶으면 고급을 준비해. 아니다 싶으면 하품을 내오지.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천 년 묵은 보이차나 방금 끓인 옥수수차나 무슨 차이가 있겠어. 거기까지는 몰랐는 걸. 너 중국 사랑 다 됐구나. 그럼 넌 불란서인. 둘이 또 까르르 웃는다.

그런 다음에 이제 남자 차례가 온 것을 알고 서로 누가 먼저 말할까 눈치를 보겠지. 각자 옆구리에 차고 있는 남자. 그것은 자신들 이야기보다 어렵지 않다. 점례는 당당하게 옆에 있는 유마 호사카를 내게 인사시킬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평생 동반자. 봐, 얼굴도 잘생겼지.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잖아. 어디서 만났느냐고. 그게 궁금하지. 그냥 오다가다 만났어. 오다가다. 정말 오다가다야. 그러면 우리는 신나게 박수치고 웃겠지. 더는 묻지 않는다. 큰 그림이 중요하다. 디테일 속에 있는 악마를 우리는 절대 꺼낼 일이 없다. 이제 내 차례다. 이 사람 말수를 소개할게. 이름은 촌스럽지만 세련됐어. 척 봐도 영국 신사 저리 가라지. 말수가 쑥스러운 듯 아니라고 얼굴을 붉힌다. 어디서 만났느냐고. 흔들리는 갑판. 아냐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 내가 일본 에서 수련을 마치고 상하이에 왔을 때 이 사람은 벌써 유명한 외과 의사였어. 나같은 초짜는 감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지. 병원을 물색하던 그는 의사이며 간호사 경력이 있는 날 보고 첫눈에 반한 거야. 급했던 거지. 나보다도 병원을 함께할 사람이. 말수가 눈을 흘긴다. 그런게 아니라오. 끝까지 들어봐요. 만난 날 오후 바로 청혼했어. 빠르다. 그래 좀 우리가 빨라. 전쟁통이라도 빠른 건 확실해. 어디서 청혼했냐고. 너도 짐작할 수 있지. 인생은 길거리에서 시작된다는 걸. 너도 오다가다 만났잖아. 말하자면 우리도 그래. 거리에서 그이가 나를 잡고는 나랑 결혼하자 글쎄 이러지 않겠니. 행인들이 쳐다보더라. 창피하지 않았어. 그 순간 정말 황홀했지. 이 대목에서 또 한바탕 웃지 않을 수 없다. 놀라는 것은 그 다음 순서다. 손뼉을 하도 많이 쳐 이젠 아플 정도다.

유마가 자기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 그는 점례가 소개하기도 전에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넌더리가 나지만. 이 사람 육군에서 별을 달았어. 점례가 말했다. 두 사람은 놀랐다. 여순은 군인이라는 말에 몸이 움츠러 들었다. 말수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 이었다. 군복을 완전히 벗은 지금이 내 진짜 모습 같아요. 이 사람은 군인보다 예술가야. 그림이라면 그림 글이라면 글. 역작이 나올 거야. 간혹 봅시다. 유마가 말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수가 잡았다. 말수가 잡아보니 군인의 손은 아니었다. 여자처럼 곱고 갸날뻤다. 이 손으로 어떻게 장군까지 올랐지. 말수는 자신의 뚜박하고 거친손과 비교되는 유마의 손을 기억했다. 여순은 이런 식으로 앞서 나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의식의 깊은 곳에서 빠져나온 순간 그녀는 무언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남편은 어디있지. 금방 나랑 여기 있었는데. 내 정신좀 봐. 옆으로 샌 시간이 길었나. 그녀는 도판이 있는 잡지의 펼쳐진 부분이 접혀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지. 점례의 그림이 여기 있어요. 그녀는 말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여기 흰 옷 입은 조선사람들이 있어요. 여순은 다시 점례의 세계로 들어갔다. 점례야, 네가 본 것은 이런 것이고 네가 그것을 표현했구나, 이걸 내 남편에게 보여줘도 되겠지. 도판 위에 작가를 집어 넣은 작은 사진 속의 점례가 뭘 그런 걸 허락까지 구하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가 점례의 그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여순은 다시 잡지에 눈을 돌렸다.

네 컷의 도판 중 맨 왼쪽의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서로 맞춰 입은 듯 똑같이 흰옷 입은 지게꾼들이 지게를 풀어 놓고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사실적이네, 이런 게 파리에서 먹혀들 수 있을까. 이런 그림을 서양 사람이 좋아하나. 그러니까 그렸겠지. 여순은 홀로 묻고 홀로 대답했다. 잡지를 얼추 읽고 나서 여순은 다시 말수를 찾았다. 저쪽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순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향을 잡고 그 쪽으로 걸었다. 도착한 거기에는 그림 대신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앞에서 말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어떤 사진일까. 궁금한 여순이 슬그머니 말수 뒤로 다가가 사진을 슬쩍 보았다. 그때까지도 말수는 여순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이 앞쪽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순은 갑자기 어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말수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은 본 듯하고 아니 본듯한 그 중간쯤에 있었다. 그러다가 안개가 걷히듯이 서서히 아니 본것이 아닌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 하얀 파도가, 그보다 더 하얀 모래에 걸려 넘어지는 한가롭고 여유 있는 바닷가가 배경이었다. 그것을 뒤로 서너 명의 여자들과 총을 든 군인 오륙 명이 앞에 있는 사진기를 보고 웃고 있었다. 군인들은 여자들을 감시라도 하듯이, 양쪽에서 둘러싸듯이 포즈를 취했다. 군인들은 무표정한 여자들 사이에서 근엄한 표정을 억지로 짓지 않고 웃고 있었다. 조선인위안부와 점령지 태평양의 일본군이었다.

여순이 얼어붙어 있듯이 말수도 땅에 박힌 말뚝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굴속으로 들어가는 기차처럼 아예 빨려 가고 있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을 찾기라도 하듯이 손가락으로 집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여순은 그가 알도록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서 헛기침을 했다. 여기 있었어요. 한참 찾았네요. 말수가 뒤돌아보면서 여순쪽으로 다가왔다.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사진이군요. 배경이 멋있네요. 어, 그냥 뭐 시답잖은 거야. 흔한 사진이지 뭐. 그래요. 다 봤나요. 그래 다 보고 자시고 할것도 없어. 그냥 심심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야. 나가서 점심이나 먹자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 말수가 손목시계를 보면서 여순의 소매를 급하게 잡아끌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행위였다. 여순은 마지 못해 따랐다. 사진은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오후의 태양이 눈부셨다. 무너진 갱도에서 겨우 살아 나온 광부들이 처음 맞는 햇살에 비틀 대지 않도록 두 손으로 이마에 손을 대고 해를 가리듯이 여순도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대로 놔두면 실명이 올 것 같은 강렬한 빛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여순을 따라다녔다. 사라지기는 커녕 아예 대놓고 얼굴 전체를 지져대고 있었다. 

두서없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하나의 질문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사진 속의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던가요. 여순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말수는 말없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걷는 데 열중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그러지 않으면 넘어지기라도 할 듯이 발에 힘을 주었다. 말수는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더워, 덥다니까 하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들은 식사 대신 술과 안주를 시켰다. 일요일 점심은 이래도 괜찮았다. 음식이 오자 오랜 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사람들처럼 둘은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술이 들어가자 여순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말수도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온갖 주제들이 다 동원됐다. 전쟁이야기 부터 조선의 운명과 병원의 운영 그리고 점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나와야 될것이 다 나왔다. 그러다가 정신이 갑자기 돌아온 여순이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수술 있잖아요. 조금 과하게 먹는다 싶어 말수에게 여순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간단한 거야, 어렵지 않아. 내가 술 때문에 실수하는 것 봤어. 믿지요, 믿어. 그러니 더 조심하라는 거예요. 여순이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말수가 웃으면서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이날 여순도 제법 마셨다. 겨우 세 잔이지만 뻬갈 세 잔은 여자에게 적은 양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하늘이 흐려져 손으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올 때는 걸어 왔으나 갈 때는 그러기에는 병원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말수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마차를 불렀다. 마차 안에서 말수는 여순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 여순은 넓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필요하면 나에게 기대세요. 당신도 나처럼 나에게 기대요. 여순은 자신이 기대면서 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속으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수는 마차를 세웠다. 병원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먼저 가라고 하고는 자신은 마차에서 내렸다. 포목점 윤사장을 잠깐 만나고 올게. 당신도 알잖아. 두 달 동안 보지 못했어. 여순은 잡을 수 없었다. 마차는 떠나고 있었고 말수는 손을 들었다. 그날 늦게까지 여순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말수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술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일이 생긴걸까. 여순은 이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걱정이 앞섰다. 병원 개업하고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술 때문에 말수는 여순을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다. 일어나서는 안 될 어떤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사진을 떠올렸다. 설마 그 사진에 내가 있을까.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휴일 한 시간 정도 해변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마주친 일본군과 찍었다. 찍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이, 이리들 와. 세월 좋네. 그 폼으로 사진 한 장 박자고. 상관인 듯한 자가 나서면서 사진기를 들고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 기억이 살아난다. 그런데 배경이 아닌 것 같다. 사진에 철조망이 있었는데 우린 그곳을 지나쳐 왔다. 아, 여순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모르겠다. 그 장면에서 내가 있었는지.

설사 내가 거기 사진 속의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단발머리를 서양식으로 볶고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썹엔 커다란 안경이 눈을 가리고 있다. 살도 제법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 볼이 조금 앞으로 나와 있다. 여순은 달라져 있었다. 여간해서는 그녀를 알 수 없다. 안다고 해도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말수라면 다르다. 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오래도록 머문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까. 보고 또 보면서 거듭 확인하려는. 미술관은 왜 그런 사진을 갖다 걸었을까. 나는 왜 미술관을 오자고 억지로 끌었을까. 그래 다 인정하자. 말수가 설사 사진 속의 인물 가운데 나를 점찍었다고 한들 무슨 대수냐. 나의 과거를 말수는 알고 있다. 그만큼 나를 아는 사람은 나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래도 아닌가. 덮었던 생채기가 드러났을 때 말수는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술로 대신하고 싶었다. 어리석었지만 지금 그는 그 길외 다른 길은 없다고 판단했다. 술 친구로 배불뚝이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집 안사람이 내오는 안주는 입에 착 달라붙었다. 이미 술기운이 있던 말수는 배불뚝이가 내온 독주 한 병을 먹고 거의 뻗다시피 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주절댔으나 그는 먹다 말고 방 안에서 잠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여순을 둘러싸고 일본군이 웃고 있는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지 마, 안돼, 안된다고 소리쳤으나 말은 입밖을 나와 방안으로 새어 들지 않았다. 그의 목을 군홧발이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거 왜이래. 놓으라고. 숨이 안 쉬어져. 숨 쉴 수가 없어. 말수는 물장구 치는 아이처럼 방안에서 사지를 흔들었다. 난 보았어. 분명히 보았다고.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때는 늦었다. 놔 나를 놔줘. 여순을 풀어주라고. 일제 강제 징용에 끌려 갔던 통영 뱃사람 말수. 얼굴에 땀 범벅이 되도록 석탄 가루를 가득 묻히고도 허리 한 번 펼 수 없었다. 그는 씩씩 거렸다. 사냥개에 쫓겨 달아난 깊은 숲속의 멧돼지 처럼. 젠장, 일을 시키려면 쉴 수 있도록 해야지. 두 시간 일하면 십분 정도는 쉬게 하는 게 예의아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종자들. 왜놈들이 왜 키가 작겠어. 예의를 모르니 그렇지. 말수는 모여 있는 노동자들에게 거칠게 왜놈욕을 해댔다. 쪽발이 놈들. 시킬줄만 알지 줄줄은 몰라.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말수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했다. 팔팔했던 기운을 그대로 토로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한 거 아녀, 그래 네 놈들은 먹지 않고 일할 수 있어. 쉬지 않고 할 수 있냐고. 개새끼들. 빠가. 칙쇼. 해볼테면 해봐. 그의 입에서 쌍욕이 나왔다. 왜놈 감독관이 그걸 들었다. 눈치 없는 말수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자기 뒤에 바짝 숨어 있던 일본인을 놓쳤다.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결과는 참혹했다. 군홧발이었다. 왜 감독관은 인정사정 없었다. 이것은 영화제목이 아니다. 영화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장면이 지나가면 털털 털고 있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작은 몸집에서 어쩌면 그런 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군홧발은 매서웠다. 인정사정.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무에 매달린 개 패듯이 왜 병사들이 가세해 마구 질렀다. 같이 대들수는 없었다. 노려 볼 수는 있어도 싸울수는 없었다. 대롱대롱 매달려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말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침내 그들은 일본도를 꺼내들고 허공을 한 번 그었고 쿵 하는 통나무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말수는 쓰러졌다. 쓰러지는 자는 시체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몸에서는 피가 나온다. 솟구친다. 그런데도 너그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는 쓰러진 말수의 얼굴이 타겟이 됐다. 육중한 군홧발이 사정이 없이 내리 눌렀다. 탁치는 소리와 억하는 소리가 합창처럼 들렸다. 얼굴이 파리해졌다. 핏기는 사라졌다.  이러다 죽는다. 임마, 그만해. 저 조센징은 말은 거칠어도 일은 다른 놈보다 세배는 잘해. 그리고 저 자 없으면 조센징 통제가 어려워. 화가 덜 풀린 군홧발이 마지못해 목에서 발을 뗐다. 

상관이 마침 그곳을 지나다 살인자를 돌려세우지 않았더라면 말수는 죽은 목숨이었다. 왜 감독관은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우수한 인력의 손실을 걱정하는 상관의 뜻에 미치지 못한 자신의 능력 부족을 사과했다. 그러면 안돼, 안돼지. 이 놈이 일을 잘한다고. 그렇다면 살려야지. 하이 하이. 그는 상관에게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채로 자기 수통의 물을 말수의 얼굴에 끼얹었다. 그것을 신호로 조선인 노무자들이 말수를 일으켜 세웠다. 꼬박 하룻 만에 정신이 든 말수는 다음날부터 다시 막장속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말수는 군홧발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것은 개머리판으로 날아왔고 마구 몸통을 갈기는 주먹질이었으며 뺨을 때리는 넓은 손바닥이었다. 그 길고 긴 고통의 강을 넘은 것은 병원을 차리면서부터였다. 어느 날부터 말수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는 다시 그날의 악몽 속으로 빠져들었다. 말수가 그날 본 사진은 여순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그러니까 그 사진 옆에 광산 노무자 말수가 곡괭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있었다. 얼굴에는 검은 칠을 하고 윗옷이 반쯤 벗겨진 채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말수를 나, 정말로 나 말수가 보고 있었다. 태평양 광산의 사진 속 주인공 말수를 상하이 병원 의사 말수가 보았던 것이다. 말수가 여순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던 것은 여순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사진도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보채자 옆에 있던 포목점 집 주인이 그를 흔들었다. 귀찮아서 그냥 자려고 했으나 어찌나 크고 날카로운지 내버려 둘 수 없을 정도였다. 흠뻑 땀에 젖은 말수가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조금 못됐다.

새벽녘 이거니 생각했으나 일찍 시작한 술판 덕분에 시간은 의외로 더뎠던 것이고 일찍 끝났다. 그는 일어났다. 잠시 비틀거렸으나 곧 중심을 잡았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됐다. 겉옷을 챙겨 입고 그는 주인에게 신세를 졌다고 말했다. 그새 윤사장은 코를 골았다. 말수는 그 소리를 듣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견딜만했다. 다만 머리가 아팠다. 어질 거렸다. 말수는 우울했다. 취기는 가시지 않았고 발걸음은 제멋대로 였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여순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너무 열심히 살았어. 이제 좀 쉬어도 좋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여기가 어디인가 하고 올려다봤을 때 붉은 유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안에 있던 여자가 이게 왠 떡인가하고 말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놀다 가요. 선생님. 일본인이죠. 일본인. 제팬이즈. 난 조센징이야. 조센징은 안 받지. 말수는 화난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여자가 흠찟 했으나 노련한 경험자 답게 자기, 돈 있어. 그거면 돼. 우리같은 여자가 인종 가릴 처지야. 뙤놈이든 왜놈이든 양놈이든 조센징이든 다 받아. 돈 보여줘. 봐봐. 말수는 허허 웃었다.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돈을 여자에게 확 뿌렸다. 어머 어머, 돈 날아 간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옆집의 여자도 가세했다. 말수는 그런 여자를 피해 걷다 부디쳤다. 넘어질뻔 한 여자가 겨우 몸을 진정했다. 저리꺼져. 더러운 눈으로 왜 쳐다봐, 돈이면 다야. 조센징 새끼. 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왠 지랄맞은 놈이 염병하고 자빠졌네. 그나저나 내 돈 내놔. 이게 왜 자기 돈이야. 저 놈이 푸렸잖아. 나 가지라고 한 거야. 웃겨. 먼저 줍는게 임자야. 이년이, 뭐 이년. 여자 둘이 멱살을 잡고 싸웠다. 고함치는 소리 욕지거리를 등뒤로 들으면 말수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향했다. 

길가의 상가 문은 굳게 닫혔고 인적은 끊겼다. 그 길을 말수가 걸어가고 있다. 저쪽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시 잠을 자고 있나. 꿈을 꾸고 있나. 말수는 자신의 팔뚝을 꼬집었다. 아픈지 안 아픈지 알 수 없었으나 틀림없는 군홧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어렴풋하다가 점차 실체를 드러냈다. 순찰꾼인가. 아니면 독립군의 아지트를 급습하는 일경의 움직임인가. 말수는 잽싸게 담벼락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취한 상태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이 정도 몸놀림이라면 나 하나쯤은 방어할 수 있다. 말수는 귀를 기울였으나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집 쪽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고 걷기 시작했다. 환청. 그것에 시달리면서 말수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여순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서성이기를 반복했다. 이런 적이 없었다. 말수는 어디에 있을까. 윤사장과 마실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있을까. 그는 오고 있을까. 창밖은 희끄무레한 가로등이 흐릿하게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 걸어온다면 멀리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창 아래에 서야만 한다. 그러면 이런 날에도 식별할 수 있다. 과연 창 아래에 누군가 서 있다. 말수다. 그 말고 이 시간에 거기에 서 있을 사람은 없다. 여순은 층계참을 뛰듯이 내려왔다. 그러나 일층 문을 여는데 망설였다. 그 사이 서있던 말수가 층계참에 앉아 있었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요. 여순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서 들어 오겠거니 했지만 말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이는 들오어고 싶어 하지 않나봐. 집은 싫은가, 아니면 내가 싫은가. 참다못한 여순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말수는 몰랐다. 모른 척 한 것일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온기가 훅 끼쳤으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몸을 데우기 위한 것처럼 말수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니. 말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순이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기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맡았던 익숙한 냄새가 여순의 코를 자극했다. 그에게서 폭약 냄새가 났다.

다이너마이트 냄새. 그가 신난 얼굴로 막사를 찾아온 첫날에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불안과 어떤 기대감과 공포가 섞인. 코를 뚫고 뼈마디를 뚫고 들어온 그 냄새는 여순의 온 몸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여순은 화들짝 놀랐다. 화약이라니, 왜 그 냄새가, 사라졌던 그 냄새가 어디 숨어 있다가 이렇게 불쑥 다시 나왔을까. 구역질이 올라왔다. 여순은 그러나 기댄 몸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을 고른 여순은 말수를 불렀다. 여보, 나에요. 여순이. 당신의 여순이 왔으니 안심해요. 말수는 응답이 없다. 응답하세요. 이렇게 처량하게 앉아 있으면 어떡해. 쓸쓸하잖아. 그런 것 하지 않기로 우리 약속했잖아요. 이번에도 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끊어진 목포의 눈물을 이어갔다. 여순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말수는 술을 더 먹어야겠다며 일어서기 위해 손을 바닥에 짚었다.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서자 말수가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겨우 몸을 지탱한 말수가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취했어 하면서 화를 냈다. 나, 안 취했다고. 누가 뭐래요. 내가 언제 취했다고 했어요. 여순이 말했다. 영락없는 술꾼의 목소리가 다시 말수의 입에서 나왔다.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입에서 역한 냄새가 함께 따라왔다. 이번에는 폭약의 냄새는 아니었다. 어디서 맡았더라. 그 와중에도 여순은 냄새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이건 분냄새야. 분냄새. 이이가 여자한테 갔나. 분냄새를 맡고 여순은 안심했다. 화약냄새보다는 분냄새가 안심이 됐다. 그녀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알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해요. 아까부터 많이 마셨잖아요. 아냐, 아냐 한 잔만 딱, 아니 두 잔, 아니 세 잔만 먹자. 그럼, 들어가요. 여기 계단에 술이 없는 것 아시죠. 알다마다. 역쉬 여순은 똑똑해, 똑똑한 여자가 여순이야. 여순아, 왜요. 왜요는 왜놈 담뇨고. 그냥 이름 한 번 물러봤어. 여순이 실없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수는 여순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여순은 순순히 술병을 들고왔다. 더 먹겠다는 것을 억지로 말리고 싶지 않았다. 말수는 기어이 술을 서너 잔 더 먹었다. 그리고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엎어진 술병처럼 습했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이 뚝 다물어졌다. 여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요. 꾹 참지 말고. 여순도 한 잔 따라 먹으면서 말수에게 말했다. 다 말해요. 하나도 남김없이. 아냐, 없어. 다 했어. 끝났다고. 그러지 말아요. 할 말이 더 있어요. 사진에서 무얼 봤나요. 혹시 아는 얼굴이 있었나요. 여보, 다 말해요. 속에 있는 말 감추지 말고 끄집어내서 다 말해요. 그러나 말수는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 아는 사람 있었어요. 말수의 어깨가 순간 들썩였다. 울고 있어요. 여보, 울고 싶으면 울어요. 여순은 엎어진 그 옆에 나란히 엎어져서 말수대신 자신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흘렸다. 여순은 나오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여보, 나 울고 싶어요. 울겠어요. 실컷 울겠어요. 말수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찔했다. 그래요, 오늘은 우는 날이에요. 날도 흐리고 울기에 정말 딱 좋은 날이죠. 몸도 그렇고요. 여보, 나 술 한 잔 더 해도 돼요. 여순이 물었다. 그리고 대답도 듣기전에 또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아까 마신 술에 또 술이 들어가자 여순은 취기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여보, 우리 함께 울어요. 우는 것 정말 오랫만이죠. 여순이 다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여보, 그거 알아요. 내가 그런 여자라는 걸. 더러운 여자. 당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네, 그런 여자가 바로 나에요. 더러운 년이라고 욕해줘요. 퍼부어줘요. 그런 여자. 그래 너는 그런 여자야. 난 너를 알아. 네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다 알아, 다 안다고. 거기 있었지. 군용막사. 모포 한 장으로 발발 떨면서 너는 나를 기다렸어. 아니 내가 아니야. 세상의 모든 군인이야. 넌 그런 여자야. 내가 목격자야. 포장했어도 숨길 수 없어. 여순은 말수가 이렇게 지껄여 주기를 기대했다. 환청으로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말수가 울었다. 정말로 꺼이 꺼이 울었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자 여순이 뚝 그쳤다. 순사가 온다. 그래 순사가 와. 눈물을 그쳐야 안 잡혀가지. 여보, 호랑기가 와요. 아니 순사가 와요. 눈물이 그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수는 어느 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여순은 심술궂은 악마가 걸어놓은 어떤 요술에 걸린 여자처럼 마구 몸을 떨었다. 소금에 절인 고기처럼 여순은 축 늘어졌다. 어쩌자고 그림을 보러 가자고 했을까. 미술관에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땅에 엎어져 흙속에 스며든 물과 같았다. 

말수는 그날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었다. 어젯밤 일은 깡그리 잊은 듯 했다. 다르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다를 것이다, 라는 여순의 예측은 빗나갔다. 차분하고 냉혹했으며 자기 일에 여전히 충실했다. 숙취를 이겨내고 수술을 무사히 끝냈고 환자가 없는 오후에는 피 묻은 시트를 세탁하는 것을 옆에서 도왔다. 여순 역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빨랫감을 모아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렀고 쥐어짰으며 발로 밟았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하는데 예정된 것을 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흉내내거나 연기를 하지 않아서 좋았다. 여보, 이것 좀 널어줘요. 팔 긴 당신이 힘쓸 차례에요. 힘쓰는 것과 긴 것이 무슨 상관이야. 길어야 힘을 쓰지요. 말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햇살 가득한 병원 뜰에 눈부시게 하얀 빨래를 정말로 긴팔을 이용해 가지런히 널었다. 새것에서는 피비린내가 없었다. 새것이 주는 비누 냄새가 말수의 코를 자극했다. 구겨진 것을 펴면서 말수는 코를 아무대나 비벼대는 강아지처럼 빨래에 코를 갖다 대기도 했다. 여순은 그런 말수의 행동에서 어떤 낌새라고 찾아려는 듯이 유심히 살폈다. 사랑스런 모습 아닌가. 그녀는 풋하고 웃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작은 것 하나에도 변화된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때때로 들었다. 내심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그런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그것은 어느 순간 두려움으로 변했다. 이전과 다른 말수의 어떤 것이 눈에 띈다면 여순은 겁을 먹을 것이다. 일상의 이 행복이 금 가듯이 깨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어떻게 이룬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수십 번은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 십 초 후에는 죽을 운명에 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살아났다. 말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불사신이 따로 없었다. 둘은 그렇게 살아서 지금 이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사진 한 장이 무어라고 쉽게 흔들릴 수 있을까. 그러나 여순은 말수의 가슴에 작은 틈이 생기고 크게 벌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큰 것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여순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말수는 그런 여순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이 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전보다 더 살갑게 대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하는 일종의 평화 시위였다.

걱정할 것이 따로 있지 나를 의심하느냐고, 말수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말수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아니 악했으나 만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천성이 변했다. 그래서 악성이 천성으로 바뀐 드문 예가 말수였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조심해야 한다. 시기가 문제일 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빠진 경험이 있다면, 나왔다고 해도 다시 빠지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것을 여순도 알고 있었으나 말수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말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순리가 아닌 반대로 자꾸 이끌려는 나쁜 기운이 들어오면 말수는 발로 걷어찼다. 분위기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다. 악마의 힘이 세지고 있다. 그러나 말수는 악의 손길을 무시했고 다가오면 세차게 뿌리쳤다. 결코 네 손은 잡지 않아.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말수는 눈을 부라리는 상대의 눈을 향해 맞서 부라렸다. 그런 날에는 기분전환을 위해 술을 먹었다. 과한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는 주량도 늘었고 횟수도 늘었다. 윤사장과는 한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는 것 같았다. 친해져서가 아니었다. 신뢰감은 여전히 바닥이다. 그러함에도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가는 발걸음이었는데 가고 나면 오기를 잘했다고 늘 판단했다. 윤사장은 말수에게 그만큼 편한 사람이었다. 둘이 시내서 만나 술친구가 되기도 했고 아니면 일과가 끝난 저녁 병원에서 한잔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술이 아니었다.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말수가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시가라고 손가락만 한 것을 들고 와서 입에 가득 넣고는 열심히 빨아댔다. 아이가 사탕을 먹듯이 황홀한 표정을 짓는 말수에게 그것이 그렇게 좋아요. 여순가 물었다. 당신도 한 번 해봐요. 유한부인들 가운데 피우는 사람이 많아요. 지난번 의사 모임에 갔는데 거기 나온 여의사들은 다 피더군. 남편과 함께 온 부인들 역시 나같은 시가를 잡고 있어요. 아, 참 이달 말일에 외과의사들 모임이 있어. 선조각이라고 아, 왜 당신도 알잖아. 그 유명한 중식당 말이오. 거기서 모임이 있는데 당신도 같이 가. 우린 의사부부니 눈에 확 띌 거요. 거기서 누군가 한 대 주면 못한다고 피하지 말고 고맙다고 받으면 세련된 분위기가 더 좋아질 거요. 말수는 말도 많아졌다. 여순은 말수가 어떤 식으로 유혹해도 거기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담배를 가까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냄새조차도 싫은데 겨우 입에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것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 흉측해 보였다. 난 빠질래요. 시가나 피는 모임이라면요. 아, 알면서 왜 그래. 학술 모임이라고. 안 피면 그만이지 뭐. 말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술과 담배는 어느새 말수의 기호품이 됐다. 환자에서 물러나면 시가를 잡았고 그렇다 보니 손에서 그것이 떠날 날이 없었다. 시가를 곁에 두면서 주량도 늘었다. 주말에는 취하게 마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취했다 싶으면 말수는 하지 않던 옛날이야기를 간혹 꺼내기도 했다. 꺼내기가 어렵지 한 번 꺼내고 나면 주절주절 말이 길게 늘어졌다. 이야기는 주로 노 저으면서 고기를 잡던 때였다. 망망대해서 비를 만나 귀항을 서두르는데 어찌나 고기가 많던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물을 당기는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였다고 웃었다. 그만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은 재촉하고 있었다. 더 머물면 죽는다고 어서 가자고 서둘렀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그물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뒤집혀서 죽을 뻔한 기억도 꺼내 들었다. 고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배가 뒤쪽 부터 가라 앉고 있는데도 잡은 고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치 그물을 걷어 올리듯이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붉은 얼굴이 더 붉어졌다. 여순이 끼어들 때라고 여기고 제때에 그렇게 된 것에 만족하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어떤 고기가 제일 맛있어요. 생선은 다 좋지. 그때는. 갈치도 그렇고 멸치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큰 놈과 작은 놈이네. 말린 조기는 맛이 기가 막히지.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그럼 생선을 한 번 먹으러 가요. 옛날 추억도 새길 겸 해서. 아냐, 아냐. 내가 통영을 떠나 오면서 생선은 입에 대지 않는 걸 당신도 잘 않잖아. 고기한테 몹씁짓을 너무 많이 했어. 그것들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억지로 잡아다가 칼로 토막 내고 도려내고 그랬잖아. 속죄해야지.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시구려. 여순은 갈치구이를 내심 기대했다가 어긋나자 조금 뾰로통한 기분이 됐다. 말수가 찾지 않으니 여순도 자연히 생선 반찬을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한 번 생선 이야기가 나오자 여순은 먹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려웠다. 만두를 먹을 때도 돼지고기를 삶을 때도 나물을 볶을 때도 갈치구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것은 입안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에는 쉽게도 떨어져 나가더니 이제는 한 달이 지나도 갈치 냄새는 입가에서 서성거렸다. 사진 속의 자신을 쉽게 찾은 말수에게 갈치를 먹이고 싶었다. 혹시 알아. 갈치를 먹으면 입맛이 살아날지. 아, 입맛이야 늘 살아있지. 잘 먹는건 문제없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갈치 얘기를 할 때 눈이 반짝였어. 먹고 싶다는 거겠지. 생선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그게 갈치를 멀리 하는 이유는 아냐. 그러면 돼지고기는 어떻게 먹나. 소고기는. 여순은 갈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오래갈까. 갈치 냄새는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여순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라고 여겼다. 생사가 경각에 달렸을 때는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지위도 있고 돈과 시간이 생기자 자신에게가 아닌 말수에게 어떤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생선을 찾을지 모른다. 입맛 어쩌고 하면서 갈치구이 먹을까 하고 먼저 생선꾸러미를 들고 올지 몰랐다. 말수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 갈치를 먹으면 기억상실 환자처럼 나의 과거를 잊을 지도 몰라. 사진을 봐도 나인줄 알아 보지 못할 거야. 그래 그가 기억하는 것은 통영 뱃놈과 상하이 의사가 전부야. 그래야 해.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그것은 여순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런 것 없어도 상관없어. 언제 내가 희망을 가졌었나, 말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순은 그렇게 위로했다. 

여순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지는 해를 따라 가다 어느 순간 다가온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말수는 자신을 바꾸고 있었다.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간혹 거친 말도 나왔고 무언가에 분노할 때는 예전에 보았던 살기 어린 눈이 번뜩이기도 했다. 우리 입양을 하면 어떨까요. 여순은 살인과 방화의 기억이 말수의 얼굴에 닥쳐오면 넌지시 그런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아이 하나 데려다 키우면 어때요. 당신, 어린애들 좋아하잖아요. 애들은 당신이 더 좋아하면서. 지난번 포목점 집 아이들 보고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했잖아. 그런 즐거운 모습을 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아이를 대할 때면 당신은 꼭 엄마 같다니까. 말수는 이렇게 받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찬성인지 나중일인지 여순은 몰라 답답했다. 둘러 말하지 말고 예스, 노로 대답해 봐요. 글쎄, 당신만 좋다면 난 좋은데 한 번 더 생각해 봐요. 애를 데려오는 것은 자식으로 들이는 것인데 내가 과연 아빠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래서요. 한다는 건가요, 만다는 건가요. 수술대 위의 환자를 째는 것과는 달라. 잘라 내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어 근심없이 피부 안으로 칼을 들이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야. 알잖아. 당신 나를 떠 보는 거지. 말수가 역전했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은 나도 기연미연해서요. 확신이 안 서요. 나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애는 장난감이 아니잖아요. 잘 알면서 그러네. 말수가 내 말이 그 말이라고 찬성했다. 그 말은 나도 아빠 자격 없지만 네가 엄마 자격이 있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여순은 부끄러웠다. 깜짝 놀라는 대신 그럴 자격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 아냐, 당신은 충분해. 세상에 당신보다 뛰어난 엄마는 없을 거야. 난 다만 당신이 아닌 내가 문제라는 거지.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말을 해요. 당신 답지 않아요. 이건 자신감하고는 다른 거야. 우리에게 아들이나 딸이 생기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한 번 가족이면 죽을 때까지 가족을 못 벗어나. 가족으로 살면 되지 왜 벗어날 생각을 해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알아요, 알아. 지금 당장이 아니니 천천히 해요. 이번에는 여순이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말수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몸을 한탄했다. 말수 몰래 여순은 임신 할 수 있는지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어떤 날은 베이징까지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여의사 모임이 베이징에 열렸을 때 핑계를 대고 하루 일찍 도착해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난소가 아주 망가졌어요. 애기씨를 생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알아들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일찍 혹사했어요. 그러면서 의사가 여순을 쳐다봤는데 그렇게 함부로 굴리고 엄마가 되겠다고. 참으로 뻔뻔한 여자군 하는 눈초리였다. 여순은 아무말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이 아니에요. 함부로 굴린 건 내가 아니에요. 조심하지 않은 건 그들이에요. 허락도 없이 함부로 달려든 건 그들이라고요. 여순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런 말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병원을 나왔을 때 여순은 서러웠다. 말수의 아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꿈은 깨졌다. 쫓길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 여순은 자식을 낳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 여순은 틈나는 대로 해외 의학 서적을 뒤적이면서 자궁이 아주 많이 부서진 여자의 임신에 관한 논문이 있는지 열심히 뒤졌다. 불임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두 어 번 읽어 보면서 해답을 찾으려고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기꺼이 쓰고 싶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내 몸뚱이를 다 지켜본 내가 아는데 임신이라니. 여순은 체념했다. 아이를 낳아 말수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의도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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