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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19 04:23 (일)
그녀를 만난 그는 광통교에서 검문에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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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난 그는 광통교에서 검문에 걸려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7.2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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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휴의가 경성에서 접선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완용은 만주에 있었다. 독립군 토벌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잡을까 하는 목적이었다. 일제는 종로서에서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완용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독립군 일망타진을 이루기 위해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일제는 적임자로 완용을 지목한 것이다. 설사 목적을 이루지 못해도 뭔가 실마리 정도는 찾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만큼 완용을 신뢰했다. 그가 어떤 정보를 가져오느냐에 따라 작전의 성패가 결정됐다. 토벌대장이 완용을 맞았다. 우리 조선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토벌대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여기까지 왔겠어요. 이것은 토벌대장을 깔보는 완용의 말투였다. 네 임무를 못해 내가 왔으니 넌 나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었다. 경성일도 바쁜데 먼 길을 왔어요. 토벌대장이 아니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겸손을 떨었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나 완용은 상관이 부하를 대하듯이 상황보고를 받았다. 그나 저나 토벌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경성에서 들은 바로는 독립군의 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면서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골치 아프지만 해결 못할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자존심을 상한 토벌대장이 토벌은 자신의 임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받아쳤다. 알아요. 토벌대장님이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다만 운이 나빠서 지체될 수는 있어요. 저도 그렇지요. 경성이 좀 시끄러운 곳이 아니잖아요. 그 일을 종로서가 다 맡아서 한다니까요. 토벌대장이 그 정도 식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성에 경찰서가 몇 개인데 다 맡아서 한다고. 그래도 가장 중요한 서인 것만은 분명하고 아쉬운 것은 자신이므로 완용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종로서가 핵심이지요. 고생이 많습니다. 내가 공치사를 받으려는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신임하는 부하가 탈영했다면서요. 탈영도 탈영이지만 적편으로 갔다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무슨 큰 죄를 짓고 도망간 겁니까. 완용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토벌대장이 작은 눈을 부릅뜨고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네 소관이 아닌 걸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표시였다.

어찌되긴요. 조센징이 그렇지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요. 못 된 버릇을 뿌리 뽑아야지요. 조센징이라는 말에 완용이 꿈틀댔다. 같은 조센징 주제에 깔보는 표현을 하다니. 쪽바리 한테 들어도 기분 나쁜데. 뭐, 우리 끼린데 조센징 어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럽시다. 토벌대장이 즉기 꼬리를 내렸다. 어색한 기분이 들 무렵  토벌대장의 부관이 들어왔다. 구세주인 것처럼 토벌대장이 의지 뒤로 등을 구부정하게 눕히고는 그래, 너 인사해라. 경성 종로서의 대단한 분이시다. 부관이 군인식으로 경례를 올려 붙였다. 됐어요. 같은 고생하는 처지에. 악수나 합시다. 완용이 앉은 자리에서 손을 내밀었다. 토벌대장은 기분이 상했으나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부관을 다스려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려던 계획이 빗나가자 체면이 구겨진 토벌대장은 어, 그래 너 거기 앉아라, 하고 명령했다. 중위 계급장을 단 그에게 토벌대장은 어린아이 다루듯이 명령했다. 내가 이런 존재인 것을 완용에게 보여주려는 태도였다. 그러니 함부로 주둥아리 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네가 존댓말을 하는 중위는 나에게 존댓말을 해. 이러면 누가 상관인지 알겠지. 그런 것을 모를리 없는 완용은 여기는 군부대고 토벌대장이 이곳의 대장이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완용이 누그러 지자 토벌대장이 담배를 권했다. 너도 한 대 펴라. 그러나 부관은 사양했다. 그러지 말고 핍시다. 완용이 거들었다. 그래, 손님이 권하는데 거절은 예의가 아니야. 이쯤되자 부관은 거절할 수 없었다. 부관은 휴의 대타였다. 담배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그는 바짝 긴장한 표정이 신참 같은 분위기였다. 단단한 각오가 느껴졌으나 어딘지 신입다운 어설픈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토벌대장을 바라봤다. 명령을 어서 내려 주십사하는 간청이었다. 어색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손님이 앞에 있어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눈빛만은 강렬했다. 원래 그렇기도 했지만 경험을 통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토벌대장과 함께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이런 눈을 했다. 대장이 그 눈과 마주쳤다. 재를 털고 완용 대신 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마침 그도 대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이 아주 단단해. 눈에 힘을 주고 있어. 네 놈이 낼 수 있는 최대한 각오가 그런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 시위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다짐. 어디서 낯이 익다. 많이 봐온 표정이다. 그렇지. 휴의도 네놈처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봤어. 나를 위하는 것이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그 절절한 눈빛. 그놈도 나에게 저런 눈으로 충성을 맹세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배신하고 나를 구렁텅이로 몰고 있다. 그래서 난 저런 눈을 싫어해. 언제든 배신할 수 있거든. 지금 당장은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생각이 달라질걸. 난 네놈의 속을 알아. 구석구석 안다고. 여기를 떠나는 즉시 달리 마음을 먹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래, 그것이 인간이다. 배신. 특히 전쟁터에서는 모두 믿을 수는 없는 놈들 뿐이지. 배신은 누워서 떡먹기 처럼 쉬운거야. 그렇다면 부관은. 토벌대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도 믿음을 저버리고 직업상 충성을 하고 있다. 다를 게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장이 부관을 의심의 잣대로 대하듯이 부관 역시 겉과 속이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고 그것을 그들은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표점은 같았다.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고 휴의를 체포해 공을 세우는 것이다. 

총독부까지 보고된 휴의의 배신은 토벌대장의 위치를 흔들었다. 신뢰에서 문제가 생겼다. 조센징은 믿을 수 없다는. 토벌대장이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잘못하면 공든 탑이 무너진다. 내가 해임될 수 있어. 옷을 벗고 물러날 수 있다는 말이지. 당장은 아니지만 젊은 중위로 놈이 걸려. 그를 특진에 특진을 시키고 내 자리를 넘겨줄 지 몰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상관을 치고 올라올지 몰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앞서 간 것이었다. 신뢰는 여전했다. 일본 육사출신은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는 일제의 믿음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놈은 우리가 믿어. 제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거든.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설 거야. 내가 선두에 서겠얼. 총싸움도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길거야. 보여줘야지. 일본 육사출신 장교의 위엄을. 토벌대장이 벙커에서 지시만 한다고. 난 아냐. 난 별을 단 장군이지만 내가 할 거야.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오. 완용이 물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너, 나가 있어라. 부관이 걸렸던 토벌대장은 그를 내보냈다. 의심하는 자 앞에서 의논하는 것이 체면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네요.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요. 완용이 일어섰다. 건방진 놈. 허락도 없이 일어나. 겨우 순사부장이란 놈이. 겁대가리가 없어. 파견 나온 주제에. 나는 그만 만주서로 가겠어요. 거기 서장님과 저녁 약속이 있거든요. 언제든지 와 주세요. 내가 휴의는 잡는데 기꺼이 도아 주겠어요. 이렇게 까지 나오지 토벌대장도 더는 잡을 수 없었다. 조만간 찾아 가리다. 완용이 나가자 토벌대장은 네 놈 없이도 널 잡을 수 있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이를 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았다. 

내가 선수를 칠 거야. 가서 기다려라 이 놈아. 대장은 종이와 붓을 챙겼다. 오랫만에 먹을 갈았다. 먹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자를 손이 없어. 혈서는 그만 쓰자. 자꾸 쓰면 격이 떨어져. 붓으로 내가 쓸 것은 그래 연습삼아 써보자. 우리에게 테러를 한 자가 붓글씨는 제법썼어. 내용도 좋고. 위국충정이니 대한국인이니 따위의 글자는 참 멋져. 나도 일필휘지로 한 번 써보자. 그는 갈겼다. 한문이나 일어가 아니다. 혈서로 맹세한다. 그는 혈서를 좋아했다. 혈에는 피의 냄새가 났다. 난 피에 굶주려 있어. 이 냄새는 나를 기분좋게 하지. 추격에 필요한 것. 세밀하게 한 번 적어보자. 총과 일본도. 그리고 수류탄. 부하들. 돈. 이거면 다 해결이 되는가. 만주국에는 자신의 일본 육사 직속상관이 차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실질적인 장관이었다. 허수아비 장관을 조정하는 상관은 후배를 기분좋게 맞아 들였다. 대장은 스승을 만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실책으로 독립군 잔당의 토벌이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따끔한 질책을 내려달라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너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만 일어나거라. 스승은 제자를 일으켜 가슴에 안았다. 네 충성심 부족이 아니다. 조센징이 잔혹한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토벌대장은 그의 가슴에 안겨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키가 작았다. 그래서 큰 키가 아직 차관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을 수 있었다. 반드시 섬멸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신의 약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그리고 조용히 스승의 책상 앞에 놓인 종이를 자기 앞으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눈을 들어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스승을 위해, 천황을 위해 몸 바치겠다는 혈서를 썼다. 단 한 문장, 대일본 제국에 충성합니다. 스승은 제자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그리고 피묻은 손을 잡아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싸매 주었다. 토벌대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했다. 이틀전이었다. 붓을 든 손이 조금 떨렸다. 붓에서 먹이 떨어졌다. 글자가 무슨 소용이냐. 행동이 중요하지. 그는 붓을 내려 놓았다. 여전히 붓을 잡고 쓰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민의 시간이 깊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냐. 이제 손을 그만 찌르자. 그건 너무 선명해. 나보다도 상대가 더 놀라. 내가 과연 스승에 미칠 수 있을까. 정치를 배워야 해. 난 너무 직설적이야. 부관을 너무 다그치지 말자. 강요하지도 말자.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아무리 날고 기어도 부관은 나에게 미치지 못해. 거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한 참 걸려도 쉽지 않아. 그는 부관을 무시하지 않았으나 됨됨이나 그릇이 휴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경쟁심을 갖다니. 어리석어. 난 스승에게 배워야 해. 

스승이 나에게 선물을 주네. 일본도. 날이 섰어. 조심하지 않으면 벨거야. 이걸 걸어두자. 보는 것 만으로 든든해. 상관은 부하게에 늘 선물을 주는 구나. 난 부관에게 무얼 주지. 구형 권총을 주자. 놈은 좋아하겠지. 신형은 내가 차고. 권총을 차고 으시대는 꼴을 좀 보자. 요즘 애들은 신선한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총은 달라. 묵직한 것이 그걸 차는 순간 넌 나에게 말이 아닌 진짜로 충성하게 될 거야. 나도 그랬거든. 허리에 권총이 달랑 거릴 때 난 작심했지. 허튼 짓 하는 놈이 있으면 즉결처분 하겠다고. 권총을 받은 부관은 신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가자. 토벌대장은 짚차를 타고 만주경찰서로 향했다. 이번에는 네가 좀 힘 좀 써라. 완용을 상대하는 것을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권총에 눈이 팔린 부관은 네, 하고 대답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눈치껏 하자. 모르면 내가 손에 쥐어주지. 완용은 생각보다 토벌대장이 일찍 왔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반증이었다. 귀찮아. 하지만 만나자고 하니 아니 만날 수 없다. 토벌대장은 사진을 내밀었다. 이 자요. 혹 이자를 알고 계시오. 경성에서 본 적은 있나요. 어라, 이게 누구야. 휴의 아냐. 이 자가 도망친 자요. 이 자는 윤덕영이 아니라 휴의요. 하도 이름을 많이 써서. 어쩌면 그 이름을 들어본 것도 같아요. 하지만 늘 그는 파평윤씨라고 자신의 성을 말했거든요. 그리고 이름은 덕영이라고. 자, 순사부장은 이 자를 아시오. 말은 존대하고 있었으나 시건방을 떨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군인이 경찰보다 한 수 위라는 듯이 토벌대장이 거만하게 나왔다. 두번째 만나는 사람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용은 같이 맞붙기보다는 휴의 사진을 보자 마자 얼어 붙었다는 표현이 걸맞게 이게 뭐요? 뭐하는 자요? 하고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다. 

이런 츳츳. 딱하군요. 우리 사무실에 와서 이인자가 도망갔다는데 어찌된 일이요, 하고 남의 일처럼 묻지 않았어요. 멋적인듯 완용이 뒷머리를 긁다가 아니 그런데 사진이 왜 이제서야 내미는 겁니다. 만났을 때 보여줬으면 알았을텐데요. 하루 이틀 늦었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토벌은 시간이 중요합니다. 어제 탈영한 것도 아니고 벌써 여러 개월이 지났어요. 그만 둡시다. 우리가 실랑이 할 시간이 있으면 합동작전을 짜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내 생각을 말해주니 고맙소. 완용이 보기 토벌대장은 원래가 딱딱한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큰 완장을 찼으니 경찰쯤은 우습게 본다는 투였다. 그러나 완용이 누구인가. 하지만 오늘 완용은 마음이 뒤숭숭하다. 휴의라니. 그래 내가 찾는 자가 바로 이 자야. 우연 치고는 기이하군. 군입대 한 것은 독자들이 다 알고 있듯이 내가 주선했다. 그 이후는 연락이 끝겼는데 어떻게 만주에 왔고 토벌활동을 했고 토벌대의 이인자가 됐고 탈영했고 정말 드라마틱한 드라마가 따로 없어. 완용이 주절댔다. 더구나 그 자는 자신이 조사하던 조선청년을 석방했고 같이 도주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지. 평탄한 길을 놔두고 험한 길을 자처했어. 이유나 들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 손으로 꼭 잡아야겠는걸. 그렇다면 토벌대장과 척 질 이유가 없어. 난 정보가 하나없고. 그는 가지고 있을 거야. 설마 빈 손은 아니겠지. 적어도 그가 활동하고 있는 근거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야. 이쯤되면 내가 숙이고 들어가는 상황이야. 군복에 별을 달기까지 했으니 내가 껌벅 죽어야지.

대장님 그 자가 지금 어디서 암약하고 있어요. 대장님, 토벌대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호칭이 바뀐 것은 의심할 사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왜 그렇게 바뀌었느냐고 묻은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러게요. 그게 우리도 궁급한 점이오. 혹시 경찰쪽은 어떤 정보를 갖고 있지 안나요. 이것은 어느 한 쪽의 작전이라기보다는 양쪽에서 협공해야 성과를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먼곳 까지 온 것 아닙니까. 총독 각하께서 특별히 종로서에 명령을 했고 제가 적임자로 파견 나온 거지요. 거기까지는 짐작하고 있어요. 경성에서 파악한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자의 근거지가 보령이라면서요. 거기 부모나 식솔이 있으면 연락할지도 모르니 한 번 가보기는 했어요. 그처럼 허술한 자는 아니오. 사사로운 정 때문에 조직에 해를 끼칠 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자요. 혹 제가 말하지 않은 새로운 보고라고 들어왔다면. 완용이 여기까지 말하다 멈추었다. 이곳은 분명 그들의 관할이었고 자신은 이곳에 파견나온 일용직 아닌가. 그런대도 자신의 정보를 내놓지 않고 나보고 소식을 묻고 있네. 아마 자신이 놓쳤으니 자신이 잡고 싶은 모양이지. 사진을 한 번 더 보지요. 식탁에 있는 사진을 다시 집어든 완용이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사진은 토벌대에 입대할 당시와 장교로 승진했을 경우 특진을 거듭해 이인자 자리에 올라 왔을 때 등 모두 세 장이었다. 정면 옆면 측면이 한 장씩 따로 있어 마치 중대 범죄자를 떠올렸다. 틀림없어. 탈영병의 행방을 정말 모르시오. 을러대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봅시다. 잘 나가가다 왜 또 그래요. 자신을 마치 피의자 대하듯이 하는 태도에  완용은 싸하게 받았다. 좋게 말해서 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대장 역시 주객이 전도 됐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이 놈 네가 군인이면 전투에 나가야지 부대에 앉아서 무슨 꼴 값을 떨어도 유분수가 있지. 완용은 속으로 비웃었다. 사람을 많이 다뤄본 완용은 토벌대장이 같잖았다. 겨우 완장을 차고 폼이나 내려는 초급 장교 딱 그 수준이었다. 고지식한 놈. 그러니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 당하지. 넌 천상 군인이야. 장군이면 정치에도 능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다면 완용은 그런 이야기도 해주고 싶었다. 

이 자가 누구요하고 부인하지 않은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완용은 이런 식으로 토벌대장에게 한 방 먹이고는 미안했던지 정보를 준다는 것이 겨우 이 자는 다른 탈영병과 다르다며 머리를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내가 잘 알아요. 어떻게요. 완용은 그와 죽마고우 인것을 떠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고 되레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나 마나한 소리 말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어요. 토벌대장은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어이없다는 듯이 순사부장을 노려봤다. 이건 뭐야. 마치 나 때문에 탈영했다는 거야. 왜 날 쏘아봐. 토벌대를 배신한 조센징 아이인데 종로서의  그 유명한 순사부장 나리께서 숨은 것도 모르냐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래 어린 아이 하나 못잡아서 꼭두새벽에 찾아 왔단 말이오. 완용이 면박을 주었다. 완용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그런 배짱이 있었다. 토벌 대장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궁지에 몰렸다기보다는 말 대꾸 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기분이 상한 그는 그러면 경찰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따졌다. 만주까지 파견을 왔으면 성과를 내야지요. 더구나 토벌대 지원부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탈영병을 잡는 것은 군인이 먼저였다. 경찰에게 자신의 임무를 떠 넘긴 것 같아 토벌대장은 조금 머쓱해졌다. 대장은 이번에는 말투를 바꿔 협조를 요청했다.

군경이 손을 하나로 잡지 않으면 독립군 수괴는 물론 잔당들 잡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러니 우리 손 잡고 조선인끼리 일 한번 내보자고 악수를 청했다. 상대가 수그리고 들어오자 완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대했다. 이것으로 완용은 토벌대장의 기를 꺾고 휴의에 대한 토벌대가 알고 있는 모든 자료를 불과 한 시간 만에 확보할 수 있었다. 완용은 토벌대의 자료를 읽으면서 음악에 장단을 맞추듯이 군화발을 까닥거렸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충격을 받은 완용은 휴의가 이 정도까지 타락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극도의 분노감을 키웠다. 그는 타락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불타올랐다. 타락한 놈이네, 용서가 안돼. 내가 어떻게 해서 너를 군대에 넣었는데. 탈영을 하다니. 그것도 용의자를 풀어주고 함께 탈출했다고. 이거 단단히 미쳤어. 마귀가 씐 거야. 그렇다면 내가 해야지. 내가 넣었으니 잡는 것도 내가 해야지. 휴의가 배신을 때렸어. 뭐, 독립군이 됐다고. 독립군을 잡는 토벌대의 이인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지. 기가 찼다. 이건 아냐. 휴의는 조국 일본을 배신했어. 망한 나라를 위해 일하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바보가 어딨어. 대세는 일본이야. 일본은 조선은 물론 만주와 중국 전역 나아가 동남아까지 쓸고 있어. 종국에는 구라파는 물론 미국도 손에 넣을거야. 한심한 놈이 있다면 이런 세계정세를 모르는 휴의 같은 놈이지. 

완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살짝 혀끝에 감돌았다. 네가 마음먹은 대로 했으니 나도 마음먹은 대로 하겠다. 입안에서 나는 비릿한 맛을 음미하며 완용은 다짐했다. 자신 때문에 입대했고 입대 후 승승장구하다 소대장에 올랐다. 이 대목을 읽을 때는 은근히 시샘도 했다. 내가 경찰서장이 되기도 전에 먼저 장교가 되다니. 한 턱 내라고 해야지. 뜯어 먹을 구실은 많아. 하하하. 친구의 성공은 완용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그것은 좋은 것 같으면서 싫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싶었고 어떤 때는 괜한 추천이다 싶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독립군이라니. 그 허접한 것을 왜 하니? 춥고 배고프고 도망다니고 잡히면 일족이 멸망하는 그 싸구려 짓을 하다니. 천박한 놈. 이를 따라 움직여야지 해를 따라갔어. 네 꼴은 아마도 삼대가 빌어먹을 거야. 뭐 할게 없어 독립운동이냐. 끝났어. 파일을 덮으며 완용은 말했다. 휴의와 일본 제국의 성공을 위한 경쟁은 끝났다. 난 경찰고 그 자는 군인으로 선의의 경쟁을 했다면 아마 내가 졌을 거야. 백프로야. 잘 됐군. 난 내가 아는 자 특히 나와 가까운 자의 성공을 바라지 않아. 네 놈은 구렁텅이에 빠졌어. 널 잡아서 승진 사다리를 타자. 넌 죽고 난 살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 아니지. 싸움은 하기도 전에 승부가 난 거야. 독립군 나부랭이 하나 잡는 것 쯤은 시간 문제지. 하지만 이유나 알자. 왜 무모한 짓을 했는지. 고문까지 할 필요없어. 내 앞이라면 그 놈은 순순히 말할 거야. 뭐 애국 이런 거창한 말은 안 통해. 애국은 대일본 제국을 하는 것이지 망한 조선을 하는 것이 아니거든. 무엇이 휴의로 하여금 장미꽃 길을 버리고 가시밭 길을 택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애국심이 아니라면. 반발. 조직내의 불협화음. 아니면 범죄. 휴의의 성격을 안다면 그런 것과도 연결 짓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제일 가까운 이유는 조국에 대한 독립 같은 것. 그렇다면 어이없다. 독립군에 가입했으니 독립이 맞긴 맞겠지. 임정을 드나든다고. 아예 뿌리를 뽑자.  임정이고 나발이고 싹 다 잡아들이자. 어떤 개인적 원한이 개입한 것일까. 그러나 이유 같은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지나간 일은 어찌됐든 결론은 나왔다. 배신자는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 완용은 마치 자신이 배신한 것 같은 모멸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서류철을 손에 쥐고 붉은 얼굴 그대로 토벌대장과 헤어져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죽마을로 종로서 순사를 급파했다. 다행히 만주경찰서에는 경성으로 연결되는 전화가 있었다. 그는 서장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아버지를 체포해 심문한 결과를 보고 받았다. 그러나 가족 역시 휴의의 거처는 물론 생사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군인으로 입대한 후 편지 한 통이 가족들이 받은 전부였다. 부하들이 알려준 편지 내용은 이렇다. 부모님 전상서. 저는 잘 있어요. 그러니 부모님은 걱정마시고 건강하세요. 성공해서 돌아가면 마을 앞에서 제일 좋은 논 닷마지기를 사드릴게요. 그것이 다 였다. 이런 걸 단서라고 할 수는 없고. 가만히 있어보자. 그나저나 죽마을을 떠난 사람의 생사가 확인된 경우는 자신말고 휴의가 처음이었다. 가고 나면 모두 함흥차사였다. 점례가 그렇고 여순이 그랬다. 그나마 편지 한 통이라도 받은 것은 휴의네가 유일했다. 한 번은 휴의 어머니가 서로 완용을 찾아왔다. 종로서로 발령받기 두어 달 전이었다. 인절미를 한 말 이고 온 어머니는 완용을 보고 말없이 꾸러미를 내려 놓았다. 잘 봐달라는 인사였다. 친구 아들에게 지나치게 공손했고 얌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사가 된 후 완용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윗사람이든 그 누구든 함부로 했다. 휴의 어머니는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아들의 안부를 묻는 일에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완용은 가져온 보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냉소 띈 얼굴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말 대신 고갯짓으로 물었다. 휴의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군인으로 갔는데 편지 한 장이 고작이야. 주소도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몰라요, 낸 들 알겠어요. 그리고 여기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털어 놓는 장소가 아니에요. 어서 가세요. 알면 알려 주리다. 그러니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집으로 가. 지서가 어디 흰옷 입은 나부랭이들이 들락거리는 데가 아니라는 말이오. 그는 매몰찬 이 한마디를 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휴의 어머니는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매정한 자식이다. 알든 모르든 좀 친절하게 해줬으면, 말이라도 조금 더 길게 해줬으면 이 정도로 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없는 돈으로 인절미 한 말을 해 보냈더니. 나에게는 피 같은 떡이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네 놈에게도 피눈물을 흘릴 날이 올 것이다. 저주의 욕설을 휴의 어머니는 냅다 쏟아냈다. 그래도 분이 풀이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인절미 한 말은 큰 돈이었다. 성의에 대한 보답치고는 형편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완용은 그런 휴의 부모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후배를 시켜 크게 야단치라고 닥달했다. 만주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 자신이 직접 심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일 간 심문 후 만주로 보내온 보고서는 의심사항 없다, 였다. 나올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완용은 다 계획이 있었다.나중에 화살이 자신에게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미연에 대비한 것이다. 휴의가 친구라는 것을 왜경에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 심하게 나왔는지 모른다. 친구라고 봐줬다는 인상이 남아서는 안됐다. 이런 저런 보고서를 읽던 완용은 일단 그것을 구석에 쳐 박아 놓고는 그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골머리를 썩였다. 

배신한 조센징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완용 자신에게 쏠릴지도 몰랐다. 언제 자신의 목에 올가미에 씌워져 휴의 대신 처벌을 받을지 완용은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휴의 부모에 대한 심문은 가혹했어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사전 포석은 잘 마무리 됐다. 완용은 그 일 때문에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출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본토인이 아닌 반도인이라는 것.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열심히 더 눈에 띄게 활약을 펼치는 것이었다. 완용은 그 이후로도 휴의 부모를 한 차례 더 불러 한 달간이나 서에 가두고 몹쓸짓을 하면서 왜경에 자신의 충성심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부하에게 지시했다. 휴의의 집은 패가망신 당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더 한 것이 남아 있었다. 재산 몰수. 소작을 붙이던 논은 떨어져나갔다. 초가산간에 기댄 부모는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만신창이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나마 풀어준 것을 다행으로 알아. 이게 다 완용 부장 때문이야. 친구 잘 둔 덕을 본 것을 나중에 갚아.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완용은 더 묶어 두거나 아예 옥사시킬 계획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풀어주면서 완용은 친구 부모님이라서 이렇게 조용히 끝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하라고 부하들에게 시켰다. 너희들 때문에 부장님이 위태롭게 된 것에 대한 보상을 따로 준비하라고 했다. 세상에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다. 

고문으로 휴의 부모는 겨우 아기 걸음을 옮기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살려 줘서 고맙다며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하고지서를 나왔다. 우리는 당해도 마땅하다고, 그런 죄인을 풀어줘서 고맙다고 노 부부는 연신 주억거렸다.  완용의 부하들은 그런 부모 앞에 그러 모은 침을 탁 하고 뱉어냈다. 애, 같잖은 것들. 의자에서 등을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완용은 좀처럼 불쾌한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자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지껄였다. 그러다가 이러지 말자며 가끔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자 잊었던 여순과 점례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휴의의 변절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완용은 여순과 점례가 어떤 상황인지 갑자기 궁금했다. 그는 그녀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일본으로 보낼 여자들을 모집하라고 일본을 맨 앞에 내세웠다. 그래 반도인이 본토에서 일하면 얼마나 영광스럽겠나. 그는 여자 모집에 열성이었다. 햇수로 몇년이나 됐지. 손가락을 꼽다 완용은 그러기를 그만 두었다. 점례 요 고약한 년.  완용은 여순보다 점례가 좋았으나 점례는 휴의와 죽이 맞았다. 그것이 분했던 완용은 점례든 여순이든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꼴보기 싫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모집책의 연락을 받았고 그래서 주저 없이 둘을 추천했다. 그때만 해도 완용은 조금 순진했다. 일본이든 어디든 가면 돈 벌어 온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지금와서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나중에야 점례와 여순이 잘못된 길로 들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으나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통에는 뭐든 일어나니. 여자들이 근로정신대나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그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몸을 바삐 움직여야 할 처지였다.  그날 이후로도 완용은 애써 그녀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애당초 없던 존재인 것처럼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과는 엮일 일이 없는 일로 골치를 썩을 필요가 없었다. 휴의라는 놈이 문제야 문제. 괜히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군인을 추천하다니. 이게 무슨 낭태야.  죽마을 순사 생활을 끝내고 경성으로 왔을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런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하는 일도 벅차고 능력밖의 일도 있었으나 노력 하나만큼은 정말 가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완용이 꼭 그런 꼴이었다. 그러다 보면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일이라는 것이, 불순분자를 색출해 내는 것이 만만할리 없었다.

하나의 일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를 잡으면 또 하나는 어디선가 사고를 쳤다. 끈질긴 조센징 놈들. 그는 이 말을 달고 다녔다. 일본인이 들으면 저 놈은 본토인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과 조센징을 달리 취급했다. 그는 조센징을 말하고 나면 꼭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래서 왜경들은 완용에게 ‘끈조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끈질긴 조센징이 탁하고 침을 뱉는다는 뜻이었다. 그 별명을 완용은 달게 받지 않았다. 조센징에 자신이 포함됐기 때문이다.그는 완용대신 히로마시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이 버젓이 있었다. 그러나 동료 왜경들은 히로마시라는 말보다는 끈조탁으로 부르거나 그냥 완용이라고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너는 아무리 잘 나도 조센징이야. 거기에는 깔보는 의미가 있었다. 완용은 끈조탁을 버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침을 뱉지 않아야 한다고 했으나 무의식 중에 그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씩 튀어 나왔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은 늘 침을 딱하고 뱉은 뒤였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최근에는 침을 뱉는 횟수가 더 늘었다. 휴의라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뜻밖의 걸림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자신의 발목을 잡자 완용은 하루에도 여러번씩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예의 조센징을 외치면서 침을 탁하고 바닥에 뱉었다. 화가 났다는 표현을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야 했다.  휴의를 잡아야 한다. 꼭 내 손으로. 그는 토벌대의 자료를 여러 번 복기한 후 휴의가 임정 산하 독립군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군대서처럼 그는 치밀한 두뇌와 성실함으로 독립군의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를 잡으면 개인적 복수는 물론 임정의 조직을 와해 할 수 있다.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자. 휴의는 만주에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만주는 여러 차례 초토화 작전으로 한인 사회가 절멸했고 독립군도 거의 명맥이 끊어지고 있다. 외부의 긴급 도움 없이 활동은 이제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고 조력자들은 씨가 말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휴의는 상해나 아니면 조선으로 돌아가 다음을 도모할지 몰랐다. 완용은 기차역을 중심으로 그물망 작전을 폈다. 처음 신의주로 파견 근무를 왔을 때 효과를 봤던 기억을 되살렸다. 기차가 멈추면 승객을 그대로 가두고 검문을 하는 방법은 매번 효과를 봤다. 용의자는 도망치기 어렵다. 선로 주변에는 미리 경찰력을 배치해 놓고 있어 설사 객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바로 체포되거나 사살된다.

그렇게 해서 독립군에 여러 번 타격을 입힌 적이 있다. 휴의가 만약 조선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기차역이었다. 완용은 그 즉시 끄나풀을 만주역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모든 기차에 검문을 강화하라는 만주경찰서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동안 뜸했던 역은 다시 검문검색으로 살벌해졌다. 그 시각 휴의가 탄 열차는 경성에 도착했다. 완용이 그물을 쳐 놓기 전 용케 빠져나왔다. 사전에 미리 알고 서두른 결과는 아니었다. 예정대로 진행했고 완용이 늦었을 뿐이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독립자금을 준다는 사람과 접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첫날에 이어 둘째 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줄을 대놓고 종로 화랑을 돌아 다녔다. 그림을 사려는 척했다. 골동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미술이 나오면 연락해 달라는 메모도 남겼다. 화랑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그가 동경에서 온 골동품 중개상으로 여겼다. 돈 많은 중개상은 곧 종로통에 조용한 소문거리로 등장했다. 그 말은 점례 삼촌에게도 들어갔다. 그는 새로운 중개상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자신말고, 전형필말고 조선고미술과 골동품에 관심있는 자라면 본국 박물관 소속 문화재 요원인지도 몰랐다. 기회가 되면 만나겠지. 삼촌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먼저 자신이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이 정도에서 그치자. 휴의는 자신이 삼촌은 물론 인사동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자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이름값을 통해 신분을 보장받으려다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신분을 위장하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행세했다. 잠수를 타는 대신 그렇게 한 것은 점례와 아직 만나지 못했고 독립자금을 준다는 인사와 연락이 갑자기 끊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숨어 있다면 점례야 그렇다고 쳐도 애초 목적한 것도 제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 나온 휴의는 다시 입었던 옷을 갈아 입었다. 저녁 외출을 할 참이었다. 잡히지 않으려면 별 수가 없었다. 요즘들어 불심검문이 심해지고 있다. 신분 보증을 위한 가짜 서류들이 있지만 어쨌든 검문은 기분 나쁜 일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증명서가 있어도 마구잡이로 끌고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휴의는 변장에 특히 신경을 썼다. 중절모를 썼다가 벗었다가 지팡이를 들었다가 우산으로 바꾸기도 했다.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가발을 쓰기도 했고 여차하면 여장을 하기 위해 치마와 저고리 등을 따로 준비했다. 이십대 젊은이였다가 60대 노인의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저녁 외출 이후 외부 접촉을 최대한 줄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움직일 때는 확실하게 신분을 세탁했다.
 
본국에서 온 거상의 이미지가 필요할 때는 말끔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한가지 모습보다는 자꾸 바꾸는 것이 신분을 위장하는데도 용이했다. 붉은 넥타이를 매고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각지게 다린 휴의가 밖으로 나섰다. 허리에 찬 비싼 회중시계의 금줄은 상대가 볼 수 있도록 양복의 앞 단추는 채우지 않았다. 잘 닦은 검정 가죽구두는 반짝였고 안경 너머의 눈은 여유가 넘쳤다. 이런 여유와는 달리 접선은 자꾸 늘어졌다. 독립군에게 거금을 지원하겠다는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주에서 경성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상해 임정에서는 연락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실패를 염려했다. 사전에 정보가 누설된 것은 아닐까. 만일 발각됐다면 휴의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회의를 거듭한 임정은 일단 본부를 다른 곳으로 급히 옮겼다.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지에는 요인 하나가 가끔 들러 도착 여부를 확인했다. 전화를 할 수 없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휴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곳 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일경의 검문은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됐다. 

'작전은 성공. 열흘 후 도착.' 휴의는 보낼 암호문을 여러번 확인했으나 그것이 자꾸 뒤로 미뤄지자 거금을 댄다는 독립군 후원자에 대한 의심의 마음도 들었다. 일경이 놓은 덫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의는 몸가짐을 더 조심했다. 그렇다고 숨어서만 지낼 수는 없어 오늘도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출타를 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줄 댄 접선자가 먼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상대를 모른다. 나를 아는 상대가 먼저 다가와서 동지하고 어깨를 세번 치면 접선은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꾸 뒤를 돌아봐도 어깨를 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휴의는 인사동 고물상들과 일부 안면을 텄다.  화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도 여러 장 샀다. 받아온 자금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점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조선 일등 화랑의 점원이 점례 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등 화랑의 주인과는 아직 정식 인사를 하지 않았으나 그곳의 점원 하나가 조선 최고의 여류 화가라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더구다나 그 처녀가 다가오는 가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로 했다는 소시글 들었다. 흥미로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력은 일부 알아냈다. 만주에서 활동했다. 도쿄에서 공부를 조금했다. 출품하기만 하면 특등감이다. 그녀는 만주에 가기 전에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고 그런 연유로 일등 화랑에 취업했고 일본인 주인의 지원 아래 유화 58 점을 이번에 한꺼번에 내놓게 됐다고 했다.

휴의는 직감했다. 만주라는 단어 한마디에 그는 점례를 떠올렸다. 일등 화랑에는 그도 서너 번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게에는 주인과 병색이 짙은 주인 아내 말고는 점원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방문했을 당시 점례는 심부름을 갔거나 다른 이유 때문으로 부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멀찍이서 화랑에 들고 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한 끝에 드디어 점례로 추정되는 인물이 화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챙이 큰 모자를 썼고 양옷을 입고 안국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휴의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옆으로 벌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걷는 폼이 점례와 비슷했다. 체형도 그랬다. 어릴적부터 보아왔던 점례가 틀림없었다.

점례다. 점례. 속으로 점례를 두어 번 부른 후 휴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아직 까지는 동행자 없이 홀로 걷고 있었다. 가다가 누구를 만나거나 목적지로 불쑥 들어 갈지도 몰랐다. 휴의는 급해 오는 자신을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오고 가는 인파가 많아 그녀를 뒤따르는 것이 어려웠으나 그런 와중에도 휴의는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사이가 벌어진다 싶자 휴의는 급하게 몇걸음 걸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워 졌다. 그는 당장 불러 세워 볼까 하다가 멈칫했다. 그녀를 확인하는 일은 뒤로 미뤄졌다. 그녀가 또 다른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녀는 나왔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화랑이 아니라 화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을 나와서 일등 화랑으로 가는 대신 가던 방향으로 계속갔다.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능과 경험으로 휴의는 지금이 말을 걸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겼다. 길을 하나 건너면 이쪽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종로경찰서 주위를 감시하는 일경들의 순찰이 자주 일어난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든 이쯤이라면 잠깐 대화하기에 무난했다. 이름을 불러 확인하기 전에 휴의는 그녀를 앞서 지나갔다. 용의주도한 행동이었다. 어깨를 스칠 때는 옆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십 여 걸음 앞선 다음 잠깐 멈춰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늉을 했다.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척도 했다. 그러면서 눈은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이마를 가린 챙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큰 눈을 확인해야 한다. 점례는 다른 누구보다도 눈이 컸다. 호기심 많은 눈으로 그녀는 휴의를 간혹 쳐다봤고 그럴 때마다 휴의는 그녀 눈 속에 담긴 의미의 속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었다. 그녀가 그런 눈으로 힐끗 휴의를 쳐다봤다. 틀림없다.

그 순간 휴의는 서로 눈을 마주보고 대화했던 그 어느날의 시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런 대화였으리라. 뭘 그렇게 봐, 사람 무안하게. 네 눈속에 들어가고 싶어. 무슨 미친 소리야, 눈 속에 눈이 들어오다니. 그럴 수 있어. 네 눈은 크거든. 같잖은 소리 하지두 마. 무슨 소리, 작고 가는 내 눈은 네 큰 눈 속에 풍덩 빠져. 푸하하하. 마지막 웃음은 점례의 것이었다. 아니다. 결코 이런 말을 섞은 적 없다. 그는 지금 점례와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다. 꾸며내고 있다. 왜 그때는 이런 멋진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더 근사한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너, 그거 알아? 갑자기 질문을 하자 그녀가 당황했다. 준비하지 못했는데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휴의가 점례는 미웠다. 뭘 말이야. 몰라서 물어. 어. 그 말을 하고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을 때 그녀는 곧잘 이렇게 했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게 뭔데, 말해봐. 그게 뭐냐니까? 무안하게 꼭 말해야 하니. 어. 휴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그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휴의는 멀찍이서 다시 점례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안보는 척 뒤도 확인했다. 자기 보호 차원에서였고 이것은 미행의 정석이었다. 미행하는 자신을 미행하는 다른 미행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휴의는 이제 그녀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몇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옷차림이 바뀌고 덩치가 달라졌어도 그녀의 걸음걸이, 그녀에게서 풍기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랑했고 처음으로 맹세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그는 용기를 냈다. 빠르게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인파에 쓸린 것처럼 했으나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점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점례야 내다 휴의다. 멈추지 말고 그냥 가. 휴의는 만사에 안전을 기했다. 만주에서 경성까지 자신을 뒤쫓고 있는 일경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안전하지 못하다. 그가 잘못돼 점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점례를 확인하고 나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점례를 걱정했다. 내가 잡히면 점례도 무사하지 못한다. 휴의는 옷깃을 세우면서 긴장을 감추려고 했다. 몸에 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점례는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걸으면서 점례는 휴의의 존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누구를 급히 피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면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일까. 그는 죽마을에 있지 않고 왜 경성에서 자신의 옆을 따라 걷고 있지. 내가 떠날 때 그는 가족의 생계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징집도 피하고 있었다. 완용처럼 순사의 길을 가지 않는 그를 책망했던 기억에 점례는 그가 순사가 아닌 순사를 피하는 신세라고 짐작했다. 이런 식의 만남과 이런 식의 처지에 대해 점례는 난감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대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그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불쑥 나타나서 하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이렇게 급하게 행동할까. 이것이 한 낮의 꿈은 아니겠지. 그녀는 좀 전에 휴의가 그랬던 것처럼 아득한 정신의 기복을 느꼈으나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한시도 잊을 적이 없어. 내 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휴의는 자신이 생각해도 간지러운 말을 꺼냈다는 듯이 좀전의 불안한 기색을 버리고 히죽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귀에 꽂히는 순간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오매불망은 아니더라도 간혹 꿈속에서 나타나 자신을 괴롭혔던 휴의가 아니던가. 그의 목소리, 내다 휴의다. 그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이제 그것이 이뤄졌다.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다. 걱정이 앞선다. 이른 어째. 점례를 뒤를 돌아봤다. 설마 자신을 알아 보는 사람이 낯선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킬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모두들 무심한 듯 가던 길을 갔다. 점례는 안도하면서 이게 어찌된 일인지 눈으로 물었다. 왔어. 나도 죽마을 탈출해서 경성에 온거야. 넌 일본에 안가고. 그렇게 됐어. 저기 화랑에서 일해. 전시회도 출품할 거도. 그림을 그리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불안해 보여. 응 사실 난 쫓겨. 네가 짐작하는대로 난 도망자 신세야. 하지만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건 아니고. 큰 꿈을 꾸고 있어. 독립운동 같은 거. 휴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위안부 막사에서, 유마 호사카와 함께 하던 장교 숙소에서도 휴의는 잊은 인물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만난 조선 청년과의 만남에서는 휴의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허상이 아닌 실체가 바로 눈앞에 있다. 자신 앞에 나타나서 그가 웃고 있다. 감전이 늦게 온 것일까. 그녀는 온몸이 떨려왔다. 이때는 이성이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기 마련이다. 휴의 오빠, 날 좀 봐. 그녀는 멈춰서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중절모를 들어 올렸다. 틀림없었다. 언제나 그녀 곁을 맴돌던 그였다. 품에서 놓은 적이 없는 휴의가 또다시 살짝 웃었다. 그는 점례의 손을 짧게 잡았다 얼른 놓았다. 그 순간에 짧은 전류가 흘렀다. 따뜻한 그의 손을 잡고 점례는 쫓기는 자의 혈관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무슨 일 하는지는 묻지 않겠어. 위험하다면 당장 이곳을 벗어나. 지금 경성은 장난 아냐. 특히 젊은 남자들은 보이면 검문을 피할 수 없어. 그래서 변장했잖아. 내가 젊어 보여. 그러고 보니 노인이네. 점례가 피식 웃었다. 난 쫒겨. 위험한 일이야. 그러나 나쁜 일은 아냐. 점례는 뜨금했다. 속으론 독립운동, 뭐 그런 거야 하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그래 맞아. 나 독립운동해. 하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거 하면 자신은 물론 삼대가 망한다고 했다. 그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점례야, 나 지금 가 봐야해. 너무 오래 있었다. 겨우 오 분도 안 됐어. 긴 시간이야. 점례야, 이렇게 살아서 널 보다니. 난 간다. 몸 조심해. 간다고? 오빠, 그래. 몸 조심하고. 잘 가. 나 저기 화랑에 있는 거 알지. 휴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인가. 점례는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갔고 휴의는 몸을 돌려 광통교 쪽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점례는 궁금한 것을 속 시원히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나 곧 조선땅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금지된 일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어깨를 떨었다. 물어 보지 않기를 잘했지. 스스로 말했잖아. 나 그런 일 한다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다행이다. 말하기 싫어하거나 감추려고 할 때는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것이 순리다. 그 순간에도 점례는 그렇게 생각했고 끝내 묻지 않고 그가 먼저 말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떠나기 전 한 번 더 만날수 있다고 했다. 일방적이다. 그러나 피할 기분은 아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너무 오래됐다. 어림 없는 일인데. 왜 그런 불안한 일을. 점례는 그날 이후 자신에게 찾아온 불안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가 잡히면. 종로서 완용에게 잡히면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다행히 살았어도 불구의 몸이 된다고 했다. 설마. 고향친구인데. 그런데 그게 지금 같은 시대에 통할까. 왜 그런일을. 아 잊자.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일이 있다.

휴의처럼 점례 역시 예전의 시골뜨기 점례가 아니었다. 큰 일이 벌어졌지만 점례는 이런 식으로 정리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했다. 그녀는 표나지 않게 일상을 계속해 나갔다.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 제일 중요했다. 전시회 준비를 차질없이 하고 유마가 돌아오면 결과를 보여주는 일.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없었다. 휴의는 내 마음에 잠깐 들어왔다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다. 그와 엮이고 싶지 않다. 모른 척 할 것이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가슴이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러고 나면 상처는 아물고 다시 소금을 찾는 일은 없다. 그렇게 하자. 이제와서 내 삶을 흔들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와 나는 가는 길이 너무 다르다. 나는 앞으로 그는 뒤로 간다. 그렇게 계속 자기 길을 가면 만날일은 없다. 자, 나는 나의 일을 하자. 작업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자. 곧 유마는 조선땅에 온다. 유마와의 재회가 삶에 어떤 변화를 줄지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닥쳐서야 해결될 것이었고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러고 저러고 생각한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유마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남자면 남고 일본으로 가자면 그러면 된다. 결정권은 그에 속한 것이고 나는 따르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반면 전시회는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삼촌은 이미 심사위원들에게 점례의 그림 여러 점을 사전에 보여줬다. 그림의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그림을 조선에서 본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더구나 여류 화가라니 .놀라 자빠질 일 아닌가요. 그렇군요. 신사임당이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좋아하겠어요. 그게 누구요. 아직 모르 시나요. 조선이 내 놓은 걸출한 여성입니다. 한 번 나중에 살펴 보지요. 삼촌은 이런 식으로 밑밥을 깔아 놨다. 그러니 출품도 전에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의 특등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삼촌은 그녀의 일본 유학 생활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에 간 것은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한 것이지요. 그녀는 거기서 그림 그리기에 적당히 넓은 장소라고 했어요. 그만큼 배포가 큰 여자에요. 독서도 많이 했고요. 글도 곧잘 씁니다. 미술이론에도 일가견이 있어요.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점례의 존재는 조선 화랑가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그녀의 그름은 그럴 가치를 인정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생활, 그것은 과장된 것이었다. 아니 거짓이었다. 일본에 가본적이 없었다. 점례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유마가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썼고 편지를 읽고 삼촌이 그렇게 떠벌이고 다녔다. 정작 삼촌은 점례의 일본 유학에 대해 한 마디로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도쿄미술학교에 다닌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주 듣다 보니 점례는 자신이 학교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유마 역시 도쿄와 그곳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에 대해 늘 말해왔다. 그것은 일종의 세뇌였는지도 모른다. 점례는 이제 누가 물어보면 유학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것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유학생보다 더 유학생의 실체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있을 때 향수병은 없었어? 점례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묻지 않던 삼촌이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다. 4년 넘게 있으면 고향 생각도 날 법 한데. 안그래? 몇 개월이 어느 새 몇 년으로 늘어나 있었다. 전에는 삼개월 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점례는 그러나 반문하지 않았다. 견딜 만 했어요. 김치를 먹고 싶은 생각만 빼고는요. 실컷 먹어. 대신 나 없을 때. 김치 냄새를 싫어 하거든. 그나저나 그곳은 엄한데 용케도 잘 견디고 미술수업을 잘 받았어. 기특해서 하는 말이야. 점례는 그럴 의사가 없었음에도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향수병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인생에서 때로는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점례가 굳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고 했는데 그만 끄덕인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가 점례를 일본 유학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 때 점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했으니 환할리가 없었다. 삼촌은 점례가 대화에서 빠지고 싶어하면 어느 새 눈치를 채고 다른 말로 화제를 바꿨다. 이처럼 점례는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 같은 체험을 간혹 했다. 그래서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그것은 때로는 경험이 됐다. 점례는 자신이 나서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어보면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삼촌도 편지글 외의 것에는 궁금한 점이 없었다. 부끄러웠으나 그것이 절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유마의 뜻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저 소극적으로 따랐던 것뿐이고. 아무리 그림이 훌륭해도 바탕이 없으면 최고가 될 수 없어. 근본이 중요해. 유마는 그런 말도 했다. 삼촌도 언젠가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녀는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다. 상념을 지우는데는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붓을 들었을 때 점례는 세상사를 다 잊었다. 붓 하나로 조선 최고의 자리에 이미 올라와 있는 사람의 태도는 이런 것이어야 했다. 휴의를 만나고 조금 심란했던 마음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평온을 되찾았다. 그것이 점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점례는 벌어진 일에 대해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수년 만에 불쑥 나타난 첫사랑 휴의가 왔음에도 점례는 다음날에 그의 존재를 거의 잊었다. 종일 이 층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완성해야 하는 유화의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느라 휴의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붓을 물에 털어놓은 뒤 기지개를 폈다. 그러면서 아예 휴의가 다시 그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던 지난 생활에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되레 그가 있음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그녀는 오늘 같은 일상을 내일을 물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인생이 그녀가 누리는 최고의 순간인지도 몰랐다. 안정적인 생활과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이런 시기가 전 생애에 걸쳐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하는 일마다 일이 척척 진행됐다.

이번 가을 전시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그녀는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다음 해 봄에는 도쿄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잇따라 프랑스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그녀 계획이라기보다는 유마가 짜 놓은 일정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유마는 서양 화가들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생활에 대해 끊임없는 동경심을 품도록 입에 올렸다. 그것은 자신이 파리로 가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삼촌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을 때 점례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일정을 점례도 고대했다. 그래서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점례는 확고한 인생의 목표가 휴의로 인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하루만에 휴의의 존재를 잊고도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에 그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무시하거나 모른 척하기보다는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당분간이 아니라 경성에서는 우리 만나지 말아요. 아는 체도 하지 말고요.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실망해도 어쩔 수 없다. 아예 남남이 되자고 할까. 그건 옛날 일이 잖아요. 다 잊었어요.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유산을 했어도 그 사람 아이를 가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그런 것으로 저를 잡아 두려고 하지 말아요. 아시겠어요. 아쉬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더한 말도 해야겠다. 휴의는 내 앞길을 막을 뿐이다. 적어도 전시회 전까지는 나타나지 말았으면. 아니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됐으면. 점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이후는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휴의도 동의할 것이다. 시간을 벌면서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는 차후의 일이었다. 만날 운명이면 만나는 것이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점례가 이런 생각에 빠졌을 때 휴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 어디서 같은 약속을 잡지 않았으나 잡은 것보다 더 여유가 생겼다. 점례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휴의는 거뜬한 걸음으로 세상을 조금은 가진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헛다리 짚은 것도 모르고 휴의는 예전의 첫사랑에 대한 감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군인에 탈영에 독립군에 어려운 결정을 했지만 그는 사랑에서만큼은 여전히 풋내기였다. 누군가 상담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사람이 옆에 없었다. 아니 있다. 경성에 도착해 각기 흩어져 생활하고 있는 여성독립군. 조선청년의 아내인 그녀는 이미 엄청난 사랑을 경험했고 그 방면에서는 휴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수도 있다. 독립자금을 무사히 받아 돌아가는 기차안에서 물어보자. 첫사랑과 맺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여성독립군이 어떻게 나올지. 휴의는 이런 망상으로 시간을 때우면서 접선자와 동선이 겹치기를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점례와 헤어진 휴의는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쳤다. 이런 식으로 상담해 오겠지. 저런 식으로 물으면 난 이렇게 대답해야지. 점례를 데리고 만주로 가겠다. 당신과 조선청년 같은 드라마틱한 혼례를 치르고 싶다. 부부가 독립군으로 전선을 누비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면 멋지겠다. 그러면 여성 독립군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서 말하겠지. 우린 처지가 비슷하군요. 험란한 길을 함께 간다는. 그래서 난 좋아요. 휘파람이라고 불어야지.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면서 광통교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러나 휴의의 이런 기분은 금세 잡치고 말았다.

짧은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 저쪽에서 말을 탄 일본 순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휴의는 알아채지 못했다. 점례를 생각하다 잠시 도망자라는 신분을 잊은 것이다. 그러다가 말 발굽 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흠칫 놀랐다. 이거 낭패인걸.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태연하게 앞을 보고 걸어갔다. 눈길을 피하거나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잡아 세워서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고 해서 당황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나쁜 짓을 하고 도망치려는 사람과 나는 무관하다. 그러니 아까의 그 모습에서 섣불리 벗어나지 말자. 하던대로 하자. 저 자들이 다가온다. 나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에둘지 않고 직선으로 향하는 것이 그런 확신을 더한다. 좋아. 한 번은 넘어가야 할 일. 그래서 리허설을 했잖아. 오늘은 그걸 써 먹는 날이야. 내가 연극배우가 되는 거지. 거울 앞에서 주접을 많이 떨어잖아.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제발 꼬치꼬지 캐물어라. 대답해 주마. 난 그러기 위해 준비된 독립투가 휴의가 아니더냐. 그 짧은 순간에도 휴의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마구 굴렸다. 술술 불어줄게. 원하는 대답을. 휴의는 동요없이 다가오는 두 명의 말 탄 순사를 향해 마주 걸었고 그들의 사이는 점점 좁아졌다.

 

출처 : 의약뉴스(http://www.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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