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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곽으로 둘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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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곽으로 둘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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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이었다. 길지 않게. 아주 짧게. 여보, 잠깐만. 점례는 일어섰다. 손에는 여전히 뜨개가 들려 있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아프지 않게. 전 아픈 건 싫어요. 점례는 유마의 눈을 피했다. 유마는 점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는 여름날의 햇살이 가득펼쳐 있었다. 꽃들은 사방에서 아우성쳤고 나비들은 우아한 날개짓으로 서로를 희롱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당신 약속을 지켜줄게. 당신은 내게 동지 이상의 그 무엇이었어. 내 부모와 같은 존재. 그래서 결정도 쉽게 내린 거야. 그 약속 지킬게. 흰 나비 한쌍이 물망초 위에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한 놈이 달려들어서 훼방을 놓았다. 짧은 순간 빛이 그들을 갈랐다. 점례는 따끔한 무언가가 목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꿀벌이 잠깐 목에 왔었나 봐. 점례는 나비와 꿀벌과 함께 아주 짤라의 순간에 자신의 그림 앞에 섰다. 하늘을 날고 있는 점례와 유마. 하늘 거리던 브라우스는 광목의 흰 옷으로 변했고 짧은 치마는 검은 치마로 바뀌었다. 권총을 든 유마는 일본도를 들었다. 웃으면서 구름을 헤쳐가던 유마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나는 약속을 지켰어. 길지 않고 아주 짧게 처리했어. 유마는 자신이 한 말의 약속을 지켰다. 난 약속을 지켰다고. 한 번의 내리침으로 족했다. 그는 칼에 묻은 피를 닦지 않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번 더 점례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내려준 생명에게 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고개를 숙였으나 기세는 여전했다. 정말로 길어. 오늘은 왜 이리 길지. 유마는 그 길로 다시 내무총리대신의 관저로 향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하다. 그런데 허리춤의 칼은 유난히 무겁다. 피의 무게 때문인가.

유마는 다시 총리의 방 앞에 섰다. 비서가 깜짝 놀랐다. 파리한 얼굴의 유마가 손에 피를 묻히고 아버지 면담을 요청했다. 총리 각하께서는 안 계십니다. 너도 죽고 싶으냐? 유마가 피 묻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쇼와 덴노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조금 기다리면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누구랑 갔느냐. 아까 방에서 뵙던 육해군 두 장군과 함께였습니다. 유마는 대기석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서가 잠시 후 다가와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직접 닦으려는 듯이 내민 손을 거두고 유마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다, 내버려 둬라. 이것을 아버지께 보여 드려야 한다. 어디쯤 오고계신지 그거나 알아봐 줘라. 그는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군복 입은 그 앞에서는 모두가 부하라도 되는 듯이 그는 짧고 굵은 말을 내뱉였다. 비서는 전화를 하기 위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유마는 고개를 저었다. 항복이라고? 안돼. 말도 안돼. 아버지라도 항복을 말한다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유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난 쇼와 덴노외에는 누구의 신민도, 누구의 아들도 아니다. 이제부터 나는 오로지 천황의 아들일 뿐이다. 그는 군복 상의에 걸린 덴노의 훈장을 어루만졌다.

훈장값을 해야지. 항복이라니. 종전도 글러 먹었어. 이천만 국민 아니 1억 인이 죽는다해도 멈출 수 없어. 덴노 반자이. 유마는 벌떡 일어서서 벽에 걸린 쇼와 사진을 향해 오른손을 척소리나게 올려붙였다. 그 옆에 걸린 욱일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투 함선에서,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에서, 전투 최일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람이 없어도 그것은 펄럭인다. 이제 내가 왔다. 있을 자리에 있을 때 사람은 힘이 생긴다. 최후통첩이다. 아버지. 항복을 건의해선 안 됩니다. 두 장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면 아니 입안에서라도 그렇다고 하면 이 유마 호사카의 일본도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는 혀를 깨물었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입안에서 피의 맛이 감돌았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길게 뻗은 그 길옆에는 어떤 샛길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길로 가려 한다면 이 칼을 피할 수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그날 아버지는 관저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마는 다시 집으로 갔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오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마당과 방에는 아직도 피가 낭자한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시체를 한 곡에 모았다. 그리고 하나의 관에 넣었다. 말이 관이지 이불에 싼 것이었다. 그는 장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그러지 말라고 곧 돌려 보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자신이 직접 삽으로 땅을 팠다. 늦은 저녁 무렵 유마는 두 사람의 매장을 마쳤다. 방도 대충 정리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유마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순간 돌았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모든 것은 지나갔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 행동과 결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날이 새는 즉시 파리로 떠난다는 작별 편지를 썼다.

여기는 파리. 일본을 떠나온지 삼 년이 지났다. 전쟁은 끝났다. 항복이라고도 하고 종전이라고도 했다. 천황제가 유지됐고 군부의 책임은 면책됐다. 전범에 대한 재판은 흐지부지됐고 일본 정국은 빠르게 안정됐다. 아버지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훗카이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선은 독립됐다. 그러나 일본처럼 안정 대신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좌우 대립이 심각해 남북은 삼팔선을 놓고 이미 내전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서로를 적대시했다.

남쪽만의 정부가 세워졌고 미군은 그런 정부를 막후에서 움직였다. 유마는 기지개를 켰다. 거의 다 끝났다. 그러나 아직 마무리가 덜됐다. 그러나 기지개를 켜고 난 후에는 더 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여기서 끝내도 될 것같다. 그래서 종 치자, 하고는 그대로 마침표를 찍었다. 창밖에는 여름의 태양이 안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는 여름꽃이 태양보다 더 불게 물들고 있었다. 점례가 가꾸었지. 심어 놓고 보지도 못하는구나.

그는 펜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감상에 빠져서는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렸다. 숙달된 배우처럼 그는 쉽게 눈물을 흘렸고 한 번 흘린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원고를 마무리했다. 출판사로 가는 길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러나 그는 삼년 만에 탈고한 기분 탓인지 홀가분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되레 시원했다. 그는 원고 겉면에 쓰인 '나와 점례 마사코' 라는 제목이 마음이 들어 마음이 들떴다.

편집자가 무어라고 해도 절대 바꾸지 말아야지. 내용도 그렇지만 제목은 절대 타협할 수 없어. 무엇보다 조선식 이름인 점례를 넣고 그 뒤에 창씨개명한 마사코를 넣은 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잘 한 결정이었다. 저녁에는 이곳 파리 문인들과 맥주를 마시자. 점례 친구 여순이 온다고 했다. 여순은 일행의 주치의 자격으로 비행기를 탔다. 일행은 신생 한국의 보사부장관 말수다. 파리 주재 일본 영사관이 그들을 맞으면 겪에 어울리겠지만 그들은 사전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아, 휴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도 한국 정부의 국무위원이 됐다니. 그럴만도 해. 그만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온 자도 드무니. 국방부장관은 그에게 딱 어울린다. 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휴의는 두만강 전선에 있지 않았다. 임정의 특명으로 그는 그곳으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일본으로 잠입했다. 천황을 제거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비상한 작전이었다. 천황의 일정을 살피면서 디데이를 정하던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덴노의 떨리는 음성을 듣고 그는 왜 하필 지금이냐고 울분을 터트렸다. 한달 만 더 늦게 터졌어도, 한 달 만 더 늦게 원자탄이 터졌어도 하고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완용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그는 조중 접경에서 조선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임정과 미군의 손이 맞지 않아 출동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완용은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부사령관에서 작전권을 넘기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초대 내무부장관이 됐다. 그만한 능력과 치안을 담당할 인물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점례를 제외한 죽마을 세 명의 친구는 독립된 나라에서 초대 국무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날 저녁 만찬은 화기애애했다. 모두가 유마의 출판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후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고 미리부터 축하했다.파리 문단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나와 점례 마사코'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벌어진 조선 독립운동을 일본인의 눈으로 그린 작품은 유일무이했다. 여순은 점례를 추억했다. 말수는 상하이 일제 영사관이 철수하면서 밀정으로 지목해 처형한 포목점 집 윤사장을 넋을 위로했다. 완용은 이제는 다 잊자며, 그때는 너라도 나였다면 어쩔수 없었을 것이라며 여순의 손을 잡았다. 그 옆에 있던 말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완용의 죄를 용서했다. 

휴의는? 그래. 휴의는. 그는 모른다. 다른 국무위원들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개인 일정을 소화하는지 유마가 초대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남들은 서로 손을 잡았으나 휴의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독립군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가 굳이 사람을 쓰면서 까지 초대 국무위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지위를 이용해 하지 못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덴노를 처단하지 못한 것을 여전히 한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처참한 점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 완용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치안을 담당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는 중책을 맡고 있다고 해서 지난 일제하에서 치른 악행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차례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진 프랑스 문물을 시찰하는 국무위원 팀에 완용이 낀 것을 보고 잘됐다 싶었다. 국방장관의 자격으로 내무장관과 함께 비행기에 오를때만 해도 완용은 휴의를 경계했다. 그러나 파리 공항에 내렸을 때 완용은 휴의가 어릿적 죽마을 휴의의 심성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어이, 동창생. 그가 손을 까불며 앞서가던 휴의를 불러 세웠다. 그가 손을 내밀었고 휴의가 잡았다. 우린 동창생이야. 완용이 어깨동무를 했다. 휴의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 네 놈의 그 손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유마의 출판 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뒷풀이를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휴의는 완용이 한 잔 더 하자는 제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파리 외곽에서 한 잔 어떠니? 술 맛이 좋은 주점을 내가 알고 있거든. 언제 준비했니? 넌 언제나 철저해. 완용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차는 삼 십 분 정도를 달렸다. 한 적한 농촌 마을에 두 사람은 내렸고 곧 작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휴의는 어떤 농부와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한 잔 씩 하고 나서 농부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농부의 집으로 향했다. 거기에 백년 묵은 포도주가 있어. 농부는 마차에서 내렸다. 비릿한 냄새가 실려왔다. 닭똥 냄새라는 것을 완용은 알았으나 찡그리지 않았다. 좋은 날에 좋은 술을 먹고 동창생과 회포를 푸는데 닭똥 냄새 정도야. 완용이 조금 비틀 거렸다. 휴의는 그런 완용의 팔짱을 꼈다. 닭들이 훼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닭농장인가? 완용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휴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흐뿌여 안개를 뚫고 여명이 비추자 안 보이던 것이 드러났는데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인상적이었다. 닭사료를 주기 위한 거대한 분쇄기였다. 휴의는 거기에 눈을 고정했고 그 눈길을 완용도 따라갔다. 날이 더 밝기 전에 휴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품속의 작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그것을 완용의 가슴에 꽃아 넣었다. 닭들이 푸드덕 거렸다. 어떤 놈들은 한 시간 전부터 울어대던 기상송을 연달아 불러 제켰다. 농장주가 깨어나기 전에 휴의는 완용을 분쇄기에 넣었다. 기계는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손을 털고 돌아가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며 농장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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