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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은 승전의 기대감을 버린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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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은 승전의 기대감을 버린지 오래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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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은 거쳐가는 곳이었다. 잠깐 부모님을 뵙고 하루 이틀 여행을 한 후 바로 파리로 출국하려던 것이 유마와 점례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이들은 조선을 출발할 때 이미 출국 날짜까지 정했다.

그런데 막상 도쿄에 도착하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보았던 평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승전의 기대 같은 기분은 이미 저버린지 오래였다. 경기는 침체였고 상인들은 팔 물건이 없어 애를 태웠다.

서민들은 한 끼 밥걱정에 내몰렸다. 무엇보다 분위기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어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형장의 사형수처럼 핏기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도시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래 이랬었나. 유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유마는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각총리대신의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유마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점례가 따라오려 하자 그는 말렸다.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안다해도 나조차 만나기가 어렵고 하루 이틀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를 댔다. 잘못되면 나 혼자면 족해. 그런 심정이었던 것이다.

점례는 실망했으나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유마가 나간 후 그는 자수를 떴다. 학 두마리가 나는 평화로운 그림이었다. 네, 솜씨가 좋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유마 어머니가 칭찬했다. 별거 아닙니다. 변변한 선물도 준비못했는데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부지런히 하면 될 듯도 싶어요. 점례가 점잖은 일본말로 말했다. 그래, 조선의 분위기는 어떻노? 평온하다고 할까요. 전쟁 분위기는 아니에요. 이곳 도쿄보다 조용하고 모든 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유마가 했던 비슷한 말을 점례는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잠깐의 소란은 어느 도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상이 다시 오래지속됐다. 거기 일본사람들도 그렇고? 네, 다들 잘 지내요. 그리고. 점례는 잠깐 뜸을 들였다. 조선에는 일본사람, 조선사람 구분이 없어요. 모두 함께 평화를 추구해요. 내선일체인걸요. 그렇구나. 그렇게 화합이 잘돼고 있다는 말이지. 네, 어머님. 함께 어울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일등국민 이등국민이 어디있겠어? 반도인이니 조센징이니 하는 말을 쓰는 사람이 나쁘지. 

그말을 하고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점례는 다시 자수에 눈길을 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점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문이 잠기면서 방안의 구석에서 언뜻 붉은 피를 고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바늘을 밀어 넣었다. 정신 차리자. 너무 긴장했어. 점례는 실을 잡아 뽑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곧 멈추었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빠르고 길고 낮았다. 그러다가 점점 소리를 키우더니 이제는 사이렌 소리가 모든 소리를 집어 삼켰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밖은 사람들의 대피 소리로 어수선했다. 우리도 피해야 하나. 그러나 점례는 방안에 있는 어머니가 나오지 않자 그대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의 일종인지 정말 공습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방에 들어갔던 어머니가 황급히 나오더니 지하로 가자고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에는 작은 보자기가 하나 들려 있었다. 점례가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곧 사이렌은 멈췄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고요의 시간이 찾아왔다. 잠깐 기다려보자. 어머니가 오징어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뒷발을 들고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말했다. 그 때 사이렌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비틀거리면 어머니가 몸의 중심을 겨우 잡았다. 사이렌 소리가 일자 다른 소리는 모두 잠잠해졌다. 그 소리는 길게 울리가 짧게 울리다를 반복했다. 리듬을 타고 있었는데 음악적 효과가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가 또 뚝 멈췄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조용해졌다. 시끄럽다가 그보다 덜하니 조용한 것으로 느끼는 심리 때문인지 정말로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어머니는 아까와는 달리 안도의 눈빛을 보였다. 그 뒤로 정말로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소리에 감을 잡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급하면 저쪽 문 보이지? 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켰다.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계단이 가파르니 조심하고. 거기라면 안심할 수 있다. 유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 왜 그는 나갔는지 몰라? 그 말을 하면서 점례를 쳐다봤다. 더 적극적으로 잡지 못하고 나가게 했다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점례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유마 어머니는 다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벽의 한쪽 구석에 뭉쳐 있는 핏덩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점례는 다시 뜨개를 잡았다.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조선에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변고인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파리로 출국할 걸 그랬나. 아니면 조선에서 더 있어야 했나. 두렵다기보다는 점례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하나의 선택이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더구나 유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간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 무렵 유마 아버지 내각총리대신은 아들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천황을 만났는지 모른다. 오후에도 약속에 잡혀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만큼 결정하기 어렵고 심각한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오전에는 대본영 소속 육군장성과 해군장성등 군부 인사와 잇따른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군생활과 자신의 직책을 생각해서인지 신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중간에 낀 그는 결론을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양쪽의 주장은 팽팽했다. 전쟁을 해군이나 육군 주도로 하기 위해 육해군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패전하는 군대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이 지고 있으면 싸우게 마련이다. 그런 것을 논할 만큼 한가한 게 아니오. 지금은 종전선언을 하느냐 아니면 결전을 이어갈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군부 주도권을 놓고 다툴 시간이 없어요. 여기는 노획물을 처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각총리대신은 노골적으로 힘겨루기 싸움을 끝내라면서 화를 버럭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느냐는 투였다. 그러나 군부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육군 대장 출신 선배라고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자리에 참석한 육군참모총장은 속으로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그를 험담했다. 생각같아서는 누구라도 반대하면 바로 처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덴노만 아니라면 이 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 육군출신이 육군을 옹호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군에게 뇌물을 먹었나.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육군대장은 모자를 매만졌다. 오늘따라 모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해군쪽 대표는 싸울 함대가 없으면서도 큰소리를 쳤다. 전열을 정비하고 기습하면 미국쯤이야 문제없다고. 그러나 그 자신도 그것이 메아리 없이 허공을 맴돈다는 것을 알았다. 억지를 위한 억지였다. 그래야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오후에 쇼와 덴노를 뵈러갑니다. 우리의 생각을 달라는데 이렇게 싸우고만 있으면 어떻해요. 결론이 안 나면 내가 결정합니다. 내부대신이 못을 박았다. 그렇게 급합니까. 오늘 당장 미군이 도쿄 공습을 한답니까? 아니면 핵무기라도 쏜다고 협박했나요? 사정을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내각총리대신은 전선에서 괴멸적 참패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그 말만큼은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최후통첩이 받았어요. 가부간 답장을 줘야 합니다. 주지 않으면? 도쿄는 불바다가 되겠지요. 물론 가정이지만요. 수 분내에 수 십만이 죽겠지요. 핵공격도 물론 가정이고요. 건물은 폭삭 가라 앉고 사방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고.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가정이라고 했으나 내무대신은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두 장군은 앉은 채로 군홧발을 딱딱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찍었다.

아시겠지만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어요.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 천만명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쓰면 미국을 잿더미로 만든다고, 기세가 대단해요. 1억 인구로 밀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찌라시가 도쿄 시내에 뿌려졌어요. 우리 7천만, 조선과 대만 합쳐 3천만이 힘을 모으면 된다 뭐 이런 내용으로. 어젯밤에 사단장을 처형까지 했어요. 젊은 장교들은 점점 더 과격하게 나올겁니다. 

해군총장이 육군 총장의 말을 받아 가담하지 않는 자의 본보기라면서요? 하고 물었다. 그들이 여기로 쳐들어 올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하면서 두 장군은 허리춤에 걸린 권총집으로 손이 동시에 갔다. 내각총리대신은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끝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입에 무언가를 넣은 것처럼 우물거리던 두 대장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무고한 시민을 살려야지요. 얼마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역시 민간인다운 발상입니다. 육참총장이 비죽거렸다. 전시에 민간인 걱정이라. 해군총장도 맞장구쳤다. 내무대신은 못들은 척 무시했다. 

대신 우리는 천황제를 지키고 군부의 기득권을 확실히 챙길 겁니다. 우리가 뭐. 그것 때문에 젊은 장교들과 합세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더구나 한 발 물러서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요? 육군 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천황제만 지켜진다면. 해군 대장도 수그러들었다. 그는 천황제보다는 군부 기득권만 지켜진다면 하는 말대신 천황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을 들 생각은 없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연승과 태평양 전쟁의 초반 기세를 생각하면 하늘이 뒤집어 질 일이다. 지금 항복을 건의할 수는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러지 말고 신사 참배나 하고 옵시다. 머리도 식히고. 결단이 필요할 때는 바른 정신이 필요하지요.

육군대장이 해군대장을 보고 말했다. 내각 총리대신은 순간 이들이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다고 전세가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더 험한 꼴만 당할 뿐이다. 덴노의 위치가 위협받고 군부도 안전하기 못할 것이다. 내각총리대신은 일어서려는 그들을 잡았다. 그리고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는 듯이 어깨를 눌렀다. 이거 왜 그래요? 육군대장은 자신의 몸에 내무대신이 손을 대자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마가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내각총리대신은 어깨를 떨면서 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급한 순간에 아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주일 째 아들 생각은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온다는 전보를 받은 사실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비서는 뭣하는 거지? 이놈은 또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대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버지, 접니다. 아버지라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라니. 내 정신이 어찌 된 거지. 유마가 앞으로 다가왔다. 접니다. 조선에서 막 도착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아버지에 앞서 두 장군은 악수를 청했다. 총리대신의 아들이 최전선에서 싸우다 부상당해 소장으로 전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민간인 신분이지만 유마는 부동자세를 하고 손을 올려붙였다. 군기가 살아있었다. 좋아 좋아. 그만하고 앉으시오. 그래 건강은 어떠시오? 지금 아버님과 긴한 얘기를 하고 있었소. 유마 군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일본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어요. 포츠담 선언을 받자는 쪽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이 대립하고 있어요. 그 와중에 군부 소장파에서 쿠데타까지 발생했고요. 아주 심각해요. 조선은 그런 사정을 모르지요? 예, 금시초문입니다. 곧 일본의 승리로 종전될 그런 분위기를 안고 왔습니다만.

틀렸어요. 다 틀렸어. 육군 대장이 체념한 듯이 말했다. 유마는 일본이 진다는 말보다는 의기소침한 대장의 태도에 더 놀랐다. 당장 죽어도 사기로 먹고 살아야 하는 대 일본제국의 육군대장이 이렇다니. 더군다나 전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어려운 것은 나름대로 짐작했지만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유마야, 넌 나가 있어라. 이따 집에서 보자. 정신을 차린 내무대신이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저도 엄연한 예비역 장군입니다. 전시에는 군인이지요. 여기 제 육사 선배님과 해군 장군님 앞에서 제 의견을 낼 수도 있지요.

그래요. 육군 대장이 거들고 나섰다. 그는 아버지 대신 유마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할 것을 기대했다. 일년도 안 된 막 제대한 군인이라면 군인정신은 현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한 번 얘기나 들어보지요. 글을 쓰는 작가 장군이라면 우리와는 다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들은 유마가 파리에서 그림과 작가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이렇게 물었다. 군인이 항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지다니요. 유마가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너는 나가 있어라. 나가 있어. 아버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비서, 들어와라.내각 참모대신이 비서를 불렀다. 이분을 모시고 나가라. 아버지. 나가 있어. 오후에 덴노를 만나러 가야 해. 시간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혹하게 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항복 동의를 받아야 하는 시점에서 거의 다 의견 일치를 봤는데 결사항전 같은 말을 하면 사태가 꼬인다. 유마는 일어섰다. 아버지의 말을 계속해서 거역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종전을 원하고 있다. 밖으로 나온 유마는 벽에 걸린 덴노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충성을 맹세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그리고. 그가 나오기 전에 들은 육참총장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조선독립군 때문에 태평양 전선의 중요 부대를 조중 국경으로 차출했다고. 휴의라는 자를 잡지 못한 때문이라고. 조선총독은 뭐하는 사람인지.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총독을 교체해야지. 아버지의 뒷말이 목에 걸렸다.

조선에 있을 때 내가 그렇게 소극적이었지. 독립군을 애써 무시했어. 점례는 굳이 숨기려 들고. 나는 모른 척 하고. 그것이 지금 우리 대일본 제국이 수세에 몰린 이유라고. 그때 정리할 것을. 휴의라는 자는 처단할 것을. 안일했어. 너무 감상적이었어. 우리가 이리 될 줄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유마는 자책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닥치는대로 걷어차고 싶었다. 무엇이든 앞에 나타나면 일본도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었다. 숨어 있는 분노의 질주 본능이 살아나고 있다.

일본 육사에서 배웠던 악과 깡과 그리고 초기 전선 투입 당시 보였던 살의가 되살아났다. 그림이다 글이다 점례다 뭐다 하면서 자신의 군인 정신이 흐리멍덩해진 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래, 다 그것 때문이야. 내가 했어야 하는데. 내가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대본영 육군 대장은 됐을거야.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난 죄인이야. 국가의 대역죄인. 유마는 분노하다 울다 가슴을 치다 자기 뺨을 번갈아 사정없이 쳤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의 주범은 점례다. 그가 휴의를 감췄다. 그가 조선에서 벌인 일들이 떠올랐다.

그 자는 탈출해서는 상하이 독립군 사단을 몰고 두만강을 넘고 있다. 우리의 귀중한 군대가 전방이 아닌 후방으로 빠졌다. 내가 반드시 휴의란 놈을 처단하겠다. 난 다시 조선으로 간다. 그러기 전에 점례는? 점례는. 이렇게도 될 수 있는가. 이렇게도 되는 것이 사람인가. 자고 일어나니 백발노인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이그러졌다. 하루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건 변했다. 파리는 이제 유마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구상했던 글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부모님도 점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것은 패전 앞에서 힘을 잃었다. 아주 하찮은 일이 돼버렸다. 유마는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차를 탔나? 걸어서 왔나? 어쨌든 집에 왔다. 그는 현관을 두리번 거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일본도. 아버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될 때 덴노가 하사한 장검이었다. 수 백년 전의 전통 그대로 만든 진짜 일본칼이었다. 에도 막부 시대의 장인의 손에 탄생한 이 검. 그래 이거야. 사무라이. 사무라이. 사무라이. 거푸 세번을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나서 유마는 한 번 더 나는 사무라이다 하고 소리쳤다.

내 몸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사무라이 피가 흐르고 있어.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도도히 흘러왔다. 그것이 어느 순간 막혔는데 이제 다리 흐르고 있다. 헛것이 나를 홀렸다.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은 것은 다행이다. 내가 누군인지 이제 분명해 졌다. 나는 유마 호사카. 대일본 제국의 육군성 장군이며 일급 작전통이었다. 부상때문에 전역했다. 핑계지만 그랬다. 그래서 일까. 나는 한동안 내 몸에 흐르는 피를 잊었다. 다시 나로 왔다. 여전히 쓸만한 몸이다. 어깨 좀 다쳤다고 정신마저 상한 것은 아니다. 나간 정신은 곧 돌아왔다. 전쟁은 나에게서 떠났다고 했는데. 아니다.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내조국 일본은 대동아전쟁의 승자라고 했는데.아니다. 아냐. 모든 게 틀렸다. 무조건 항복이라고. 이게 말이. 유마는 말이 막혔다. 말이 되느냐고? 전쟁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천황도 아버지도 대본영의 육해군 장군도 병사도 아니다.

내가 점례를 만나지 않았다면. 파리를 멀리했다면. 조선에서 휴의를 처단했다면.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는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유마가 아닌 허깨비였다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천황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일본 제국의 빛나는 장군이 아니라 거친 손으로 제법대로 깎은 나무 인형이었다. 나무로 사람 형상을 본뜬 인형, 그것도 아주 작은 꼭두각시 인형. 부끄러움으로 유마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할복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럴 마음 추후도 없다. 그럴 시간, 노력 있으면 적군 하나라도 쳐야 한다.

석고로 만든 내 몸. 망치로 내려쳐 산산이 부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자. 항복은 아니다. 종전이다. 그리고 종전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아버님이 옳았다. 천황제 존속, 군부 기득권 그대로. 그리고 전쟁 전 식민지 유지, 전쟁 범죄자 처벌과 재판은 우리 손으로 하고 무장해제는 치안유지를 위해 최소한으로 한다. 그래 이런 조건이라면 해 볼만해. 그리고 시간을 벌자. 다시 준비해 싸우는 거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 멋지게 복수하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 아닌가.

이깟 부상이 대수라고. 유마는 상처입은 어깨를 툭쳤다. 아문지 오래됐지만 아팠다. 아얏,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생각보다 어깨는 정상이 아니었다. 부러진 어깨뼈를 이은 뼈가 다시 부러졌는지 통증은 사이렌처럼 셌다가 약했다를 한동안 반복했다. 아프다. 부상은 부상이다. 앞으론 때리지 말자. 내가 어리석었어. 어깨야 미안.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어깨대신 이번에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래 한가지는 정리됐어. 문제가 여럿일 때는 이렇게 가지를 쳐야해. 쳐내다 보면 몸통만 남게 되겠지.

다음은? 그래 다음은 점례. 점례는? 나를 남자로 만든 여자. 그녀의 그림 솜씨.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인류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하나야. 우리의 보물. 아, 어쩌지. 그는 잠시 사무라이를 떠나 나중에 자란 예술의 피로 잠깐 돌아왔다. 파리, 지금 파리에 있다면. 술과 담배. 멋진 건물과 음식. 글쟁이들의 끊없는 허세. 그립다. 어쩌지 다 팽개치고 애초 계획대로 파리로 뜰까. 그럴까. 유마는 순간 흔들렸다. 바람에 나무 끼는 마른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래, 조국이 무슨 대수냐. 점례의 손을 잡고 당장 떠나자. 그러면 전쟁의 그림자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진다. 아니다. 내 조국은 갈가리 찢기고 있는데 나는 조선 여자 점례와 장난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을 소설이랍시고 끄적였지. 사랑놀이. 그래 남들은 죽으라 싸울 때 나는 여자와 놀고 있었어.

유마는 또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그는 한 점 먼지가 됐다. 창가에 비치는 무수한 먼지 알갱이가 되어 방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목적지도 없는 먼지 신세가 바로 자신이었다. 여보. 점례가 다가와 앉았다. 손에는 뜨다 만 자수가 들려 있었다. 유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다 싫었다. 그는 꺼낸 장검의 날을 닦았다. 날이 선 검의 날은 금방이라도 살점 깊숙이 박혀 들듯이 푸르게 빛났다. 나 사꺄 한 잔 만 갖다줘. 아니 병째 가져와. 오랫만에 당신과 한 잔 하지. 점례는 말없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살기가 띄었다. 쳐다보지 않는 눈에서 이상한 빛을 보았다. 저런 눈, 그래 저 눈을 나는 전선에서 처음 보았지.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 그가 이런 눈으로 나를 본다. 소름이 돋았다. 점례는 한 손에 술병을 다른 손에 잔 두잔을 들고 검을 닦는 유마를 쳐다봤다. 그는 열중이다. 쓸데가 있을까. 왜 저리 열심이지. 점례는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잔에 술을 부었다. 당신도 한 잔 하시구료. 유마가 존칭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부어 가득 채웠다. 점례의 잔에도 자신의 잔처럼 가득 부었다. 

여보, 무슨. 그만, 그만해요. 점례는 일어섰다. 앉아요. 안주 가져올게요. 점례는 일어나면서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기억해 냈다. 혈기왕성한 육군 장교와 소초에서 만났던 그 날 그 표정이 지금 유마의 얼굴이었다. 낯설고 두려웠다. 빨리 파리로 가고 싶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그녀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과일 바구니를 옆에 놓았다. 술은 그대로 두고 점례는 뜨다 만 바늘을 잡았다. 그러나 잘 될리 없었다. 아차 싶었는데 손을 찔렸다. 손가락에서 피어 배어났다. 핏방울, 아주 작은 것은 흰 천에서 점하나를 찍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 끝났다. 그녀는 체념했고 되는대로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고 막사에서처럼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묶을 끈을 찾았던 그 시절의 막장 같은 생활로 점례는 다시 돌아왔다. 참 인생 바뀌는 것 한순간이구나. 유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나 유마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사무라이의 피는 끓고 있는데, 검은 찌를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주인은 아직 말 고삐를 잡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가족의 목을 쳤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전진하겠다는 뜻이다.

제국의 용사들은 지금 이순간도 미군 함정을 위해 돌진하고 있다. 나는? 누구도 보다도 앞장서야 할 나는? 유마는 나는 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은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밥 먹자. 어머니가 유마를 불렀다. 조선 아가씨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어. 조선 아가씨. 유마는 조선이라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선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조선이라고. 감정이 이렇게 나빠지자 조선 아가씨에게도 같은 감정이 쏠렸다. 그러고 보니 점례는 휴의를 도왔다. 그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살렸다. 시차가 그렇게 정확하게 일치할 수는 없다. 한 번은 몰라도 두어 번 그것이 되풀이 되면 우연이 아닌 사람의 개입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뺀 검을 다시 집어넣을 생각은 없었다. 대의를 위한다면 이것은 역사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하찮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 한 번 휘두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힘들지도 않아. 가볍게, 아주 가볍게지. 술 한잔 합시다. 유마가 잔을 들었다. 피를 멈추기 위해 다른 손으로 찔린 손가락을 누르고 있던 점례가 손을 풀고 잔을 들었다. 간바이. 유마가 말했다. 그리고는 꿀꺽꿀꺽 소리가 나게 술을 마셨고 곧 잔이 비워졌다. 당신도 마셔. 점례는 마셨다. 유마처럼 다 마시려고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반쯤 먹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나머지 잔을 다 비웠다. 당신, 그래 당신은 그런 여자야. 그런 여자라고. 그런 여자가 무슨 의미지? 순간 그런 여자가 된 점례는 빈 잔에 다시 잔을 채웠다. 유마야, 밥먹자. 어머니가 시선을 이쪽에서 떼지 않고 말했다. 유마는 다른 생각에 잠겨 이번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라를 위하는 나의 마음. 나는 사무리다. 충성하는 마음은 뛰는 심장처럼 간절하다. 생각은 다시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솜씨 좋은 두 명이면 충분하다. 첩자로 위장해 두만강의 휴의를 처단하자. 그것이 점례도 원하는 바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데 점례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안 그래? 당신 생각도 그렇지? 그는 입안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식탁의 밥은 식고 있다. 한두 술 뜬 어머니마저 입맛이 없다고 남겨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점례는 일어섰다. 그는 식탁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방으로 들어온 점례는 방안 가득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어머니 곁에서 뜨개를 이어 갔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금새 울어버릴 것이다. 학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편 날개를 접으면서 막 땅에 착륙하는 모습이었다. 암수놈 동시에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보기에 좋았다. 목과 눈과 다리에 붉은 물을 들이기 위해 점례는 바늘을 바꿨다. 유마가 다가왔다. 그는 흰 천의 학을 보면서 몇가지 물으면서 우리들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나와 함께 한 시간들, 동지적 마음으로 같이 했던 그 시간에 대한 짧은 회상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가는 목을 본 순간 유마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프지 않게 보내줄게. 오늘 하루는 참으로 기네.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지. 오후는 너무 길어. 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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