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5-27 12:06 (월)
그들은 돌격보다는 탈출에 더 신경을 썼다
상태바
그들은 돌격보다는 탈출에 더 신경을 썼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16 16: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용은 자신의 부대가 보잘것 없는 부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급조된 순사들은 싸우러 가겠다는 의지보다는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런 자들은 혼란한 틈을 노려 이탈할 가능성이 매우높았다. 병사에 필요한 것은 돌격할 용기인데 그들은 탈출할 기회만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 이참에 지휘관의 뒤통수에 총을 갈기려고 작정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완용은 뒤숭숭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신만큼은 누구보다도 사기가 높았다. 정보에 능한 그는 일제가 곧 패망할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에 시달렸다. 조선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사태만 지켜 보는 것은 애국자가 할 짓이 못됐다.

그는 오기가 발동했고 직접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살펴 보고 싶었다. 마침 휴의 부대가 조중 국경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도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떤 식으로든 조선땅에서 일본을 지탱하고 싶었다. 정 안되면 두 손을 들고서라도 막아서야 한다. 일제가 무너지는 그런 억울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지탱해야 할 자들이마땅히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 좀 더 분발해야 해. 나만 쏙빼놓고 다른 사람만 잔뜩 집어넣지 않았다. 완용은 그런면에서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부대 구성도 조선인 위주로 짰고 중간 지휘자 가운데 조선인을 일부러 끼워 넣기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기도 했다. 우리 조선인끼리 잘해보자 응. 그게 나라는 위하는 길이고. 성공하면 우리게 멋지게 독립군을 물리치면 한 자리씩 나눠주겠다고 동지적 약속을 수시로 해댔다. 

조선인에게 책임감과 동시에 자리를 보장하려는 의도였고 이 의도는 일부 맞아떨어졌다. 완장을 찬 그들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조선 독립군에 맞써 싸우려고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자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싸움은 기세가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죽기 살기로 나오는 자와 기회만 노리는 자들은 애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완용의 부대는 점차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제에게는 좋은 징조였으나 독립군에게는 그 반대였다. 

일단 그들은 병력면에서 앞서 있다. 휴의나 약산의 부대를 사단 규모로 칭했으나 실제로는 각자 3백명 내외에 머물러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환 것이었으나 2천 명 규모의 완용 부대와는 숫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병력으로만 보면 독립군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이 정도면 임정의 뿌리를 아예 뽑을 수도 있다. 완용은 일차 전투에서 승하면 여세를 몰아 수뇌부의 싹을 없애 버릴 작정을 했다. 그래서 독립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모한지 상하이 임정 수뇌부가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만백성 조선민들아, 너희들은 애초 무능한 백성들이다. 게으르고 거짓말 잘하고 뭉치지 못하는 미개한 백성이 어찌 대일본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느냐.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알려주마. 

우리 조선인은 독립을 원하지 않아요. 세계만방은 이것을 알아야 하지요. 조선백성 스스로 일제 신민이 되려고 하는데 누가 막으리요. 일본 제국주의 우산아래 있는 조선이 독립된 조선보다 좋다는 것이 인민의 뜻이라는 것은 증명된다. 완용은 이런 커다란 야망외에도 개인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었다. 바로 휴의와의 대결이었다. 그자와는 결코 지고 싶지 않았다. 원수의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싹터왔다. 일은 자신이 더 열심히 하는데 공은 그에게 돌아가는 꼴의 연속이었던 악몽은 깨끗이 지워야 한다. 점례도 그렇고 여순도 나를 떠나 휴의에게 마음을 주었을 때 완용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점례는 그렇다고 쳐도 나와 약혼까지 거론됐던 여순마저 마음은 휴의에게 가 있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완용은 이미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늘 이런 마음을 품었으나 이번 출병이 있자 되레 그때 일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 되레 잘됐다는 판단이 섰다. 오늘을 위해 뒤로 미룬 것은 천운이다. 깨끗하게 처리하마. 아주 흔적도 없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고문실에서 취조당하는 그가 아니고 취조하는 내가 아니다. 그도 준비했고 나도 준비했고 싸움터는 동등하다. 휴의, 네가 좋아하는 평등한 상태에서 붙어보자. 이 싸움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완용은  일부러 자신을 그쪽으로 세게 몰고 갔다. 두만강은 피로 물들 것이다. 우리도 당하는 자가 나오겠지만 당하는 자들이 없이 승리할 수 없다. 죽으면서도 그들은 조국해방보다는 천황만세를 외칠 것이다.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그러기에 앞서 월등한 무기는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다. 독립군은 고목처럼 힘없이 쓰러진다.,

너는 알겠지. 전투는 사기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원병력이 있고 후퇴할 공간이 있다. 아무리 적들이 전술에 능하다고 해도 우리의 전술을 따라 갈 수는 없다. 일단 먼저 도착해서 매복하고 기다리자. 오는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휴의는 체포해도 좋고 사살해도 상관없다. 굳이 사로잡아 왜 그랬니? 지금이라도 무릎꿇고 빌어라. 사지는 사라져도 목수은 살려주마. 이 따위의 말을 주고받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얼굴이 보기 싫다. 다만 숨쉬지 않는 시체라면 확인할 수 있다. 최후의 승자는 네가 아닌 나라는 것을 입증하면 좋을 것이다. 사진으로 남겨도 된다. 기념사진 하나 찍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혹, 그럴리는 없지만 점례나 여순을 만나면 이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고 저 세상에 간 자의 사진을 내밀수도 있다. 그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면서 안됐다고 같이 위로해 준다면 우애는 그런대로 쌓일 것이다.그러나 완용의  이런 기대는 일부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체하는 사이 약산의 부대는 벌써 압록강을 넘어섰다. 신의주에 막 도착해 병력을 점검하던 완용은 수백 명의 독립군이 함경도 경찰서를 접수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었다.

완용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생각할 겨늘도 없이 일개 중대를 급히 함경도 쪽으로 뺐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또다른 중대를 평양 이북으로 급파했다. 양동작전으로 고사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약산은 그런 일제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그들이 평양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먼저 그곳을 돌파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의 속도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부사령관에게 작전 지휘를 맡기고 날랜 병사 8명을 데리고 철도회사를 급습했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 짓는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덕기만을 상대할 생각이었으나 완용의 부대가 방향을 틀었다는 첩보를 듣고 작전을 급히 바꿨다.

평일이고 이 시간이라면 그는 회사에 있을 것이다. 약산의 계획은 맞아떨어졌다. 형식적인 병력을 배치했던 철도회사는 심장부가 쉽게 약산의 손에 떨어졌다. 약산을 포함한 8명의 특공대는 움직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쏘았다. 그리고 이층으로 내달렸다. 사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총소리를 듣고 일부는 피했고 다른 일부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약산은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충분한 시간이었다면 일일히 대조했겠지만 촌각을 다투는 작전이다보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적과 매한가지였으므로 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양심의 가책을 이런 식으로 피한 약산의 부대는 내려오는 3명을 조준 사격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이층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책상 아래로 숨는 사람 가운데 유독 침착한 제복의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일어나기 위해 몸을 세우면서 서랍을 열었다. 그 모습이 약산의 눈에 띄었다. 바로 사격을 가했다. 팔뚝에 총을 맞은 그는 맞지 않은 다른 손으로 피를 막다가 손을 때고는 다시 책상 서랍으로 뗀 손을 들이밀었다. 약산은 번개처럼 달려나가 발로 책상을 세게 찼다. 그러자 그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것은 그자만이 아니었다. 책상위에 있던 명패가 바닥에 굴러떨어져 약산의 발밑까지 왔다.

발로 차서 확인해 보니 덕기 부장이 창씨 개명한 이름이었다. 노구치 부르메. 그는 발로 피를 흘리는 노구치의 팔을 밟고는 덕기 이놈. 반역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그리고 총구를 머리에 겨누었다. 내 이름을 어찌 아세요. 그리고 선생님은누구신가요? 그것을 내가 너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난 시간이 바쁘다. 다만 네가 죽는 이유를 한 번 더 설명하겠다. 민족을 배신한 친일분자, 독립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탕 탕 탕.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밀폐된 공간에 오래 머무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 없었다.

순식간에 마당에 나온 그들은 사이렌을 울리면 달려오는 트럭을 일단 잡기 위해 벽에 몸을 숨겼다. 언제 사격을 가해야 할지 약산은 가늠했다. 트럭위에 있을 때 아니면 내릴 때, 이렇게 생각해 보다 내리고 나면 병력이 흩어져 다 잡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그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며 철도회사 입구에서 차를 대려는 순간 집중사격을 했다. 내리려고 준비하던 차에 받은 기습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운전수를 비롯해 옆자리에 타고 있는 일제 장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트럭위에 있는 병사들 역시 애초 자신들이 목적했던 땅에 발을 디디려던 계획은 수정됐다. 그러기 전에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약산은 빠르게 후퇴를 지시했다. 미리봐둔 언덕을 타고 넘었다.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뒤를 보니 적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었다. 뒤집어져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검은 트럭 옆으로 똑같은 모양새의 트럭 세대가 멈췄고 이어 타고 있던 군인들이 뛰어내렸다.

트럭에서 내리면서 넘어지는 자들을 보면서 약산은 그 순간에도 훈련받지 못한 신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풋내기야. 그러나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정면대결을 펼치면 이쪽의 피해도 예상해야 한다. 약산은 적들과 싸우기 보다는 남하를 결정했다. 완용 부대가 생각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했고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약산은 함성을 지르며 마구 헛방을 쏘는 그들을 따돌리고 앞서 간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급하게 몸을 날렸다. 완용은 철도회사에서 벌어진 비극의 현장을 보고는 망연자실했다. 뒤늦게 도착한 현지 경찰은 어쩔 줄 몰라 사냥개에 쫓기는 멧돼지처럼 허둥대기만 할 뿐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적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도 적들의 위치도 알지 못했을뿐더러 그들이 독립군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기습 후 도주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당황한 그들을 다독이고 전열을 정비한 완용은 그것이 약산의 짓이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한발 늦은 것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저자라면 휴의 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번 대결해 볼만한 상대라고 여겼다. 독립군 중 몸값이 높은자이니만큼 자신의 손으로 꼭 처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휴의를 생각하자 그는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다시 두만강 쪽으로 이동을 결정했다. 추격을 하거나 체포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곳 함경도 헌병사령부나 경찰의 몫이었다.

아직 상부의 명령도 나오지 않았는데 너무 일찍 여기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일본 경찰이 완용에게 따졌으나 완용은 원래 자신의 목표를 바꿀 의지가 없었다. 그는 다만 덕술이의 장례에 대한 지시는 꼼꼼히 내렸다. 이분은 우리 황국의 안전과 승리를 위해 몸 바치셨다. 그 공로가 참으로 크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달리 장례를 제대로 치르고 신문에 날 수 있도록 부고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자신과 행적이 비슷한 덕술이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완용의 덕술의 시체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대신  아무런 저항도 하짐 못한 채 그냥 당한 것에 분노를 느꼈다. 드르륵 드르륵, 이 가는 소리를 완용은 자신의 귀로 들었다. 더 악랄해야 한다. 선처는 없다. 반드시 독립군을 잡아 자신의 동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다짐했다.

이것은 안 좋은 사례가 될 것이오. 대일본 제국의 유명한 경찰이 백주 대낮에 적에게 사살된 사실은 우리 황국의 수치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모욕이 될 터이니 그에 상응하는 아니 수백 배 수천 배로 보복해야 옳다. 알겠나? 알겠느냐고? 완용이 거듭 소리치고는 침을 탁하고 뱉었다. 사상이 의심되는 자, 독립군에 협력하는 자는 즉결처분해도 된다. 어떤 심문이나 재판 절차도 필요없다. 완용은 도열한 부하들에게 그리고 어정쩡하게 자신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함경도 경찰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그들은 수도 없이 들었던 이런 하나 마나 한 소리보다는 실질적인 것이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그러지 못해 실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장 연설을 마친 완용은 곧바로 애초 목적지로 출발했다. 

삼일 후 완용 부대는 애초 정한 두만강 일원에 진지를 구축했다. 다행히 휴의 부대가 남하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밀정을 두만강 이북 중국 땅에 보낸 동휴는 남은 시간에 사방에 매복 진지를 구축했다. 남하하는 적들에게는 이곳이 바로 무덤이 될 수 있도록 빈틈없는 작업을 독려했다. 처음에 그들은 열성이었다. 제복을 입고 지날때,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으로 참호를 팠다. 두려워하거나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저처럼 되고 싶다는 갈망 같은 남의 시선은 일제에 충성을 다짐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일은 고되고 명령은 엄했으나 삼시세끼 밥이 나왔다. 이런 것이 전투라면 진작에 황군이 될 것을 아쉬워하는 부랑아들도 있었다.

참호 작업은 완료됐으나 전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대기 시간은 길어졌다. 완용은 발작했고 그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부하들을 걷어 찼으며 이유없이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뻐기고 자랑하던 부하들의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도주할 길을 알아보느라 겉으로는 일부러 맞아 주는 척 했다. 신념이라는 것은 이처럼 쉽게 허물어 졌다. 조선백성들은 결코 무지렁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생존 원칙이 있었다. 완용의 부대에 급조된 순사들 역시 생존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일주일이 될 무렵 강을 넘었던 첩자들이 돌아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휴의의 부대 출전이 임박했으며 그것은 오늘 밤 당장이거나 내일 새벽도 강한다고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했다. 첩자가 가져온 내용 중에 완용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휴의에 대한 신상이었다. 휴의가 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에서 탈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총알 세발 가운데 두 발이 얼굴쪽이고 한 발은 종아리였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총알 세 발을 맞고도 몸을 추스러 조선 진공 작전을 펼치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조센징 놈이야. 완용은 혀를 찼다. 

휴의를 치료한 병원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부부병원이라고 했다. 완용은  부부병원과 여순을 연결시켰다. 상하이에서 독립자금을 대는 부부병원의 실체는 조선에서도 은밀히 알려져 있었다. 내왕하는 첩자 가운데 일부가 포목점 집 사장을 알고 있었고 그를 통해 병원장이 통영 출신의 말수이며 부인은 보령에서 출세한 여순라는 것이었다. 보령에서 출세했다고? 그 말을 듣고 완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곳에서 출세한 인물은 자신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됐다.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한때 약혼을 논했던 여자였다. 분명 그 여자는 경성역에서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곳 군수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일을 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험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맞다. 지금쯤 살아 있다는 것도 기적인데 의사가 돼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나서 자신을 배신한 여순이 그 여순인지  알고 싶었다. 배신자가 맞다면 휴의가 어떤 루트로 조중국경을 넘고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 휴의 부대가 기습을 하거나 방어선을 뚫고 평양쪽으로 진군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최악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일주일 째 그들은 오고 있지 않다. 독립군이라는 작자들도 별수 없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훈련은 물론 군자금조차 충분치 않은데 수 백명이 넘는 병력으로 도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중국 국민당의 적극적인 지원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형편 없는 전투력을 가졌을지 모른다. 약산이 비록 함경도를 돌파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아래쪽이 공격받았다는 보고는 없다. 아마 산속에 숨어 있거나 뿔뿔이 흩어져 게릴라 전에 들어갔을 수 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약산이 그럴진대 휴의는 그 보다 못할 것이다. 무기도 그렇고 배후 지원군도 없다면 내려오는 즉시 전멸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완용은 본국이나 총독부에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직계 부하에게 작전권을 주고 자신은 한 명의 부관만 대동한 채 상하이로 떠났다. 오늘 밤 견디고 날이 새보면 알겠지. 첩자의 보고가 정확한지. 그러나 밤을 새고 날이 밝고 그 다음날이 와도 독립군 부대의 움직임은 없었다. 완용은 결단을 내렸다. 길게 잡아도 일주일이면 사태 파악을 끝내고 본대로 복귀할 수 있다. 휴의 부대가 이왕 늦은 거 일주일 만 더 지체해 주기를 바라면서 완용은 휴의와의 일대 결전이 자신의 손에서 매듭 지어 지기를 고대했다.

이런 마음으로 완용은 은밀히 국경의 강을 넘었다. 넘으면서도 자신의 이런 결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기에는 늦었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순을 만나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여순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했다. 그런데 여순이 자신보다는 휴의에게 더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배신자 년. 완용은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배신자 년을 외치고는 침을 그러모아 허공에 뱉었다. 침의 분말이 먼저처럼 뿌옇게 떠돌다 사라졌다. 

완용의 복수는 처절했다. 여순을 철저히 버렸다. 점례와 함께 일본에 팔아넘긴 것이다. 말이 학교 보내주고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지만 대개 경성역에 내린 여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처리되는지 완용은 훤히 알고 있었다. 사랑했던 여자를 팔아넘긴 완용은 어떤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여전히 결혼하지 않고 홀로 인 것은 여순에 대한 기다림 혹은 잘못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고 그는 스스로 용서를 빌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선이 흐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만난다면 그는 냉철해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언제나 빗나간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남의 여자이고 애까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어린 시절 풋사랑의 기억은 잊어버리자. 그리고 자신이 했던 그녀 부모에게 혹은 점례 일가에게 했던 행동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우정을 저버린 자라는 손가락질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장 괴로워할 것은 자신에게 있는 그런 놀라울 만큼 여린 감정이었다. 잔혹한 고문형사에게도 이런 때가 간혹 찾아오는 것이다. 전과 다른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 자의 최후를 이야기 한다. 지금 완용이 꼭 그런 상태다.

휴의를 고문할 때 그가 보였던 슬픈 눈빛은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모질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 좋았으나 그 눈빛을 보고는 완용은 고문질을 다른 경찰에 맡겼던 것이다. 그의 등뒤에 너는 내 친구 아니었니? 하는 그럴듯한 환청이 요즘들어 간혹 들리는 것도 문제였다. 친구니 동무니 하는 말들은 낭만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땅을 치고 후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의 길을 갔고 나는 나의 길을 갔을 뿐이다. 하지만 점례와 여순의 건은 잘 될 수도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니고 공장에 취업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거의 이년이 다 되 갈 무렵에도 그녀들은 고향에 어떤 소식도 전해주지 못했다. 완용은 공장이 아닌 탄광이거나 아니면 전선의 위안부 부대로 보내 졌을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휴의가 자신의 소개로 들어간 군대를 이탈했고 반역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를 체포했다. 완용의 생각은 자꾸 이런 식의 과거로 달리고 있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허나 여순을 만나면 뚜렷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휴의에 대한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임정에 대한 정보 같은 중한 것이어야 했다. 일정이 잘못되면 두만강 쪽은 부하가 처리하고 자신은 여기서 더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나 만큼 여순이나 휴의에 대한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언어가 다른 일본 형사들보다 자신의 수사능력이 뛰어난 것은 이런 점이다. 조선인이 장점인 것은 바로 조선어를 안다는 점이었다. 완용은 자신이 이럴 때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잇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조선어를 자랑삼아 일본인들 앞에서 쓰기도 했고 불콰한 눈으로 쳐다보는 자가 있으면 바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그러면 그들은 완용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완용은 같은 조선인인 휴의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잡고 싶었다. 그래서 일제에게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내가 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잡는다. 완용은 기회있을 때마다 이런 다짐으로 휴의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이런 쪽으로 생각이 모아지자 완용은 조금은 편한 마음이 됐다. 그리고 여순에 대한 미안함도 사라졌다. 과정이야 어쨌든 여순은 지금 상하이 의사가 아닌가. 나 아니면 여순이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는가. 나 아니면 어떻게 점례가 내무대신의 아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느냐. 독립군 대장으로 일제의 요주의 인물인 휴의는 또 어떤가. 그 자 역시 내가 없었으면 여전히 죽마을에서 땅이나 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그들은 모두 나에게 빚을 졌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졌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들은 나를 원수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은인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일단 일본 영사관부터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일본 영사관은 완용의 방문을 환영했다. 조선에서부터 사전 연락은 없었으나 완용의 방문이 어쩌면 독립군을 일망타진할 수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본 영사관은 곤궁에 처한 상태였다. 과연 독립군의 싹을 자를 수 있을까. 잡아도 잡아도 나오는 쥐새끼처럼 나타나는 독립군을 과연 없앨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감이 일본 영사관을 사로 잡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않은 완용의 방문은 일본 영사에게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을 불어 일으켰다. 희망이 의심스러워져 갈 무렵 나타난 완용의 방문은 다시 희망의 끈을 조이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독립군 토벌대장이 왔으니 뭔가 색다른 계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영사관은 그를 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완용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고 영사관은 이쯤해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종로서장은 두만강에 방어선을 치고 대기하겠다는 것이 작전의 전부란 말이요? 영사관 형사 야마모또 하야시는 짜증을 냈다.

내 말을 다 들어 보시오. 지금 상황은 마냥 즐기기만 할 때가 아니란 말이오. 조선내에서도 여기저기 준동 세력이 활개 치고 있고 상하이 사단 병력이 출동을 대기 중에 있다는 것은 하야시 선생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일부는 벌써 압록강을 넘었고 사상자 다수가 발생했어요. 덕기의 사망과 그와 관련된 소식을 일본 영사관도 벌써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사관은 빠른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사단이 두만강을 넘어 남진을 하면서 두 세력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면 민심은 크게 요동칠 것이오. 일망타진은 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세력을 감당하기 어렵단 말입니다. 내 말은. 완용은 하야시의 표정을 살폈다. 작은 눈이 뱀처럼 미동도 없이 고정된채 완용은 노려봤다.

내 말은, 완용은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치자는 것이오. 뱀의 다리를 밟은들 무슨 소용 있느냐고요? 그는 다른 표현을 쓰려다 하야시의 눈이 뱀눈을 닮았다는 즉흥적인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 대가리는 잘 알다시피 임정의 수뇌부요, 나아가서는 도강한 약산이며 곧 도강을 획책하는 휴의 일당입니다. 이런 소문은 금새 조선 총독부에도 들어갑니다. 일단 함경도 쪽은 더이상 후퇴는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 경찰이 잘 방어하고 있어요. 내가 후속 조치는 해 놓고 왔던 덕분입니다. 하야시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조사도 끝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조선 형사가 그의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병력 일부를 급히 그쪽으로 빼낸 것은 신의 한 수였소.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덕술이라는 유명한 형사를 잃은 것은 손실이지만 일단 평양은 잘 버티고 있어요. 하야시는 입맛을 다셨다. 버티다니요? 이거 어디서 써먹는 수작이야. 하야시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러나 꾹 참았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정보를 얻고 작전을 짜는 것이 중요했다. 더구나 이 자가 상하이 사정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은근히 떠 보았다. 휴의라는 자가 동향이라면서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내가 만약 하야시 선생이 알고 있는 내용을 질문이라고 한다면 기분이 상하겠지요? 완용은 고삐를 잡았다는 듯이 놓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때가 아니오. 난처한 표정으로 하야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한때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런 말 꺼내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고 있어요. 잡았던 자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돼요. 탈출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기회가 올 때 싹을 잘랐어야지요? 하야시가 훈계했다. 그래 그때 같이 도망친 조선청년이라는 자가 약산이라는 수십개 이름 중 하나를 쓰면서 압록강을 넘었다고요? 그리고 제국주의의  위대한 형사 덕술을 죽이고요? 하야시가 화난 얼굴로 덕술의 죽음이 마치 완용의 책임이라는 듯이 몰아부쳤다.  

그 때 죽였어야지. 마음이 약해서야 원, 조센. 하야시는 조센징이란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대신 한 번 더 그때 죽였어야지 하고 완용에게 휴의의 탈출 책임을 자꾸 상기 시켰다. 아니 그게 어디 내 책임이라는 말이요? 따지듯이 완용이 대들었다. 자, 지난 일은 그만둡시다. 앞으로가 중요하니. 그나저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지 왜 여기 온거요? 전통으로 하던지 아니면 급전을 치면 될 것을. 처음의 환대와는 달리 하야시가 건방을 떨었다. 완용은 그것이 같잖았으나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하야시는 그가 온 사이 휴의가 두만강을 돌파하면 어쩔 거냐, 대책은 있느냐? 고 따지는 듯 했다. 완용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휴의가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고 그 병원에서 탈출한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투로 받았다. 하야시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사정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었다.

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심각한 부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상하이 영사관은 도대체 무엇을 했지요? 이번에는 공격의 순서가 바뀌었다. 하야시가 큰기침을 했다. 따지러 온 거요? 영사관을 무시하는 거요? 그게 아니고요. 내 말은 왜 감시를 게을리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요? 하야시는 조센징이라는 말이 입 끝에 왔으나 종로서장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 가래침을 탁하고 뱉었다. 완용은 침뱉기라면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듯이 그도 탁하고 하야시보다 더 멀리 침을 뱉어냈다. 

이거 이런 식이면곤란해요. 내가 말할까요? 내 상관인 것처럼 행동하니 말 하지요. 뭘 모르시나 본데. 병원장 말에 따르면 아마 말수라고 하지요. 병원장은 총상 세 발이면 오늘 밤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탈출은 불가능하고요. 그날 바로 놈들의 습격이 있었어요. 병원장과 부부를 묶어 놓고 트럭을 이용해 침대채 통채로 들고 달아났어요. 의사까지 권총으로 협박하고. 하야시는 이런 상태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 했어야 했는지 해답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생각은 안했어요? 침입자들과 병원장 부부가 내통했다는. 무슨 소리요? 내통했다면 묶어 놓고 위협했겠소?

그 말을 하고는 하야시는 아차 싶었는지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나 머리를 굴려 바로 반격에 나섰다. 내통했다고 손 치더라도 환자가 죽는 내통이 성공한 내통은 아니지 않소. 얼굴은 퉁퉁 부어 마치 익사한 시체와 같았고 종아리 관통상으로 칭칭 동여맨 다리는 내 허리통 보다 컸단 말이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시체가 탈출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그런 자가 탈출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체가 탈출했다고요. 살아서 한 달도 못돼 회복하고는 병력을 이끌고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이오.

완용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완용에게 있다는 듯이 말하는 하야시가 아니꼬왔다. 휴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 자는 불사조 같은 자요. 나에게 체포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승부를 걸려고 여기에 온 것이고요. 나도 시간이 없어요. 병원으로 나를 좀 아내 하시오. 완용이 하야시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병원은... 왜? 어디 아파요? 별 할 일 없는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하야시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병원장 부부를 만나려고요. 아참, 그들은 조센징이지요? 하야시가 조센징에 힘을 주면서 완용을 노려봤다. 너도 조센징이야 하는 눈빛을 담아. 내선일체라면서 그런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더구나 병원장 부부는 영사관에 협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나카무라 대장을 살렸고요. 그 공로로 덴노의 훈장까지 받았어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동족이고 동향이라고 편들기요? 의심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요. 내통 가능성이 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휴의가 어디에 있고 언제 출동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하야시는 이 자가 소문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갑시다. 가서 나도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차 안에서 둘은 영사관의 싸늘한 분위기 대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가 그래야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야시는 이 기회에 병원장과 더 친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쿄로 병원을 이전한다는 소식도 있었고 이전에는 영사관이 협조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병원장 부부와 인간적으로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었다. 유능한 의사를 아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은퇴해서도 일자리 정도는 하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용은 하야시와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일단 말수에게 집중하자. 여순이 알거나 내가 먼저 아는 체해도 상관 없지만 일단 여순은 뒷전이다. 6년 만에 만나는 일정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여순이 어떤 내력으로 의사가 됐는지 나는 모르지만 여순은 자신은 잘 알 것이다. 좋든 싫든 지금의 여순은 나와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해도 말이다. 내 목적은 여순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과거 한때를 추억하거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휴의를 잡는 것에 집중하자. 어떻게 말수를 꼬드길까. 그가 밀정이라면 시간이 촉박하다. 차라리 여순에게 기대볼까. 감정에 호소하면 어떨까. 옛정을 생각하라면서. 아니 될 말이다. 그는 나보다는 휴의 편이 틀림없다. 내가 휴의를 체포하는데 여순이 협조할 리 만무하다.

일단 들이밀고 보자. 그러다 보면 무슨 수가 나오겠지. 나오지 않더라도 생전에 여순을 보고 말수라는 자도 본다면 내 인생도 훨씬 더 풍부해질 거야. 인생이 풍부해진다는 생각은 완용을 잠시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완용은 갑자기 일제 고등계 형사의 신분을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할지라도 일 년에 한 십 분쯤은 천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누가 데려다 줬으면 바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상하이에 숨어들거나 아니면 연해주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곳에서 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조선 바닥에서 남의 뒤나 캐고 고문질 하는 것도 이제 이력이 날 만하지도 않던가.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상상일뿐 실현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을 완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헛웃음을 크게 지었다.

여순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성숙했고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왕비와 같은 품위가 있었다. 품위있는 단어를 구사하면서 작은 몸짓을 보일 때면 마치 격 높은 귀부인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여순이 원래 저랬었나. 직위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의사라고 하니 사람이 정말로 달리 보였다. 자신의 처지를 완용은 바꿔 놓고 보았다. 여순의 남편으로 총이나 칼 대신 흰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로 말이다.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곧 자신의 직성과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국가를 위한 일을 하고 저 자는 겨우 아픈 사람의 투정이나 들어주고 있다. 격이 다른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저런 일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거야. 여순도 마찬가지고.

여순이 나를 택했으면 애국이 뭔지 충성이 뭔지를 알고는 벅차오르는 기분을 알텐데 흰 옷 입고 종이나 뒤적이는 여자가 그런 큰 것을 알겠어? 기껏해야 피나 닦고 살을 꿰매는 일만 할 걸.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오? 하야시가 말대신 뜸이 길어지자 완용을 재촉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고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하야시가 불쑥 이제 회포도 풀었겠다 각자 일이나 합시다, 하고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잠시 10분만 시간을 주시오. 조선사람끼리 할 이야기가 있소. 조선사람이라는 말에 하야시는 기분이 상했으나 자신이 조센징이라고 말한 것을 염두에 뒀는지 알았다고 하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영사관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연락하시오. 하야시는 말수와 눈도장을 찍는 악수를 하고 여순과는 목례를 했다. 완용은 병원 창구 앞에 섰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여순은 이렇게 물었다. 누구에게나 하는 첫 질문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이 자가 완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시와 대기실에 앉아서 큰 소리로 대화할 때 눈치챘다. 종로서장이라고 떠들었고 독립군 대장 휴의를 잡으러 왔다고 떠벌였다. 여순은 상대의 실체를 알았으므로 되레 마음이 편했다. 그가 나를 알아 볼 것이다. 그러면 그러냐고 대답하면 된다. 일단은 모르는 척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너 같은 작자가 드나들 곳이 아니라고 쏘아 주고 싶었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기세등등하게 앉아서는 여전히 가해자 노릇을 하고 있다. 집어 던지고 싶은 놈이야. 여순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네 놈이 내 앞에서 출세를 자랑하고 의젓하게 폼 잡고 있지만 이제는 당할 내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완용은 여순에게 살갑게 대했다. 마치 헤어진 옛애인처럼. 그러나 안부를 묻거나 걱정하거나 해후의 즐거움을 누릴 처지가 아니라는 듯 사무적으로 접근했다. 

휴의 소식은 들었소? 완용은 야, 내가 아파서 왔니? 경성에도 의사 많다 하면서 무안을 주고 당장 막 나가고 싶었으나 남편이라는 자가 옆에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존칭으로 물었다. 형사님이 알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형사님이라니? 동네 오빠인데 이거 섭섭하오. 오빠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면 오라버니 어떻소? 완용이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말수는 불쾌했으나 참았다. 눈꼬리가 위로 크게 찢어져 올라간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원숭이 대가리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인 내가 참아야지. 말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 와이프 한테 선생님 이야기는 간혹 들었습니다. 이웃 동네에 살면서 오빠, 동생하는 처지 였다고요. 선생님 덕분에 경성으로 와서 공장에 취직하고 돈을 벌어서 공부하고 의사가 됐어요.

그런 걸 안다면 나 한테 한 턱 쏘아야 겠습니다. 완용이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나중에 받아 먹기로 하고요. 혹시 휴의 동향은 알고 있는지요?그가 여순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말수에게 했다. 출정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도는데 정확한 일정은 나왔나요? 말수가 어이 없다는 듯이 완용을 보면서 그것은 조선 제일의 형사님이 더 잘 아실테지요. 우리같이 병원에 갇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 병원에 입원했다면서요? 그리고 탈출했고요. 알고 있는대로 입니다. 신문에도 크게 났어요. 탈출에 혹 의사선생이 도움을 주지 않았나요? 완용이 노골적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여순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우리 사모님은 휴의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 조심하세요. 난 당신에게 잡힌 피의자가 아니니까.

완용이 머쓱한 듯이 권총집에 손을 갖다 댔다. 그는 자신이 불리하거나 난처하면 항상 하는 손짓대로 이번에도 습관처럼 그렇게 한 것이다. 조선사람끼리 이거 왜 이러십니까? 타국에서는 범죄자도 애국자가 되는 판인데 낯선 이국에서 동지애는 없고 죄인 취급하다니요? 말수가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여순 동생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나는 내 직무에 충실할 뿐이요. 대일본 제국이 독립운동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아파야 쓰겠어요? 일본 영사관에 파견 나온 야마모또 하야시 형사가 다 조사하고 끝낸 일입니다.

여기 오기전에그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의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하지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요. 말을 하면서 완용은 시계를 보았다. 10분이라고 하고서는 벌써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미안한데 여순 동생이 가서 하야시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해주면 안 되겠소. 난 조금 더 당신 남편과 얘기할 게 있어요. 여순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하야시가 있는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남자 끼리 말인데요. 여순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본 완용이 말수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자세였다. 말수는 별 시답잖은 녀석이지만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자기도 조금 앞으로 의자를 당겼다.

알려 주시오. 휴의를 잡으면 그 공을 전부 의사 선생에게 돌리겠소. 지금 압록강이 뚫리고 독립군 일부가 함경도에 상륙했소. 내선일체 한 몸도 부족한데 조선인 마저 이러면 우리가 본국에 무슨 낯으로 뵈겠소. 의사 선생, 휴의를 체포하면 독립군은 그대로 와해됩니다. 독립을 하는 단체가 여기 상하이만 해도 수십 개가 넘고 참여자도 사단 병력입니다. 사람 하나 없앤다고 독립운동 자체가 사라지지 않아요. 더구나 본국은 태평양 전쟁의 큰 그림을 봐야지 지엽적인 하찮은 것에 너무 힘을 쏟는 것 아니오? 말수가 나름대로 처방을 내리고 방향이 틀렸다고 완용에게 훈수를 두었다.

싸울 대상을 독립군이 아닌 서양 연합군에게 돌리는 것이 현명하지요. 그런 것으로 논쟁할 시간이 없어요. 삼 년 전이라면 모를까요. 독립군이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울에서도 잇따라 도발이 일어나고 마산이나 대구에서도 들고 일어났어요. 목포는 진압하는데 열흘 이상 걸렸고 도망자들을 아직 다 체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말수가 진지하게 나왔다. 이제 말귀가 조금 통하네요. 종로서장인 내가 그래서 여기 상하이 까지 온 거 아닙니까. 애국 합시다. 이런 판국에 휴의 부대가 평양이나 경성에 도착해 시가전이 벌어지면 사태가 어찌 되겠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떨결에 손을 잡은 말수는 이 자의 손이 퍽이나 차다고 느꼈다. 작고 연약했다. 남자의 손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이런 손으로 고문하고 지지고 살을 찢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손을 놓으면서 말수는 그런 거라면 나보다 포목점 집 사장이 더 잘 알것이니 그 분을 만나라고 공을 넘겼다.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어 많은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는 핑계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환자는 여순 동생이 봐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보는 환자가 따로 있어요. 그는 여순 동생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그냥 참고 넘어갔다. 완용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체포해서 경찰서로 끌고 가지 않는 한 더 나올 것은 없었다.

그는 포목점 사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으나 그 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 자는 밀정에 이중 첩자이면서 능구렁이라서 한 두 시간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파학하기 어려웠다. 돌아간다던 하야시는 가지 않고 대기실에 그대로 있었다. 뭐 좀 얻어냈어요? 우리 조선사람은 대개는 착해요. 그렇지요. 그럼. 하야시가 말꼬리를 높였다.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내가 뭐라고 했소. 의사 부부는 용의점이 없다고. 우리 영사관이 조사한 것이 틀림없다며 하야시가 빈손이라고 말하는 완용을 타박했다. 그러나 말수를 만난 것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순을 본 것이고 여순을 통해 점례가 일본에 있다는 것과 그가 곧 파리로 떠난 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수의 입에서 나왔다. 말수 역시 죽마을 출신 동향의 움직임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는 듯 했다. 완용은 말수 부부가 이곳 상하이 병원을 넘기고 도쿄로 이전 한다는 것을 말을 들었으나 사실로 믿지는 않았다. 완용은 여기서 자신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 하지만 여순의 쌀쌀한 태도는 못내 아쉬웠다. 그럴수가 있나. 이게 무슨 망신인가. 상하이가 아니고 조선땅이라면 당장 체포해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어도 시원찮은 판국이다. 완용은 여순에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네 년이 의사라고 해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작전이 끝나면 작살을 내주마. 내가 고맙지 않은 모양이지. 공장에 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의사가 됐고 지금 잘살고 있다면 제일 먼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야지. 나쁜 년. 고작 한다는 것이 어디 아픈가요? 아프면 네가 치료해 줄게요. 공짜로. 이게 무슨 수작인가. 

그리고 점례도 그렇다. 자신의 소식을 알았으면 먼저 연락을 할 것이지.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 놀아. 좋아 한 번 본때를 보여주마. 완용은 언제나 여순과 점례를 한 묶음으로 놓았다. 물론 거기에 휴의도 끼어들었다. 자신도 거기에 포함됐다. 한 때 우리는 죽마을 사인방 아니었던가. 그러데 이제는 자신은 홀로 떨어져 나왔다. 삼총사를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완용을 씁씁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분노는 상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 그는 자신은 늘 그들에게 관대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못 알아주는 배신자였다. 조선에 있을 때 왜 나를 찾지 않았지. 점례야, 못 본척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다. 내부대신의 아들 빽으로 나를 좀 더 밀어줄 수 있잖아. 헌병대장을 시키든지. 하다 못해 그림 한 점이라도 줘야지. 미술대전에 특선을 하고 돈을 무더기로 벌어서는 뭐 어쩌자는 거야.

괜히 뒤를 쫏았어. 여순에게 한 것처럼 내가 완용 오빠다 하고 인사동 갤러리에서 나타날 걸. 괜히 폭파범 잡는다고 허둥대기만 했지, 내가 얻은 게 뭐냐고. 비록 내가 술수를 썼다고는 하지만 결과가 좋잖아. 그도 뻔하지. 공장 같다가 돈을 벌었고 우연히 내무대신의 아들을 만나 교류하다 같이 살고 유학을 가고 파리에서 화가로 인정받고. 난 뭐야, 죽쒀서 개줬나. 다들 나는 제쳐놓고 놈팽이 하나씩 차고서 나를 무시해. 이 종로서장을. 이런식으로 까지 완용의 생각이 미치자 그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갑시다. 난 바로 두만강으로. 그럼 나는 영사관으로. 완용과 하야시는 각자의 길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