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그도 살고 나도 살고 무엇보다 유마가 내곁에 있다
상태바
그도 살고 나도 살고 무엇보다 유마가 내곁에 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27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점례는 헐렁한 포대기 상태로 떠 있는 유령의 얼굴에 점을 찍었다. 몇 개의 점만으로 사람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연필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무수한 파편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 하늘을 덮고 잔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비명이 들렸다.

유마가 외쳤다. 살려줘, 나를 꺼내줘. 점례야 나를. 이 한마디로 모든 게 분명해 졌다. 점례는 벌떡 일어섰다. 그를 구해야 한다. 내 전부인 그를 살려야 한다. 그가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휘청거리는 몸을 끌고 점례는 거실로 나왔다. 무언가 몸에 부딪쳤다. 또다시 폭발인가. 점례는 머리를 만졌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엎드린 채로 울었다. 흐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점례는 알았다.

실수였다. 장소를 알려준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 악마가 그의 입을 빌린 것이다. 점례는 돌아와 떨어진 연필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아까 듣고 보았던 굉음과 파편과 먼지와 잔해와 그 아래 깔린 유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공이 흔들렸다. 사물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점례는 그림을 찢었다. 여러차례 찢은 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무언가 따뜻한 것이 몸을 감싸 안았다. 몸에서 나온 것은 따뜻했다. 눈물을 훔치자 창밖으로 스며든 해가 붓으로 얼굴을 간질이듯이 이리저리 자신을 매만졌다. 점례는 일어났다. 그리고 찢어진 스케치를 보았다.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갈가리 찢긴 것을 수습했다. 유마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나왔다. 준비합시다. 벽에 걸린 당신 그림을 보러 가자고. 어서 어서. 그가 박자에 맞춰 노래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새 일어나서 그렸어? 점례가 대답이 없자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그녀는 들고 있던 찢어진 스케치를 다시 탁자 위에 주섬주섬 올려 놓았다. 그래 마음에 안들면 그래야지. 그게 예술가야. 조선 도공들은 가마를 통째로 부서잖아. 그런 과정에서 걸작이 나와. 삼촌이 보여줬던 흰백자 당신도 알지?  그것이 저절로 나왔겠어? 그림도 마찬가지야. 찢은 숫자가 많을수록... 고맙네요. 이해해 주는 사람은 당신 뿐이죠. 그래 공치사는 나중에 하고 어서 준비해. 삼촌이 기다려. 아니, 당신 팬들이 어서 오라고 눈이 빠질 지경이야. 기자들은 목을 빼고 있어. 그만 재촉하고요. 당신은 그 차림으로 갈려고요? 서두르는 사람의 복장이 왜 그래요?

유마가 잠옷 차림을 내려다보더니 아차, 내 정신 좀 봐. 하고 급하게방으로 들어갔다. 못말려. 정신을 차린 점례는 치장에 오래 시간을 쓰지 않았다. 평범하고 수수한 차림새는 그녀를 순수함의 세계로 이끌었다. 악몽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점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점례로 돌아와 있었다. 복원력이 빨랐다. 점례는 그 점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동 갤러리는 외부 손님을 위해 내실을 거치지 않고 일 층에서 계단을 타고 삼층까지 올라가도록 설계됐다. 애초에 신축을 하면서 그 점을 고려했다. 

손님들도 편했다. 기자와 부지런한 화상 몇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삼촌은 분주했고 종로서 완용이 보낸 끄나풀들은 사전에 약속이 된 듯이 무난하게 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올라갔다가 내려 왔다가 간혹 그렇게 왕복을 하면서 전시회의 주인 노릇을 했다. 좁은 계단이라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손님들과 완용의 부하들과 삼촌은 이제 아는 사이가 됐다. 처음보는 사람이 오는 삼촌과 완용의 부하들은 알게 모르게 눈짓을 했다.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이 휴의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점례가 휴의와 내통하고 있다면 오늘 갤러리 초대 손님 가운데 녀석이 올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암호로 연락을 주고받을지도 몰랐고 그 점을 완용의 부하들은 눈여겨 봐야 했다. 

유마와 점례가 도착했다. 어느 새 갤러리를 가득 채운 백 여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운래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거야. 삼촌이 한 마디 하자 모여있던 사람들이 박수로 환호했다. 점례는 설명했다. 메인 그림 앞에선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 그들 가운데 샤갈의 그림을 본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살거나 다니러 온 일본인이었으나 서양 예술에 밝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도판을 통해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화상 가운데 하나가 마치 조선의 샤갈이 탄생한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점례는 그런 말에도 이미 대답할 준비가 되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러시아 작가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서 보니 그가 먼저 그렸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소재와 내용이 아주 달라요. 말하자면 모방에서 창조를 한 거지. 삼촌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떤 작품도 모방 없는 것은 없어요. 점례가 말을 이으면서 고맙다는 뜻으로 삼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가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녀는 주인답게 거침이 없었다. 목포에서 왔다는 한 화랑이 그 그림을 적극 관심을 보였다. 얼마면 팔겠소? 호탕하게 거액을 제시했다. 그리고는 다른 그림도 그렇게 할 의향이 있다는 듯이 옆 그림을 손가락질 하면서 그에 못지 않다고 같이 온 동행에게 말했다. 

아이구 선생님, 그런 말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하시지요. 어쨌든 일단 선생님이 찜한 것으로 정해 놓겠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조선에 있기 아까운 그림입니다. 본국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하지요. 도쿄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면 볼 만 할 겁니다. 그럼요, 그럼요. 목포 상인의 입은 이미 침이 말랐다. 위에 있는 저분은 그런데 누구이신지? 그가 원래 점찍은 그림으로 다시 돌아와 점례의 목마를 탄 별이 네개 그려진 대장복을 입은 일본군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 참 내가 소개를 안 했군요. 그림의 인물은 실존합니다. 정말로. 거창한 사람이지요. 실제 태평양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고요. 부상으로 전역한 예비역 장성 입니다. 유마 호사카, 이리와요. 내 자랑스런 조카입니다. 여러분 잠시 여기로 모여 보세요. 삼촌이 갤러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바로 본국 내무대신의 외아들입니다. 장차 수상이 되실 분의 자제분이시지요. 총독님이 가장 아끼시는 분이시고요. 내 조카라는 사실은 팁입니다. 유마가 가볍게 목례했다. 아예 정식으로 소개할까요? 대단한 남자를 목마 태운 여성이 조선 제일의 미녀, 즉 그림의 주인공 점례 마사코입니다. 마사코 이리와요. 삼촌이 이번에는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심스럽게 점례가 유마 옆에 섰다. 따로 인사할 기회가 있을 테지만 지금 모인 김에 소개한 겁니다.

삼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또 박수를쳤다. 일부는 감히 내부대신의 아들과 한자리에 있다는 영광 때문인지 아까보다도 더 조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얼굴에는 아부하는 그림자가 덧칠한 상태로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그들을 그림을 보면서도 힐끗힐끗 유마를 보고 또 그 눈으로 점례를 보았다.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옷은 또 얼마나 세련되게 입었는지. 점례의 모자는 그 자리에서도 빛이 났다. 사람들은 그 얼굴에 맞는 그 모자라는 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그림은 여러 점이 팔렸다. 목포 화상외에도 대구에서 온 화랑 주인이 여덟점을 점을 구입했다. 이같은 추세라면 남은 것도 오늘 중으로 다 팔릴 것으로 보인다.

삼촌은 구체적으로 가격을 제시하지 않았다. 가격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 누가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후들어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바람잡이 역할을 한 목포에서 온 거상의 역할이 컸다. 그는 상상 이상의 가격대를 옆 사람이 들으라는 듯이 흘렸다. 사 놓기만 하면 일 년 안에 서너 배는 더 뛴다는 말도 했다. 그와 동행이 아닌 듯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은 한 패였다. 모두 종로서 형사인 그들은 미리 삼촌과 짜고 가격을 올리려는 흥정을 벌였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번잡한 틈에서 범인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용의 부하들은 눈이 빨랐다.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은 수상한 자를 발견하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휴의는 망설였다. 점례가 오라고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갤러리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점례는 약속 장소가 바뀔지 모른다면서 그때 오면 정확한 일정을 말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덕영산장 말고 다른 만찬장을 휴의는 생각하지 않았다. 장소를 바꿀 이유가 없었고 굳이 안전이 염려된다면 병력을 깔면 될 것이다. 그들은 폭약설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새나가지 않은 것을 휴의는 확신했다. 더구나 시한폭탄에 의한 폭파에 대한 대비에 적들은 전무한 상태다. 수류탄 투척 거리 이내나 유효 사거리 내에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천장에 폭약이 설치됐을 거로는 예상밖의 일이다. 그런 시도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방비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덕영산장은 높은 곳에 있어 아래를 내려다보기에 좋다. 뒤는 산이다. 산은 이미 헌병대가 접수했을 터. 이보다 더 경호하기 좋은데가 없는데 굳이 장소를 변경한다고. 점례가 거짓말을 했나. 휴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대원 하나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지 마시고 같이 고민하면 풀릴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했다. 휴의는 비밀로 하려다 말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장소가 바뀌면 어쩌지? 하고 정말로 의견을 묻듯이 물었다. 그럴리 가요. 초청받은 당사자한테 직접 들었는데 틀릴 리가 있나요? 그것도 바로 사흘 전에 받았잖아요. 그러게. 내말이 그 말이야. 휴의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반신반의했다. 그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대원들에게 흩어져 있으라 명령했다. 저녁에 다시 여기서 만나자. 어딘지 모르지만 아무튼 잘 다녀오세요. 언제나 거사 전날이 문제가 되니 몸조심하시고요.

휴의는 광화문을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거리에는 점례의 귀국과 조선 일등 여류화가의 전시회 일정이 담긴 플랑카드가 걸려 있었다. 휴의는 그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플랑카드가 바람 때문에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발길을 돌리라는 신호인가. 하지만 휴의가 다른 곳으로 갈 리는 없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구부정한 허리는 똑바로 펴져 있었으나 흰 머리는 그대로여서 청년이 아닌 중년의 나이였다. 씨앗호떡을 파는 상인 앞에서 휴의는 하나를 주문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지나는 행인들이 제법 있었다. 지게를 진 사람은 나무의 무게 때문인지 등을 새우처럼 하고는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도 행인들을 용케도 피해갔다.

대각선으로 점례의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또 일부는 나왔다. 일반에게 무료 개방이어서 그런지 호기심 있는 사람은 가다가 뒤돌아서 프랑스 유학파 마사코 무료 전시회 푯말을 보고 올라가기도 했다. 심지어 장사꾼 차림의 허름한 사람도 있었는데 쫓겨날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호떡을 다 먹고 나서도 휴의가 올라간 계단으로 허름한 사람은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휴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골목길에서 한 사나이가 휴의에게 다가왔다. 둘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밀정은 그 전에 휴의를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걸으면서 곁눈질로 자꾸 쳐다봤다. 인상을 확인하려는 동작이었다. 갤러리 앞에서 휴의는 올라가는 그를 보고는 성급히 몸을 돌려 파고다 공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계속 그 길을 가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낙원상가에 들어가 떡을 사 먹고 다시 나와 청량리 쪽으로 갔다가 길을 건너 다시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삼 십 분이 흘렀다. 아까 만났던 밀정이 저 쪽에서 모자를 벗었다 다시 썼다. 인파 속에서 그 행동은 휴의의 눈에 띄었다. 점례를 만나 보았는가? 봤어요. 미인이대요. 유마인가 하는 사람도 잘생겼어요. 부상당했다는데 어디를 다쳤는지 모를만큼 멀쩡하대요. 둘은 마주보고 웃고 농담하고 잘 어울려요. 그말을 듣고 휴의가 인상을 찌뿌렸다. 그것 보라고 간 것 아니잖아요. 장소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어요. 갤러리 사장이 말하데요. 거기 있는 사람 다 들었어요. 내일 총독이 만찬을 연다고요. 언덕 위에서. 그 말을 듣고 바로 나왔지요. 여류 화가하고는 한 마디도 말을 섞지 않았어요.

휴의가 보냈어요. 장소 변경됐나요? 이렇게 딱 두 마디 물으라고 하셨지요? 안 물어보길 잘했어요.사내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어서 여기를 뜨세요. 이 말을 하고 휴의는 종로 삼가에서 광교통으로 발길을 돌렸다. 삼촌이라면 알만하다. 언덕 위라면 덕영산장이 틀림없다. 헌병대 사령부도 남산 언덕위에 있지만 거기는 아니다. 왜 이런 확신이 섰는지 모르지만 휴의는 사전 답사한 덕영산장과 그 옆에 있는 99칸 한옥을 보고 생각을 굳혔다. 

헌병대사령부는 총독 관저에서 멀기도 하고 굳이 거기까지 나들이할 필요가 없다. 휴의는 확신했다. 점례를 못 만 난건 아쉽다. 그러나 그와 나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둘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 지금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도 아니다. 그런데. 휴의는 점례가 과연 그 시각에 덕영산장에 올지 어떨지 그것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 총독의 초대인데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시간도 그렇다. 그렇다면 점례도 죽는다. 내 손으로 점례를 죽인다. 그녀를 죽일 만큼 내 임무가 크고 막중한가? 대의가 내 사랑보다 큰가? 조선독립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독립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휴의는 그런 원초적인 질문을 되풀이했다. 수없이 했던 질문을 또 하고 또한다. 확신할 수 없는 마음. 그는 흔들렸다. 대사를 앞두고 바람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마다 이런 노래가 귀에 들렸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여,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첫 구절이 계속 맴돌았고 그것은 어느새 입안으로 들어와 사탕처럼 녹아들었다. 달콤했다. 나는 신대한국 독립군이다. 그것도 대장이다. 나는 조국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 누구나 소망하는 행복과 사랑이 있어. 그것을 네게서 뺏지 않으마. 너는 말했지. 아무도, 그 누구도, 신이라고 할지라도 두 손에 움켜쥔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고.내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요. 오빠, 나를 놔줘요. 떠돌이 삶은 이제 없어요. 내 몸속에는 아이가 있다고요. 그이와 나의 아기. 핏속에, 내 내면에 그것이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내 인생에 껌딱지처럼 눌러붙은 고통이 쾌락으로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너는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됐어. 대우는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아야지. 점례의 삶에서 고통은 없어. 짓누르는 그 어떤 것도 사라졌어. 내가 걸림돌이라고? 천만에. 난 너의 행복을 빌어 줄거야. 죽는 그 순간까지 말이야. 그나저나 어쩌나. 그녀의 죽음을 확신하는 내가 그녀의 행복을 빌다니. 안돼.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내가 단순히 권총으로 저격하는 줄 알겠지. 그거 아냐. 바보야. 폭탄이야. 시한폭탄. 천장에서 총알 수백 개 아니 수천 개가 우수수 떨어져. 살아 나올 사람 아무도 없어. 너도 너와 함께 있는 남자도 총독도 그 누구도 생명을 이을 수 없어.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야. 닥쳐올 결과물은 뻔해. 시체들, 피묻은 시체들. 사지가 찢기고 또 찢겨 신이라도 다시 모을 수 없는 몸뚱아리들, 끝없는 비명. 죽음으로 날 데려가라고 살아 있는 자들이 외침. 난 알아.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런 광경을 그리면서 휴의는 광교 통을 지났다. 무교동으로 접어들었고 남산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게딱지 같은 건물이라고 하기도 뭐한 초가들 사이로 웅장한 건물이 들어왔다. 뾰족한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았다. 대리석이 하얀 대리석 돌이 조선을 찍어 누르고 있다. 그 뒤의 광화문은 초라했다. 그것마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저기 살고있는 저 대단한 집의 주인, 그래 조선 총독이지. 네 운명도 내일이면 끝장이다. 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지.

휴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믿기지 않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새로움을 향해 덤벼들자. 그나저나 점례는 어쩌지. 그는 점례의 죽음만은 상상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그를 죽일 수는 없다. 다음날 오후 주모는 여러 차례 광주리를 이고 덕영산장을 들락거렸다. 돼지 머리도 있고 소 다리도 있고 각종 야채도 있다. 헌병들은 그녀를 누구냐고 한 번 불러세웠다. 식당 총지배인. 내일 만찬 준비를 위한 음식이라고 말할 때 주모는 떳떳했다. 헌병은 그녀는 누구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주모는 그 전에도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휴의는 대원들과 이불을 덮어 쓰도 다시 신대한국의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고 부르고 또 불렀다. 숨 막혀요.또 한 번 신대한국의 독립군의 백만 용사여!가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자 대원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그려 그만하자.후 나도 숨이 막힌다. 휴의가 대원처럼 이불에서 고개를 빼고 대답했다. 새벽 세 시다. 날래게 움직이자. 폭약 위치는 확인했다. 산을 타고 내려가자. 그러러면 자정에 움직이자. 인왕산을 타고 가자. 수성동 계곡 쯤에 병력이 있을지도 몰라. 가볍게 따돌리자. 셋은 흩어져서는 안 된다. 뭉쳐 다녀야 해. 담장을 훌쩍 타고 올라가서 지붕에 납작 엎드리자. 정오에 타이머를 맞추고 올라갔던 역순으로 내려온다. 오케이.

점례는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휴의는 오지 않았다. 그의 대리인으로 의심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대체 그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분명히 장소 변경이 있을지 모르니 갤러리에 참석하라고 했고 그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잡혔나. 잡혔다면 뉴스가 나오겠지. 겁이 났나. 어디 숨어서 망을 보고 있나. 점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온다. 현장을 확인하는 살인자처럼. 다만 언제 오느냐, 어떤 차림으로 오느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실내에서 체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소란스럽다. 어떤 돌발행동이 벌어질 줄 모른다. 점례가 까무러치는 모습도 근사할 것이다. 그것을 보는 유마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질 것이다. 허나 그 과정에서 유마가 이 사람은 내가 이 사람 아는 사람이오? 한다면 일이 어찌될까.

사람 잘못봤다고 되레 야단이나 맞지 않을까. 점례가 우리 동업자라고 하거나 파리 동료라고 나선다면. 거기에 둘러 댈 핑계를 완용은 찾지 못했다. 한 패거리는 아니겠지? 설마. 점례는 몰라도 유마는 아냐. 대일본 제국의 장군이며 내무대신의 아들이 조선독립군을 변호할리 없어. 완용은 자신이 직접 갤러리를 방문하고는 휴의와 마주치면 어떤식으로 체포할지 방법을 모색했다.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혹은 멀찍이서 이곳을 향해 걸어 올 때 뒤에서 덮치는 방법이 좋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을 실토 받은 후 삼촌에게 통보한다. 그러면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된다.

그것을 노리고 완용은 이미 갤러리에 잠입한 부하말고도 사복형사 이십여 명을 갤러리 주변에 깔았다. 이번에는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와야 한다. 덫에 거려들 때가 됐다. 어디 쯤 오고 있나. 시간은 저녁으로 넘어 간다. 갤러리가 문을 닫기 직전이다. 불길한 예감이 완용을 감싸고 돌았다. 아까 호떡을 호호 불며 먹던 그 촌놈이 혹시? 아닐 것이다. 대로에서 그것도 은폐물도 없는 곳에서 휴의같은 거물이 쉽게 자신을 노출할리 없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자가 그 자인가. 둘이 만나서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다. 완용은 들어간 그 자가 휴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오면 바로 체포하기 위해 날랜 대원 10여명을 갤러리 맞은 편에 대기 시켜 놓았다.

틀림없다. 그런데 들어가는 했으나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갔다가 한 시간이나 길어도 두 시간 안에는 나왔다. 그런데 세시간이 지나도 호빵맨과 함께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놓쳤다. 완용은 또한 번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혹시 건물 뒤에서 드나 드는 통로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봐야 한다. 이틀전에 꼼꼼히 봤을 때는 모두 벽이었다. 혹시나 해서 그는 갤러리로 다시 들어가면서 사방을 살폈다. 역시나 빠져 나올 구멍은 없다. 완용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외부 통로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체면이 많이 구겨졌다. 삼촌을 보는 것도 그렇고 점례와 마주치기도 싫었다. 유마를 볼 면목도 없다. 휴의를 잡으랬더니 한가하게 그림 구경이나 하러 왔느냐는 삼촌의 핀잔을 들을 수 있다.

이래 저래 완용은 심사가 뒤틀렸다. 확인해 보니 삼층 갤러리는 모두 벽으로 차단됐다. 창문도 커튼으로 닫혀 있다. 외부의 빛 때문에 그림 감상이 지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파는 여전히 북적였다. 사방은 온통 하얀 벽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용은 화장실에 들렀다. 겨우 사람 하나 빠져 나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눈에 띄었다. 그는 청소용 의자에 올라타서 아래를 보았다. 여기 였구나. 창문 너머는 바로 옆집의 지붕으로 이어졌는데 높이는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몸을 내밀면서 떨어지면 그대로 지붕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다. 놓쳤다. 그는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여기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완용의 출현도 모른 체 점례는 안절부절 했다. 언제 올까. 왔다 갔을까. 아니다. 그가 아무리 변장을 해도 내 눈을 속일수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직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일이 틀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안 온 것은 분명하다.  휴의는 오지 않을 것이다. 헌병대사령부로 장소가 변경됐어요. 수도 없이 입속에서 외웠던 말을 써먹을 수가 없다. 아니 휴의를 확인하고 나서 그 말을 뱉을지 삼킬지 그때 가서 결정하기로 한 것도 소용없는 일이 되버렸다.

이제 결정의 고민은 사라졌다. 그런데 점례는 그것이 더 불안했다. 내일이다. 유마가 죽는다. 나도 죽고 아이도 죽는다. 피할 수 없다. 어떤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식은땀이 난다. 뱃속에서는 부글부글 끊는 소리가 들린다. 발길질 하는 모양새다. 건강하게 잘 크고 있구나. 아냐, 아냐 속단하지 말자. 아이는 없어. 난 엄마 자격이 없고 아이를 키울 만큼 건강하지 못해. 상상임신일 뿐이야. 발로 차는 것도 다 꾸며낸 거야. 점례는 혼동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삼촌은 대만족 했다. 그는 완용과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고 오로지 완판한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점례는 대단한 인물이다. 까미유 클로델을 능가한다. 어떤 여류화가보다도 뛰어나다. 그러니 조카가 꼼짝 못하지. 그가 휴의와 내통하든 말든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 맞다. 일본의 자산인 동시에 세계의 유산이다. 삼촌은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화랑에 걸어 둘 대표 그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이리도 자연스러운가. 모자를 씌워주고 넥타이를 매주는 장면은 사랑 그 자체였다. 사랑을 표현한 어떤 그림보다도 더 확실하고 뚜렷했다. 여기 걸어두기는 아까워. 도쿄로 가져가자. 교과서에도 실어야지. 내무대신 형이 문무상에게 전화 한통 하면 될일이야. 손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목포 화상과 대구 갤러리 사장 등 몇몇이 삼촌과 저녁식사를 위해 약속 장소로 떠났다. 시장통 처럼 북적이던 삼촌의 가게는 텅 비었다. 

자고 가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유마와 점례는 호텔로 돌아왔다. 유마는 점례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침에 못 일어날 거같아요. 내 몸은 내가 알거든요. 삼촌 집에서는 그게 안돼요. 밤 새 못자고 아침도 못잔다면 총독 만찬에서 저는 쓰러질지 몰라요. 둘이 있는 시간에 점례는 유마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그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해 하시겠지만 어쩌겠어. 당신이 더 중요하지. 삼촌은 내가 설득해 볼게. 호텔에 도착하자 점례는 자신의 몸이 양초처럼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뜨거운 불을 이겨내지 못한 밀납처럼 점례의 몸이 축 늘어졌다. 머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몸통과 다리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까무라치기 일보 직전에서 점례는 침대에 누었다. 그는 유마를 의식하지 못했다. 마치 시체처럼 눈이 감겨 있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아침을 맞았다. 억지로 눈을 떠야만 했다. 두 손으로 감긴 눈을 펼치는 시늉을 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일곱시 였다.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빠져 나왔다. 목욕을 했다. 따뜻한 물이 고마웠다. 몸은 다시 생기를 찾았다. 몇 시간을 잔 거야. 도대체. 점례는 중얼 거리면서 커피물을 끊였다. 향이 좋은 원두에서 나오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뜨거운 것이 몸에 들어가자 점례의 몸은 원상회복 됐다. 복원력이 좋아. 이게 내 장점이고.

억지로라도 기분을 업 시키자고 의식을 모으자 정말로 신바람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런 말짱한 정신이라면 오늘 일은 무사히 치를 거야. 그렇지, 정리해 보자. 11시 조금 넘어서 호텔을 나간다. 대기하고 있는 차를 타고 덕영산장으로 향한다. 30분 후 쯤 정문에 도착한다.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자. 1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해야 한다. 총독을 만난다. 이런 저런 안부 인사를 나누다 보면 정오다. 한옥으로 이동해 식사를 한다. 하지만, 누군가 총을 쏜다. 수류탄을 던진다. 아수라장이다. 유마가 맞는다. 피를 흘린다. 점례야 살려줘, 그가 외치면서 숨이 멎는다. 점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아니다. 그런 계획은 없다. 공격이 있을 거라고 말해야 한다. 약속 장소를 변경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휴의는, 그러면 휴의는. 그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체포된 그는 고문 끝에 나와의 관계를 털어 놓는다. 나는 호소한다. 죽이지 말고 추방해요. 돌아올 수 없는 아프리카로 보내요. 유마는 외면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다 휴의는 매질독으로 사망한다. 아니 교수형에 처해져 대롱대롱 나무에 매달린다. 광화문 광장에 걸린 시체를 시민들이 보고 침을 뱉는다. 

그가 죽기 위해 나가는 모습을 옆방에 있는 내가 보고 통곡한다. 나는 이곳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감히 천황의 시혜를 받고도 첩자와 놀아났다는 죄목이다. 점례의 손이 떨렸다. 수전증을 앓는 환자처럼 잔을 잡은 손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출렁인다. 그러더니 넘쳐서 식탁으로 떨어진다. 스케치 북에 검은 물이 번진다. 피다. 검은 피가 흐른다. 아기가 다시 발길질을 한다. 배가 아플정도로 차고 있다. 힘이 센 녀석이다. 나 잘 크고 있어요. 엄마. 조금만 기다려요. 곧 세상으로 나가 엄마품에 안길게요. 진짜같다. 아니 진짜로 차고 있다. 

그때 점례의 머리에 번개와 같은 생각이 스쳤다. 통증이다. 병원행이다. 도착 직후 까무러 친다. 그러지 말라는대도 유마가 따라온다. 총독은 기다리다 내무대신의 아들 대신 폭탄을 손님으로 맞는다. 그와 장관들이 사망한다. 작전은 성공했다. 휴의는 무사히 조선을 빠져나간다. 상하이는 축제 분위기다. 조선독립을 미리 축하한다. 잘 됐다. 휴의도 살고 나도 살았다. 무엇보다 유마가 여전히 내곁에 있다.

기분좋은 기지개 소리가 들린다. 유마도 눈을 떴다. 일어났다. 어께를 힘차게 편다. 그가 기분이 좋다. 점례는 아니다. 여전히 남은 무엇이 있다. 몸은 복원됐어도 마음은 아직 덜 된다. 풍선에 바람이 더 들어가야 한다. 어제 일이 아무일 없이 지나간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종로서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길래 휴의하나 체포하지 못하는가. 전시회에는 분명 그림과는 상관없는 수상한 자들이 들락거렸다. 거기에 분명 휴의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근처를 배회했을 것이 분명하다. 삼촌은 당장 완용을 체포하라고 헌병대에 연락해야 맞다. 옷을 벗겨 감옥에 처 넣어 분풀이를 해야 한다. 어쩌자고 삼촌은 머뭇거리고 있는가. 비싼 값에 그림이 팔려 마음이 갑자기 너그러워졌나. 

다시 이불속으로 유마가 파고든다.  그의 심장이 크게 울렁거린다. 점례의 체온은 없다. 어디로 갔나. 꿍꿍이를 펴려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왔나. 마사코는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의심한 적이 없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든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생각은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확인해 보자. 물어볼 수는 있다. 그냥 질러보자. 사랑하느냐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신 설마 나를 못 믿는 건 아니죠? 내가 무슨 대답을 할까. 이렇게 나오면 나만 못난 남자가 된다. 확인할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래 맞다. 그거다. 장소와 시간을 말해줬다. 총독도 위험하지만 총독 맞은 편에 앉은 나도 위험하다.

내 위험을 그녀가 방치하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휴의가 뭔가 하는 그 조센징을 사랑하는 것이 맞다. 기다려 보자. 서너 시간 후면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것이다. 그녀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옷을 입고 약속 시간에 맞춰 덕영산장에 도착하면 나는 그를 버려야 한다. 총독이 도착했으면 빼내야 하고 오고 있다면 차를 돌리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점례는? 나를 배신한 점례는? 유마는 완용에게서 받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손에 익었다. 전선에서 사용한 그것과 동일한 기종이다. 39구경 리볼버. 내 손으로 처치하자. 그것이 속시원하다.

한 때 사랑했고 누구보다 그의 예술성을 존중했으니 최후는 내 손으로 하자.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죽는 것을 점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총구를 보는 순간 점례는 자신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는 체념할 것이다. 나를 쏘세요. 나는 당신을 배신했어요. 부모 같은 은혜를 준 당신을 저버린 나는 죽어 마땅해요. 삼촌은 나에게 다 말해버렸다. 오늘 전시회 현장에서 휴의를 체포하겠다고. 그런데 뭐야. 이건 아무일도 없잖아. 삼촌도 또 말했다. 내일 총독 만찬에 그자가 나타날 것이다. 폭약을 장치했어. 총이 아냐. 수류탄도 아니고. 다이너마이크가 천장에서 터질거야. 당치 않은 말이다. 꿈인가. 아니면 완용이 흘린 거짓정보에 삼촌이 놀아나고 있나. 

유마는 권총을 다시 침대 옆 서랍에 넣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당신 일어났어요? 기분 어때요? 식사해야지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점례는 이렇게 물었다. 어 천천히 해, 하나씩. 첫 번째 질문이 뭐였지? 일어났느냐고. 보시다시피. 기분은 매우 좋고. 굿모닝이다. 다음은 뭐였지? 어, 식사? 당근. 체력 보충은 든든한 아침에서 오거든. 그래요. 대충 씻고 내려가요. 오케이. 유마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점례는 아팠다. 아니 아프려고 했다. 아파야 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유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점례와 마주쳤다.

어디 아픈 거야? 왜그래? 그러게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런데 조금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열도 있는 거 같고요. 점례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어디 봐. 아이 걱정 없어요. 그러지 말고 이리와 봐. 마지못해 점례가 유마 앞에 끌려가듯이 멈춰섰다. 숨이 꽉 막혔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이 이마를 만졌다. 따스했다. 가만, 가만히 있어.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아니 조금 있긴 한데 심하지 않다는 말이지. 조심하지 않고선. 책망하듯이 그가 말했다. 오늘 총독 오찬에는 당신은 빠지면 어때? 그러면서 그는 슬쩍 점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작은 단서라도 찾는 형사처럼 그는 미묘한 점례의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럴 순 없어요. 겨우 이것 가지고 빠지다니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가야지요. 심해지면 어쩌려고? 나를 봐요. 내가 그렇게 허약해 보이나요? 점례가 운동선수처럼 팔을 안으로 구부리면서 알통을 내보였다. 알았어. 당신 고집은 누구도 못 꺾지. 얼마나 남았나?

길어야 두 시간. 점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마도 시계를 보았다. 아직도 그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점례가 가겠다고 한 것은 그를 위해 좋은 징조였다. 만약 혼자 가라고 내버려 뒀다면 유마는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나를 사지로 모는구나. 저는 빠지고.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여보, 그런데 말이에요. 아니에요. 어, 무슨 말인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그런 속담도 아세요? 당신은 날 보면 알아요. 내가 오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아픈지 안아픈지. 고마워요. 속담이라. 이런 상황에 어떤 속담을 써야 하나. 서당개 삼면이면 풍월을 한다. 정말 당신은 못 말려요. 그보다는 사자성어가 어울리겠어요. 이심전심? 유마가 먼저 말했다. 딩동댕. 

그 말을 하고 점례가 다시 인상을 썼다. 아랫배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해야 한다. 이상한 것이 맞다. 유마의 눈이 매섭게 움직였다. 그러면 그렇지. 빠져나가려는 구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지난번에 한 번 말했던가요.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에요. 그러게 그때 병원에 가 봤어야지. 가보자고 했잖아. 지금이라고 가보자. 상상 임신이 아닐 수도 있고. 아닐 거예요.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뿐이에요. 총독 만찬 끝나고 병원에 가볼까요? 점례가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가보겠다고 나섰다. 나야 좋지. 당신 몸이 우선이니까. 그러면 이따 상황봐서 결정해요. 

그럴 즈음 완용은 덕영산장 일대를 철저히 수색하고 있었다. 폭파 전문가이니만큼 그가 장소와 시간을 안다면 미리 폭탄을 설치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부하가 못 미더워 자신이 직접 실내를 점검했다. 건물의 내부는 물론 화장실이나 계단 복도 아래까지 꼼꼼히 살폈다. 심지어 천장까지도 사다리를 놓고 조사했다. 의심살 만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주변의 길목까지도 살폈다. 차가 올라오는 길목의 가옥에 대한 수색도 했다. 집마다 사복 경찰을 대기 시켰다. 99칸은? 첩이 사진 그집? 완용은 첩이라고 생각하면서 침을 뱉었다. 신하된 놈이 왕보다 더 땅이 많아. 그 놈은 천벌을 받을거야. 못된 친일 매국노놈. 완용이 이렇게 지껄였다. 누가 보면 참으로 가관이 따로없다. 

완용은 부하들을 닥달했다. 저기도 가봐라. 아니 됐다. 거긴 내가 들어가마. 완용은 첩의 곱상한 얼굴을 떠올리면 대체 어떤 상판대기길래 첩으로 낙점받았을까 궁금해했다. 완용이 발을 들여 놓자 안에서 벌써 시끈벅적했다. 헌병대사령부 요원들이 점검에 나서고 있었다. 완용이 손방망이를 앞으로 내밀면서 고생이 많소하고 아는체를 했다. 사령관님의 특별지시가 내렸어요. 잘하고 있소. 그럼 우리 종로서는 산장 위주로 병력을 배치합니다. 수고들 하시오. 이처럼 경계가 삼엄한 적이 있었던가. 휴의 아니라 휴의가 백 명이 온다고 해도 뚫을 수 없다. 그러나 완용은 뭔가 뚫린 듯한 기분 나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는 발을 굴렀다. 이 느낌은 뭐지? 안 좋은 느낌. 휴의에게 내가 당하나. 그가 제아무리 미군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은 특수 전문가라고 해도 폭탄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설치할 수 없으면 이 또한 쓸모가 없다. 한옥을 나오는 그는 다시 한번 병력을 동원해 프랑스 풍 건물 내부를 샅샅이 훓었다. 훈련된 사냥개를 동원하기도 했다. 서너 마리의 군견은 헌병대사령부에서 차출됐다. 사령관은 흔쾌히 종로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총독은 물론 자신의 안전도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도 초청 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혀를 길게 뻗고 헉헉대는 독일제 세퍼드를 데리고 냄새를 맡고 있을 때 완용은 멀찍이서 건물을 바라봤다. 내가 휴의라면, 내가 폭파 전문가라면 어디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할지 가늠해 보았다. 실내다. 실내보다 더 살상능력을 극대화시킬 장소는 없다. 천장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심지어 종이를 뜯어 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것 아닌가. 무사히 만찬이 끝나면 이제 내 시간이다. 점례나 유마도 조선에서 편한 일정을 보낼 것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에 호사카는 궁궐을 가보고 싶어했다. 창경원이나 덕수궁 정도는 안내할 수 있다. 휴의를 잡는 프로그램은 잠시 멈추자. 멈추면 보일지도 모르지. 그 사이 나도 좀 쉬자. 남산도 올라야지. 완용은 벌써부터 호사카의 조선 여행 일정을 짜고 있었다. 일부러 신문에도 내야지. 휴의가 보고 걸려 들 수 있도록 덫을 놓는 거지.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주마. 껍질을 벗겨 냄새 좋은 가죽을 만들겠다. 가방을 만들어 그것을 점례에게 선물로 주겠다.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을 때 완용은 저쪽에서 총독 일행이 탄 차가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총독이 먼저 오는군. 그렇지. 내무 대신의 아들이 나와서 영접할까. 그는 부하들에게 건물 입구에서 양쪽으로 도열해 있을 것을 지시했다. 그 시각 점례가 탈 차도 호텔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뒷자석에서 팔짱을 끼고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점례는 팔짱 낀 손을 풀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이다. 배가 아파야 한다. 현기증이 와야 한다. 마비가 온다. 그렇다. 이런 상태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쓰러진다. 호카사가 옆에서 부축한다. 여보, 비서가 나 대신 병원으로 함께 갈 거야. 난 총독에게 인사나 하고 바로 갈게. 아니에요. 당신이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차 안에서 죽어도 당신과 함께 있을 겁니다. 고집부리지 마. 그런다고 될 일이 아냐. 이건 고집이 아니에요. 여기서 헤어지면 당신과 영영 이별입니다.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해요.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요.

점례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준비한 것처럼 코에서 두줄기의 코피가 나온다. 일부러 피가 번지게 누르는 척 하면서 손으로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피다, 피야. 여보 피를 흘리고 있어. 유마가 소리친다. 운전수 긴급 상황이다. 경성의전으로 돌려라. 그리고 총독에게는 점례 마사코가 아파서 후송됐다고 전해라. 점례는 호사카의 팔을 세게 잡았다. 마치 자신의 손을 풀고 그가 떠나려는 것을 제지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병원으로, 빨리 병원으로. 유마 호사카가 안절부절못했다. 총독의 일정은 까마득히 잊은 듯 했다. 무슨 일이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전쟁터에서도, 파리에서도 그녀는 강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이순간에 왜? 우연일 수 있다. 맞아. 그녀는 아침부터 아팠다. 배가 아프고 현기증이 인다고 했다. 미열도 있다. 임신인가. 아니면 하혈인가. 아기에 문제가 생겼나. 호사카는 차가 원남동으로 향해 갈 때까지 이 생각 주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뭐가 문제지. 점례는 신음도 간신히 했다. 그의 품에 안겨서 마치 발작난 아기처럼 헐떡였다. 말은 나오지 않고 몸은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들떴다. 그러나 이제 안심이다. 안심해. 내가 있어. 그녀는 겨우 물었다. 여보, 몇 시에요? 10분 전이야. 11시 50분요? 그래. 가만히 있어. 병원에 다 왔어. 시간이 뭐가 중요해? 당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유마가 잘라말했다. 

점례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것을 그 순간 느꼈다. 파란 하늘을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고통은 사라졌다. 그를 살렸다. 아이도 살았다. 죽마을 모래사장을 달린다. 장난삼아 쌓은 모래성에서 급하게 손을 뺐다. 파도가 밀려온다. 그때까지 버티던 모래성은 점차 허물어진다. 다시 모래성을 쌓는다. 쌓고 또 쌓는다. 파도가 밀려오고 성이 무너진다. 그때 휴의의 손이 막아선다. 모래 사이로 손이 겹쳐진다. 그 순간 가시에 찔린 것처럼 불쾌하다. 난 네가 싫어. 그러니 이제 오지마. 그 손 치워. 차가워. 여보 무슨 말이야. 호사카가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헛소리를 했나봐요. 몸이 떨려요. 정신차려.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차리면 살 수 있어. 안그래? 이 와중에도 호사카는 속담을 끌어다 댔다. 총독의 일은 다 잊었다. 점례가 아파서 누워 있자 오로지 점례의 건강만이 걱정됐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그래, 내 본성이 이렇다고.

그때 의사가 왔다. 흰 가운을 입고 검은 줄이 달린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다. 어울리는군. 목걸이로 해도 되겠어. 여자라면 어울릴 거야. 손에 차트를 든 간호사가 뒤따라왔다. 보조가 필요하지. 혼자서는 못하지. 더구나 권위를 세우려면 말이야. 그런데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해열제 정도는 내놓을 수 있겠지. 임신 여부도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호사카는 병실 의자에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대자 자신도 어딘가 아팠다. 어디지?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났는데 정확히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어디지? 여긴가? 그는 손으로 머리부터 집어 내려왔다. 이마 눈 코 입 그리고 목과 어깨 가슴 배 다리, 어디지? 그러다가 호사카는 두근거리는 심장에서 자신의 생각이 멈춘 것을 알았다.

그래, 아픈 곳이 여기야. 여기 조선 땅이라고. 어서 조선을 떠나고 싶다. 여기 와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국밥을 먹은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어서 떠나자. 파리로 가자. 그림은 삼촌이 팔았고. 휴의를 미끼로 쓴다고. 그래서 잡았어? 잡았으냐고. 내 참 어이없군. 이제 거기라면 아플 이유가 없다. 아픈 곳을 알았으니 치유도 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점례가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조선을 떠나자. 총독을 만나는 일도 삼촌이 파는 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싹 가셨다. 그래, 다 가져. 조선땅에 난 미련없어. 파리로 가는거야. 차라리 잘 됐어. 총독을 만나 억지웃음을 팔지 않아도 되니. 이런 걸 예상해서 점례가 때맞춰 아픈 걸까. 그럴거야. 점례라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아, 귀찮다. 나라 걱정은 내 일이 아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는 내가 정치하기를 바라셨죠. 지역구를 물려주신다고 여러번 말했어요. 왜 제가 기억 못하겠어요?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요시다 시인의 고향을 아버지는 차지했어요. 야무구치현. 아버지가 삼 십도 채 못돼 29살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건 국방상이었던 할아버지 유지 때문이었어요. 법무장관에 5선까지 한 거물을 쓰러 트렸을 때 아버지는 이 곳은 유마 너에게 주마했어요. 아버지 그 약속은 절대 못지치겠어요. 총독이 퇴임하고 나면 그보고 가지라고 하세요. 

유마는 일어섰다. 밖에서 익숙한 군가소리가 들렸다. 병실 창문 밖으로 무리지어 행군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그 전에 땅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와 악을 쓰는 구령 소리가 먼저 왔었다. 유마는 등을 돌렸다. 그들은 왜 시도 때도 없이 총을 어깨에 메고 걸어 가는가. 박자에 맞춰 구호를 지르고 군가를 부른다. 행인들은 급히 피한다. 잘못한 사람보다 더 잘못한 사람처럼 얼른 숨는다. 쥐새끼 처럼 숨어서 나갈까 말까 밖을 내다 본다. 그렇게 무서운가. 그런 무서움으로, 위협으로 그들은 군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땅의 주인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라고. 그렇게 해야만 지배가 되는가.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감정은 그들이 행한 것만큼이나 잔인했다. 가차 없는 처벌이 이뤄졌다.

살아 남은 레지스탕스는 그 정도는 약과라며 더 세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걸 프랑스에서 느꼈다. 조선도 그렇까. 친일 부역자들을 프랑스처럼 처리할까. 그러면 볼 만 하겠지. 그 전에 우리 일본인들은. 삼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호사카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런 문제에까지 끼어들었다. 하필 병실에서 이런 생각이 날까. 점례는 잘 되겠지. 워낙 강한 여자니 이겨낼거야. 그나저나 꾀병은 아닐까. 날 살리려고. 당신이 안 가면 나도 안간다고 차 안에서 버텼지. 정말 그럴 기세였어. 아픈 너를 두고 내가 총독과 약속을 지킬수는 없지. 그래 난 총독을 버리고 너를 따라왔어. 이게 네가 날 살린 이유야. 점례 같은 여자 다섯명만 있어도 조선은 벌써 독립 됐을거야. 그것이 조선인에게 의미가 있을까.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어주는 일본을 굳이 배척하면서까지 독립을 하면 그들은 이익일까. 

하지만 독립분자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죽여도 계속 나온다. 팔다리를 잘라도 어디서 바퀴벌레 처럼 숨어 있다가 나와서 수류탄을 던진다. 참 질긴 종자들이다. 극소수라고 해도 이런 자들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휴의라는 자와 이야기 하고 싶다.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조선 독립이 목숨만큼이나 중하냐고. 네가 죽어서 독립이 된들 너는 과실을 먹지 못해. 나무에 열릴지 안 열릴지는 모르지만.  병실 창가에 정오의 해가 비춰들고 있었다. 호사카는 정신이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알수 없다. 정오다. 내가 있을 곳은 만찬장인데. 그러다가 유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오찬은 오후 1시다. 정오라고 한 것은 속임수다. 점례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떠보려는 것이었다. 아직 남았네. 시간은 충분하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점례는 첩자가 아니다. 그녀는 순수했다. 여전히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군인들 틈에서 온갖 술책을 연구하면서 유마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믿음은 어느 날 생기겨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불신은 오래간다. 그 오래가는 불신을 깨고 있는 것이 점례다. 점례를 만나고 나서부터 호사카는 사람을 믿어도 된다는 신념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믿어도 된다.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점례였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총독은 관저에서 차를 마시거나 다른 일정을 소화하면서 나를 기다리겠지. 그러다가 전화를 받겠지. 

정오로 시간이 휴의에게 전달됐다면 그는 헛수고 한 것이다. 만약 타이머가 달린 폭약을 설치했다면 지금쯤 터졌을 것이고 우리측 인사의 피해는 겨우 경비병 정도일 것이다. 주요 요인은 하나도 없다. 원하는 대로 됐다. 점례는 나의 안전을 지켰다. 휴의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쾌했다. 정보가 샜다면 내가 점례에게 말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 점례 말고도 그날의 행사를 알고 있는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종로서만 하더라도 완용은 물론 그 아래 참모들까지 모를 리 없다. 작전 반경을 넓힌 헌병대사령부나 총독 관저를 보호하는 방첩부대도 안다.

그들이 모두 1시로 오찬을 통보 받았을리 없다. 어떤 부대에게는 12시 통보가 갔을 것이다. 요인 행사는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나게 정보를 흘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래, 점례를 믿자. 휴의에게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난적도 없잖은가. 접촉할 시간도 없었다. 내내 나와 같이 있었고 점례의 알리바이는 나 말고 댈 사람이 누가 있나. 의심할 만한 흔적도 없었다. 의사가 다가왔다. 긴장에 의한 일시적 복통과 두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유마 호사카는 의사 뒤를 따르면서 혹시 임신은 아닌지 넌지시 물었다. 입 속에서 맴돌던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거라면 다른 의사가 검진할 겁니다. 이번에도 틀렸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호사카는 병실에서 누워 있는 점례를 보았다. 마치 산고를 마친 산모가 무사히 출산한 것에 대한 안도의 미소가 얼굴에 비쳤다. 걱정할 것 없어. 일시적인 거래. 뭐 잘못 먹었다고 생각해야지. 다행이야. 호사카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거 봐요.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회색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조용하게 종을 쳤다. 여보, 정오예요. 총독 만찬은 어떻게 해요? 걱정 붙들어 매셔. 한 시로 늦춰졌어. 방금 부하가 말했어. 그래요? 그럼 당신은? 글쎄. 가봐야지 않겠어? 아니면 늦어진 김에 아예 날짜를 내일로 하루 미루면 어떨까요? 점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일로 미루자고? 그럴 것까지야 있나. 아직 시간은 있어. 그럼 저도 가겠어요. 아니야, 당신은 그대로 누워 있어.'

점례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런 표정을 호사카는 놓치지 않았다. 난감한가. 일정이 변경돼 휴의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안타까운가. 아냐, 저 표정은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아. 대신 내 안전을 위한 거야. 내가 가면 위험하다는 거지. 그래 맞을 거야. 여보, 좀 걱정이 돼요. 시간을 늦춘 것이 되레 어떤 위험이 오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점례의 입에서 위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당신, 몸이 아파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잘 못 들을 수 있고 잘 못 보기도 해. 아픈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든. 그런 게 아니고요. 전 때로는 직감을 믿어요. 예감 같은 거 말이죠. 조금 불길하다고나 할까요. 여보, 당신도 나처럼 여기에 누워요. 아프다고 해요. 아니 당신도 아파요. 여기 병실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전체가 서랍장의 옷처럼 정리돼요. 그동안 고생했잖아요. 글 쓴다고 날새기도 했고 카페에서 독한 담배 연기를 마셨지요. 내 건강이 아니라 당신 건강도 챙겨요.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아픈 거 같아. 나도 환자가 돼 볼까. 점례가 몸을 옆으로 비키자 호사카가 구두도 벗지 않은 채 점례 옆에 누었다. 좁은 침대에 두 명이 눕자 침대가 삐걱거렸다. 천장을 봐요. 거기에 어제의 우리가 있어요. 아니 덕영산장으로 가기 직전의 모습이 거울처럼 환하게 보여요. 어디? 어디에 그런 게 있어? 보세요. 눈을 감고요. 그런 말이 어딨어. 눈을 감고 보라니. 억지 쓰지 말라고. 호사카가 농담을 했다. 병실 천장은 눈을 감아야만 보여요. 그렇지요? 보이지요? 그래 보이는 거 같아. 허겁지겁 살아왔어. 그럴 필요 없었잖아. 조선을 떠나고 싶어요. 당장요. 그래, 나도 방금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의사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당장 조선을 떠나야 한다고. 마침 군인들이 줄을 지어 행진하고 있었지. 사람들은 놀라서 피하고. 어깨에 맨 총의 끝에서 빛이 났어. 단검이 찌를 듯이 달려 들더군. 싫어. 난 군인도, 전쟁도 총도 검도 싫어. 내 안에는 그걸 밀어내는 힘이 있어. 어쩌면 당신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여보, 지금 당장 떠날까요. 총독 만찬은 할 수 없다고 해요. 대신 총독부에 찾아가면 어때요?

병원에 왔으니 총독도 이해하겠지. 장소 변경쯤이야 별것 아니라고. 총독님이 출발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한 시간 내로 가겠다고. 그래, 그래야겠어. 그거 좋은 생각이야. 유마 호사카는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지시했다. 전화로 연락해 먼저. 그리고 직접 네가 총독부로 가서 전해. 한 시간 후에 총독 관저로 가겠다고. 아마 그 시간이나 덕영산장 약속 시간이나 얼추 비슷하니 시간을 어긴 건 아냐. 장소만 바뀌었을 뿐 총독과의 약속은 살아있어. 이제야 마음이 편하군. 호사카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해. 옳은 소리만 하고. 내가 막혀 있을 때 뚫어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야.여보. 점례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됐다. 모든 것이. 총독도 대신들도 심지어 완용까지도 목숨을 건졌다. 휴의도 자기 몫은 한 것이다. 기습할 사람이 없으니 그가 위험에 빠질 일도 없다. 병력이 철수할 테니 설사 그가 그 시각에 현장에 있더라도 체포될 일은 없다. 설사 재수 없게 체포되더라도 내가 없을 때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마음의 부담을 느낄 이유는 없다.

난 벗어났다. 해방이다. 모든 사람이 살았다. 내가 사고 친 것 아냐. 휴의에게 손댄 건 내가 아냐. 점례는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대신 몸은 가뿐했다. 그녀는 일어났다. 다 나았어요. 복통도 두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어요. 그래, 거기에 처방이 있군. 맞아. 우리는 조선 체질이 아냐. 당신의 전성기를 여기서 썩게 할 순 없어. 제가 할 소리에요. 파리로 가자. 당장 비행기편을 알아봐야지. 총독에게 말해요. 오후 비행기가 있으면 오늘 당장 떠나겠다고. 군용기라도 마련하겠지. 저녁에는 도쿄에 있는 거야. 부모님 뵙고 다음 날 파리로 가자. 그래요. 여보, 빠를수록 좋아요. 난 오로지 책만 쓸거야. 아버지처럼 정치가도 아니고 군복을 벗었으니 군인도 아냐. 내가 이기주의자라고? 그래도 좋아. 나는 나대로 애국하는 거야. 애국의 방식은 각기 다르거든.

맞아요. 정치인은 정치를 군인은 군대를 작가는 글을 화가를 그림을. 각자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이 애국입니다. 안 그래요? 점례가 예의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언제 아픈 사람이었나. 저런 사람도 아플 수 있나. 당신의 장점외에 내가 아는 것이 없어. 유마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피. 날 놀리지 말아요. 점례가 호사카의 구겨진 옷을 펴며 말했다. 잘 어울려요. 화신 백화점에서 산 이 가디건과 상의요. 그래, 조선에서 간혹 좋은 일은 백화점 쇼핑도 있지. 정말 당신은 아무 옷이나 잘 어울려요. 그렇게 감탄하지 마. 원래 내 옷걸이가 좋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차려입어요. 단벌신사는 싫어요. 날개를 달아요. 날자구요. 날아 보자꾸요.

그래, 흔들리지 말고 날자고. 전화를 받은 총독은 기분이 언짢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돌아가라니. 이거 똥개 훈련 시키나. 그러나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속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옆자리 앉은 경무총감에게 더 그랬다. 그에게 가벼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자는 언제나 자신의 경쟁자였다. 모시는 척하지만 틈을 노려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다. 배신당하는 치욕은 피하자. 그러니 높은 자리에 있는 내가 조심해야지. 내부대신의 아들에게 점수를 깎이는 행동은 어리석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언제 일러바칠 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자리를 오래 지키고 싶다. 한 번 더 해 먹어야지.

난 조선이 좋아. 이곳에서는 내가 왕이야, 왕. 조선왕도 나처럼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어. 내려가기 전에 행세해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총독은 자신이 총독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 무엇보다 기쁜지 넌지시 웃음을 지었다. 약속이 깨진 것에 대한 불평은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그 웃음조차 경무총감에게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구나 오늘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실정으로 조선백성이 들고 일어난 것도 아니잖는가. 설사 내 잘못이라고 해도 문책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호사카와도 관련이 없다. 점례 마사코의 급작스런 발작 때문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래 조선 년 하나 때문에 총독의 일정이 바뀐단 말이지. 점례라는 말레 총독은 갑자기 부아가 일었다. 그는 속으로 쓴 것을 삼킨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감히 조선 년 하나가 이 총독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이지. 각하는 그렇다고 쳐도 조센징은 아니다. 아니 식민지 지배국의 왕이 그깟 조선 년 때문에 체면이 구기다니, 이게 대체 웬 말이냔 말이냐. 그러나 총독은 앞서도 말했지만 내심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뱃속에 칼을 품고 있으나 입으로 환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총독이었다.

그답게 그는 겉으로는 쾌차하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하고 얼굴 가득 수심을 채웠다. 그래 마사코 양이 위중한 모양이지요? 위중이라니요? 그런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아마 급체인 듯싶습니다. 젊고 건강하니 금방 털고 일어나겠지요. 각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우리도 지금 이 지경인데 말이요. 총독이 위독이라는 말을 하고는 심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금세 그것을 잊었는지, 체가 풀려 지금쯤 여기로 오는 지도 몰라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게 도리에 맞아요. 그래요. 그게 옳은 말씀입니다. 경무총감이 총독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전화가 왔고 총독은 표정을 확 바꾸었다. 집으로 갑시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각하가 총독부로 직접 오신다고 합니다. 그새 병이 나은 모양이요? 내가 뭐랬어요? 급체라고 했지요. 병원과 가까우니 얼마 후면 도착 할거요.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총독이 소리치자 차가 속도를 냈다. 뒤따르는 대신들의 차도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정오에서 15분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총독은 덕영산장을 나오면서 다음에 조센징 이놈과 여기서 한 잔 거나하게 해야지. 그자의 첩이 예쁘다면서.첩의 시중을 한번 들어볼까. 그나저나 이 놈은 내가 사는 총독부보다 땅이 많으니 참 대단한 조센징이야. 일본 왕실의 작위까지 받고. 총독은 덕영산장의 주인을 생각하면서 입을 씰룩거렸다. 

아, 오늘은 총독 체면이 말이 아니야. 약속을 어겼으면 직접 와야지. 왜 장소를 바꾼단 말인가. 집에서 방금 나왔는데 집으로 다시 오라고. 괘씸하군. 총독은 마음이 또 이렇게 변했다. 내부대신만 아니라면 요절을 내고 싶기까지 했다.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 나도 몰라. 총독은 지팡이 처럼 집고 있는 긴 칼에 몸을 기댔다.  각하니 참지, 참자, 참자 그는 참을 인자를 세 번 쓰면 인격자가 된다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실제로 세 번이나 그렇게 외쳤다. 그러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되레 기회로 삼자. 그가 하자는 대로 했으니 나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전하지는 않겠지. 아버지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쯤이야 참을 수 있어.

총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종로서장도 장소가 바뀐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거 미친 것 아냐. 그는 총독과 달리 화를 냈다. 얼마나 화가 심했는지 부하를 상대로 조인트를 걷어차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똥개도 아니고 심부름시키는 것도 여분 수가 있지. 그도 총독처럼 똥개를 들먹였다. 대체 이거 왜 그래. 그는 서너 번 피다 만 담배를 획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침을 탁 소리가 나게 뱉어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총독과는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존심 같은 게 아니었다. 휴의에게 당했다는 마음이 컸다. 이 모든 것은 그자의 계획이다. 점례가 이용당하고 있다. 말이 되는가. 일개 독립군 잔당 하나가 대 일본 제국을 흔들고 있다.

혼자서라도 휴의 쯤은 스무 명이라도 당해낼 자신이 있다. 멋지게 상대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제멋대로 장소를 바꾸고 총독까지 능멸하고 있다. 아프다고? 멀쩡한 사람이 아프다고? 아침까지 잘 먹고 잘 차려입고 차에 올라타더니 그 새 아프다고. 도대체 각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점례의 연극하나 눈치채지 못한단 말인가. 뻔한 속임수에 넘어가서 이게 뭐냔 말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일선에서 최고위 작전장교를 했지. 그러나 완용역시 심증만 있었지 확증이 없었다. 그래서 하려다 말았던 말을 내뱉었다. 별까지 달고 말이야.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완용은 그러나 불평만 있을 수는 없었다.

총독이 출발하는 것을 보고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병력의 일부는 무전을 통해 총독 관저에 미치 배치했다. 의전을 차리는 총독에게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 똥줄이 타올랐다. 느긋하다가 갑자기 서두르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는 그러나 노련한 경찰답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원점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휴의가 얻는 건 뭐지? 이득을 보는 게 뭐냐고? 총독 제거가 목적이 아니었나? 장소와 일시가 노출됐는데 일부러 피했다고? 그것은 말이 아니다. 이해 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된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 때문에 동휴는 미칠 것만 같았다. 뭐지. 이게 대체 뭐냔 말이냐. 그러면? 작전 지휘자가 휴의가 아니면 점례? 점례가 지휘했나.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지난번처럼 총독부 습격인가. 아냐, 아냐, 이내 완용은 머리를 세게 저었다. 이건 불가능하다. 총독부는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입구부터 검문이고 안면이 확인되지 않은 자는 근처에는 얼씬도 못한다. 그러면, 이동 중에 저격하나. 헛발질 때문에 화가 난 그는 새로운 것을 찾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한 대 쥐어 박고는 그래, 그거다하고 소리쳤다. 완용은 자신이 총독 옆에 바짝 붙어서 근접 경호를 하기로 했다. 날센 부하 서너 명이 탄 차를 앞뒤로 붙이고서는 총구를 길게 창문 앞으로 뺐다. 휴의에게 사전 경고를 하는 것이다. 삼엄하게 하고 있으니 섣불리 수작질에 나서지 말라는 위협시위였다. 말썽없이 총독부까지모셔야 한다. 이동중에 일어난 일은 자신의 책임이다.

종로서가 경호를 철저히 하는 군요. 먼저 총구를 발견한 경무총감이 한 마디했다. 총독이 뒤 돌아 봤다. 먼지를 일으키며 종로서 마크를 단 서장의 차가 따라 붙었다. 에이, 저 놈도 조센징이지.예, 그렇습니다. 먼지는 왜 날리고 지날이야. 그러게요. 아마도 총독님 신변을 걱정하는가 봅니다. 경무총감이 입에 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성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 신변이라고? 아마 제 놈 출세를 위해 그러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종로서장은 정신은 투철해요. 우리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위하는 애국자가 틀림없어요.' 내 기분이 상했는데 그 놈을 두둔하는 거요? 아니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건 나도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왠지 오늘은 영 기분이 잡치고 있어요. 종로서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 같단 말이오. 그래서 인지 다 꼴보고 싶지 않네요.

옆자리에 앉은 경무총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마 마사코양의 병원행 때문에 일이 어긋나지만 않았어도 그러지는 않았을텐데요, 하면서 비위를 맞추었다. 그래요, 바로 그거요. 엥 조센징이란. 총독은 속마을 들켰다. 그걸 알고는 바로 아니 마사코양 때문은 아니요. 경무총감도 알지요? 내가 마카코양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네 그러믄요. 그가 정색을 하면서 공손히 말했다. 마사코 양은 우리 일본의 자랑이요. 파리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잖아요? 총독부 정면에 걸린 그림도 마사코 양의 작품입니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총독이 퉁명스럽게 받았다. 내가 조선제일화랑에서 사오지 않았소. 거기 화랑 주인이 내부대신 각하의 친동생이고. 어허, 차가 회전을 하면서 총옥의 몸이 옆으로 쏠렸다. 저 넘, 저러다가 우리한테 총쏠라. 총독은 튀어나온 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런 말을 했으나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난번 전시회때 내가 작품을 사지 않았소? 그건 몰랐다는 듯이 경무총감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큰 돈을 썼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아니 그보다 거 차기가 있단 말이요, 내 말 알아듣겠소? 총독이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혹시 남은 그림이 있으면 저도 하나 장만 하고 싶네요.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이 경무총감이 말했다. 다 팔렸소. 한 발 늦었어요. 경무총감이 머쓱한 듯이 손을 긁적였다. 총독은 그제서야 만족했는지 정말로 저절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입가에 품었다. 휴의는 인왕산의 중턱에서 총독 일행이 탄 검은 차량이 들어오는 것을 작은 망원경으로 보았다. 그보다 앞서 경비차량이 들어왔고 그 뒤로 대신들이 찬 차가 뒤따랐다.

그는 손을 들었다. 손목시계, 선생이 준 시계였다. 11시 50분이었다. 심호흡을 했다. 길게 한 두 번 더 그렇게 호흡을 하고 휴의는 시계에서 눈을 뗐다. 검은차가 시야에 다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총독이 안으로 걸어야 가야 한다. 그러면 끝이다. 네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다.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차가 멈추고도 총독은 내릴 기미가 없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방향을 돌려 왔던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틀렸다. 작전 실패다. 어라, 어라? 휴의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나른해서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도 험난하고 이해 어려운 경험을 많이 했지만 이것은 이해불가였다.

왔다가 다시 가다니. 그물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고기도 있는가. 휴의는 허탈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나머지 차량도 총독의 차를 뒤따랐다. 이건 뭐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휴의는 안정을 찾고 제일 먼저 바뀐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행동을 했다. 음식점 주방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대원에게 급히 암호를 쳤다. 돼지 탈출, 똥 돼지 탈출, 우리를 뚫고 나갔다. 오버. 그쪽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작전실패. 철수다. 바로 현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라. 주모는 대원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아버지와 딸의 원수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했다. 휴의보다 더 당황했다.

급히 몸을 돌렸던 대원 중 한 명이 주모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아니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조용히 기다리시오. 아무말 마시고요. 사라지는 대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모는 음식점 식칼을 들고 성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병력들도 철수하고 있다. 경호 병력은 총독 일행이 떠나고 나서도 한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트럭에 올라탔다. 뒷 처리를 위해 형사 한 명과 초급 장교 한 명이 남아 있다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음식 냄새를 맡으며 남은 음식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전에 조금 요기를 하고 싶어 했다. 주모는 칼을 든 채 넋이 나간 상태에 있어 그들이 들어오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어이, 주모 그 칼 내려놓고 밥 좀 주소. 그리고 남은 음식은 잘 챙겨 놓으시오. 종로서와 헌병대로 보낼 것이오. 그들은 호기롭게 탁자에 앉았다. 형사는 마실 술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고 장교는 권총집을 풀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주모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여기 술 한 병 가져와. 머리가 벗겨진 형사가 불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모는 대답 없이 막걸리와 잔을 놓았다. 이거 왜 이리, 술집 년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식뻘 되는 형사가 함부로 말했다. 일본군 장교 역시 하대하면서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냈다. 저런 빠가야로 같은 년. 장교는 주모가 등을 보이고 돌아서자 들으라는 듯이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서 욕을 했다. 주모는 가지런히 썬 수육과 방금전에 무친 겉저리를 안주로 내놓았다.

그는 다시 식칼을 들었다. 작전이 끝났다고. 총독도 살고 내무대신인가 뭔가 하는 자의 아들도 살았다고. 다 끝났다. 주모는 손안에 든 원수를 처단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도 된 것처럼 분노로 이글거렸다. 어이, 주모. 돼지고기 식었다. 따뜻한 걸로 내와. 이번에도 조선 형사가 소리쳤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를 담은 쟁반 위에 식칼을 얹어 놓았다. 여기 대령했어요. 많이들 잡수세요. 고생이 많아요.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늙은 년이 예의가 없어. 형사가 또 한마디 했다. 주모는 참지 않았다. 돌아서더니 쟁반에 있던 식칼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막 젓가락에 담은 돼지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 순간 고기 대신 칼날을 형사의 입에 박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형사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붉은 피를 벌컥 벌컷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이 미친년이 하고 욕을 해댔다. 평소 입에 베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욕이었다. 장교가 식탁 위에 있는 권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손목을 향해 식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주모가 한발 빨랐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잘려 나간 손목이 저 쪽에서 산 고기처럼 팔딱거렸다. 이놈, 너도 죽어봐라. 주모가 달려들어 멀쩡한 한 손으로 피가 나는 팔목을 잡으려는 장교의 목을 찔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아수라장에 식탁은 난장판이 됐다. 괴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대원과 합류한 휴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주모가 일을 저질렀군. 우리가 할 것을 주모가 했어. 어서 여기를 뜨세. 총독 경호를 마친 완용이 막 총독부를 떠나 종로서에 도착했을 무렵 99칸 한옥에에서 벌어진 참사 소식이 전해졌다. 뭐셔, 이것이. 총독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쫄쫄 굶었던 완용이 국밥을 생각하면서 인사동 쪽으로 내려갈까 하다 말고 급히 덕영산장으로 돌아왔다.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완용이 사건이 벌어진 내막을 세 명의 시체 앞에서 복기했다. 일이 이렇게 됐군. 술집 년이 먼저 형사를 죽이고 장교 손목을 자른 다음 목을 찔렀다. 그리고 나서 자신도 그 칼을 썼다. 간단하군. 그런데 이 조선년의 정체는 뭐지. 그래 통인시장에서 국밥을 팔던 년이라고. 그래. 그 년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짓을 벌인거야. 사건을 정확히 파악한 완용은 원인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 없었다.

이건 이해 불가야. 아무리 방심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고급 경찰과 장교가 아녀자에게 죽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훈련된 사람이 늙은 여자에게 당해. 그 년이 태권도라도 배웠단 말인가. 아니면 특수훈련이라도 했나. 완용이 손을 머리위에 뻗어 절구 찧듯이 머리를 찧었다. 이것 역시 휴의 작품인가. 그러면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완용은 자신이 이번에도 휴의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총독이 무사하고 각하가 안전하다. 이 정도 사건은 내 선에서 마무리 지어도 된다. 굳이 상부에 보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가 완용은 머리를 굴리더니 아냐, 보고해야지. 총독에게 보고하는 거야. 일이 벌어졌다고. 내무대신 각하가 병원에 가는 바람에 더 큰 위험을 막았다고. 그러면 총독은 기분 나쁜 마음이 싹 가시겠지. 내무대신 아들에게 가졌던 나쁜 인상을 지우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기뻐하겠지. 아니야, 불똥은 나에게 떨어질지 몰라. 두 명이 죽었다. 경찰과 장교. 이를 어쩌나. 한 년은 변사체고. 

완용의 걱정은 그러나 쉽게 해결됐다. 연락을 받고 헌병대 쪽에서 나온 수사관이 이 사건은 종로서와 우리만 아는 것으로 하고 조용히 끝내자고 사령관이 지시했다는 것이다. 괜한 고민을 했군. 그렇게 기록해. 완용은 옆에 있는 부하에게 사건이 보고되지 않고 현장에서 종결된 것은 조선헌병대사령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일이 끝났지만 완용은 입맛이 썼다. 그러다 주모가 국밥집을 한다는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 집에서 국밥이나 먹고 가자. 완용은 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통인시장으로 들어왔다. 같이 가려는 부하는 먼저 서로 돌려보냈다. 보고서를 작성해 놓으라고 지시해 놓고는 그는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왼손을 쓰는 청년이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했다. 보아하니 오른 손은 움직임이 둔했다.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엉거주춤한 오른 손 때문에 당연히 도마질이 서툴렀다. 그러나 연습을 많이 한 때문인지 순대를 써는 것이 느려 터지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버럭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으나 완용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모에게 병신 자식이 있었네. 그래 네 어미가 두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 자식의 기분이 어떠냐. 완용이 입맛을 다셨다. 어이, 여기 막걸리도 한 잔 주소. 네네. 고분고분하게 청년이 대답하고는 주전자와 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청년은 오른손은 왜 그러시오. 어디 다쳤소? 네 주방일을 하다 손가락을 베었어요. 세 개가 나갔어요. 그래서 전쟁에도 나가지 못해요. 청년이 학도병에 차출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이 말했다.

그래 어머니는 어디 갔소? 네, 오늘 위 산장에서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그곳 음식 때문에 갔어요. 아마 늦어서야 들어올 것 같아요. 완용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병신놈아, 네 어미는 죽었다. 길바닥에 팽개쳐 있어. 어서 가서 땅에 묻어야지. 완용은 입에 도는 그 말 대신 잔을 단숨에 비웠다. 자네, 술은 조금 할 줄 아나. 아니요. 저는 배우지 못했어요. 사양말고 한잔하세. 싫어요. 일과 중인걸요. 그러지 말고 이리 오래도. 완용히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은 마지 못해 앞에 앉아서 잔을 잡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손가락이 두개였다. 완용이 그 잔에 벌꺽벌꺽 쏟았다. 잔이 조금 넘쳐 흘렀다. 핥지 마라. 술은 얼마든지 있어. 아까운 듯이 청년이 손등에 묻은 술을 먹으려고 하자 완용이 제지했다. 그가 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간바이, 간바이. 그래 애야. 완용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술값은 미리 내마. 내가 혹시 급히 볼 일이 있어 가더라도 값은 치른 거다. 청년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받았다.

나머지는 용돈 써라. 그래, 너는 군대를 가고 싶으냐? 네, 황국신민으로 당연히 그래야지요. 천황의 군대에 가는 것은 자랑스러거지라. 천황의 적자이니 너희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애국자 납셨군. 비꼬지 마세요. 내 친구도 가서 몇 달 만에 죽었어요. 원수를 갚아야지요. 그래, 그래 장하다. 그래야지. 그런데 혹시 어제나 그제 아니면 며칠 전에 아저씨 뻘 되는 남자가 이곳에서 국밥에 술을 먹지 않았니? 아저씨처럼. 그리고 엄마하고 이런 저런 아는 사람처럼 얘기하지 않든? 청년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를 한 참 생각하더니 맞아요, 바로 어제 였어요. 이맘때쯤 세 명이서 왔어요. 국밥을 먹고 막걸리를 먹었어요. 아저씨처럼 남은 돈은 그대로 두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억이 나요.

어떻게 생겼든? 완용이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봤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완용은 청년이 말하는 인상에서 휴의와 그 일당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자들이 노렸군.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놈들은 아직 조선땅에 있다. 반드시 잡아야지. 내부대신 각하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산채로 잡아야지. 점례가 보는 앞에서 껍질을 벗겨주마. 껍질로 무언 한다고 했더라. 그래 맞아, 핸드백 하나 잘 만들어서 점례에게 선물하자. 좋아할 거야. 완용은 부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양은 그릇에 담긴 술잔이 출렁였다. 그가 일어섰다.

아저씨도 방금 전에 산장에서 내려왔는데 엄마가 너를 부르더라. 여기 손님이 많아서 일손이 부족하니 가게 문 닫고 어서 오라고, 신신당부 했어. 내가 깜박 잊었다. 그 애길 먼저 했어야 하는데. 어서 가봐. 문 일찍 닫고. 완용은 그 말을 하고 나서 거리와 나왔다. 총독부의 첨탑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지금쯤 제 어미의 시체를 보았겠지. 그래, 통곡해라. 애미를 죽인 건 네가 목숨 바쳐 충성을 해야 할 일본국 장교와 경찰이다. 그래도 너는 전선으로 가고 싶어 애간장을 녹이겠지. 천한 놈.이래서 조센징은 안돼. 이런되도 조선이 독립 되겠어.

혀를 차면서 완용이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섰다. 방향을 뜬 전차가 경성역 쪽으로 경적을 길게 뿜으면서 속력을 내고 있었다. 한 쪽만 남은 해태상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총독 관저에서의 식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늦은 점심은 식욕을 자극했다. 총독은 행여 내무대신의 아들이 만족하지 못할까 봐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유마 호사카는 이미 어떤 경우든 이해하겠다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만사에 불만이 없었다. 산장에서 허겁지겁 온 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분 좋은 식사가 끝났다. 총독은 유마와 점례를 위해 총독부 내부를 직접 안내했다. 으리으리한 궁전이 따로 없었다. 프랑스 왕가의 궁전이 부럽지 않았다. 바닥은 물론 천장까지 모든 것이 번쩍번쩍 빛나는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이 모습. 그래 오전에 만찬을 하려던 바로 덕영산장이었지. 참 그놈도 대단해. 얼마나 우리 일본에 아부했으면 그 정도 축재를 했을까. 자신이 모셨던 나라의 왕을 배신하는데 앞장선 대가로는 과분하지. 하지만 나라를 넘긴다는 옥쇄를 찍을 때 그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다들 거기에 도장을 찍는데 망설였거든. 아무리 친일파라고 자기 나라 땅 넘긴다는 왕의 인장을 선뜻 찍기가 두려웠지. 더군다나 왕의 딸년인가 며르닌가 하는 여자가 옥쇄를 치맛폭에 숨겨다면서. 그걸 뺏었어. 속을 뒤져서 말이야. 그러니 우리 일본국입장에서 그자는 은인이지. 유마는 어디서 들은 그 소리가 불현듯 생각났다. 총독은 자신보다 유마를 앞세웠다. 각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하면서 안내에 열중이었다. 

일행이 움직일 때마다 하인들은 감히 눈을 들지 못하고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점례는 그들의 모습에서 죽마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순사가 오면 하던일을 멈추고 길가에 엎드려 있던 그 시절 말이다. 점례는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우아한 표정과 걸음으로 마치 총독 부인처럼 행세했다. 누가 봐도 점례는 오늘 식사의 주인공이었다. 당당했고 그 모습은 보기 좋았다. 총독은 점례를 칭찬했다. 유마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자세였다. 눈치빠른 자는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지난번 그림 전시회에 직접 가지 못해 송구합니다. 대신 신하를 시켜 몇 점을 구입했습니다. 저기 걸려 있지요. 바로 저 그림이죠. 총독이 손가락으로 창가 쪽의 벽면을 가리켰다. 그렇군요. 저 그림은 조선에 와서 급하게 그린 건데,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데 많은 점수를 주셨어요. 총독각하 그 점에 대해 감사 인사드립니다. 점례가 응수했다. 총독은 그 말에는 답을 하지않았다. 못들은건지 듣고서도 못들은체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사람이 나요. 실제보다 더 근사하지요? 유마가 거드름을 피웠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총독을 우습게 본다는 증거였다.  각하는 그림이나 실제나 다르지 않아요. 인자하고 다정다감하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 화나면 무척 무섭다니까요. 점례가 손사레를 쳤다. 총독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유마가 웃자 같이 따라 웃었다. 

조선년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 총독이 벨이 꼬였다. 그러나 얼굴표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부터는 안 그러면 모든 게 용서 됩니다. 저 사람은 마음이 넓어요. 유마가 점례편을 들었다. 그럼요.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까지 다 들여다 보입니다. 저 그림을 걸어 놓은 뒤부터는 근심 걱정이 싹 사라졌어요.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총독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가요? 괜히 팔았네요. 내가 살걸. 멋 적은 듯 호사카가 뒷머리를 긁젹였다. 총독이 웃겨 죽겠다는 듯이 자지러졌다.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총독이 삼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향해 몸을 먼저 움직였다. 여기서 보는 풍경이 좋아요. 조선식 한옥 건물은 서양식과 달리 곡선이 유려하지요. 보는데는 좋지만 쓸모는 없는게 단점입니다. 그것이 조선의 허례허식을 닮은 거지요. 사는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한옥이 꼭 그런식입니다. 

그래요? 유마가 관심을 보이며 창가를 바라봤다. 광화문이 보였다. 점례도 보았다. 총독 관저에 비해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저 건물도 헐고 현대식으로 지을까 해요. 쓰임새가 없거든요. 총독 뒤에 있던 경무총감이 총독의 눈치를 보면서 한 마디 했다. 경무총감, 그건 당신 관할이 아닙니다. 결정은 내가 해요. 총독이 화난 듯이 한마디 했다. 실속을 차리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경무총감이 또 끼어들었다. 총독은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유마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이곳에 앉아 밖을 보면 우리 일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이 도와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조선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지만 아직은 조선 때가 다 벗지 않았어요. 몇 개만 남겨 놓고 다 허물어야지요. 일본의 근대화된 문명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작업에 속도가 붙고 있어요. 요즘 들어. 총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조선민족이 부지런했으면 좋겠어요. 아주 게으르 거든요. 그리고 모였다고 하면 서로 헐뜯기 일쑤지요. 뭉칠줄을 몰라요. 모래알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먹었지요. 경무총감이 총독을 돕는답시고 한마디 했다. 허허, 총독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총독이 이 말을 하면서 점례를 힐끗 바라봤다. 의도적이었다. 일부러 조선 여자인 점례를 노렸던 것이다. 황실과도 가깝고 일본 최고 위치에 있는 내부대신 각하의 아들이 조선여자와 함께 다니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여자를 깎아 내리고 싶었다. 왕실 여자면 좀 좋아. 그것도 아니면 참한 참의원 여식이라도. 그도 아니면 내 딸도 있잖아. 비록 한 번 결혼에 실패했지만. 육사 동기기만 내부대신이 참 보는 눈이 없어. 줏대도 없고. 나같으면 바로 내쳤을 거야. 조선여자가 무슨 정치적인 힘이 되겠어? 연줄로 엮여서 서로 밀고 끌고 해야 성공하지. 유마 너도 아버지 사라지면 끝장이다. 끝물이란 말이다. 총독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시선은 점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점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요. 이완용 같은 인물은 조선인들도 훌륭할 수 있다는 본보기로 삼을만 합니다. 안 그런가요? 참 똑똑해요. 기회를 잡을 줄 알고요. 경무총감이 아까 한 자기 말에 총독이 호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대화에 끼어 들었다. 조선 사람이라고 다 같은 가요? 사람은 어떤 민족도 같을 수가 없어요. 영국인이라고 다 잘난 건 아니지요. 유마는 점례가 그런 말에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저기 문 뒤쪽에도 공간이 있나요? 유마가 안쪽의 비밀 공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네 있지요. 열 면 대피할 수 있는 말하자면 비밀 아지트지요. 이곳 문은 뒤에 철이 붙어 있어 방탄 역할을 하고요. 위급할 때 이쪽에 숨어 있으면 수류탄 공격에도 안전해요. 애초 설계가 그렇게 된 거니까요.

총독은 자랑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휴의의 공격을 받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일년 전 일을 회상하고는 얼굴이 불거졌다. 기분 나쁜 기억을 상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문을 닫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마가 한마디 하자 멈칫했다. 이곳이 피난처였군요. 아버지가 말한 장소가 이곳이지요? 총독은 허를 찔린 듯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그때 총독님의 의연함에 존경한다고 하셨어요. 총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올라오는 군홧발 소리에도 총독다운 태도를 잃지 않으셨다고요. 과연 전직 해군대장 다운 행동 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때 권총이 없었어요. 있었다면 아버님을 보호하기 위해 제가 직접 총을 뽑았을 겁니다. 총독은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처신을 했는지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의라는 자는 아직도 체포하지 못했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요? 유마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점례는 휴의라는 말이 나오지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글쎄 말이오. 종로서가 형편없어요. 서장을 갈아치든지 해야지 원. 총독이 책임을 완용에게 돌렸다.

헌병대사령부도 책임이 있잖아요? 그리고 관저를 대비하는 총독부 수비대도 역할을 해야 하고요. 경찰에만 치안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고 말고요. 군이 나서야지요. 아직 조선은 완전히 식민지 됐다고 보기는 일러요. 99 프로는 일본에 동조하는데 나머지 1 프로가 문제입니다. 휴의 같은 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요. 오늘 일만 해도 그 자 때문에 여간 걱정하지 않았어요. 각하가 장소를 변경했기 망정이지 작은 소란도 있었답니다. 유마가 말대신 눈길로 그것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방금 전에 헌병대사령관이 연락했는데 자기 부하 한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물론 휴의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 우발적인 충돌이었어요. 누가 범인인가요. 잡혔나요. 현장에서 범인은 자살했는데 술집 주모였다지 뭡니까. 주모를 입에 올리기 싫어 총독이 머뭇거리자 경무총감이 나섰다. 저 쪽 시장통에서 장사하는 주모가 칼로 찔렀답니다. 유마는 더는 그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태평양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되면 전런 어쩌구니 없는 활동도 사그러들 겁니다. 일본의 위대함을 직접 보고 느꼈으니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그런데 지금 전황은 어떤가요? 이번에는 총독이 자신이 대답할 차례라는 것을 알고는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필리핀 해전의 손실이 커요. 미국의 공세도 거세고요. 러시아가 참전하면 어려워 질텐데 거기에 대한 대비책은 있나요? 물론 입니다.각하. 그래서 조선민들의 적극적인 참전이 절실한 때입니다. 총알받이로라도 써먹어야지요.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갈때 비서가 총독에게 귓속말을 했다. 총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펴졌다. 알았어. 가봐. 각하, 아까 말씀드린 덕영산장 살인사건은 우리가 잡으려는 휴의 일당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주모에게 당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관심에서 멀어졌던 유마가 다시 질문을 했다. 자세한 것은 종로서에게 파악하고 있다고 하니 곧 보고가 들어 오겠지요. 서장을 불러서 직접 들어보는 게 어떻까요? 유마가 그 자리에서 제의하자 총독은 거절하지 못했다.

삼 십 분도 안돼 완용이 총독부로 들어왔다. 이층 원형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총독 일행은 완용이 들어와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래, 서장 어찌 된 일인가? 각하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저의 경호가 완벽하지 못해 일어난 불상사입니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원인은 알아야지. 완용은 헌병대에서 함구해 놓기로 해놓고서는 정보를 흘린 것을 알고는  이 왜놈의 새끼,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철썩같이 약속해 놓고. 그런데 이렇게 빨리 총독에게 보고하다니. 믿을 놈 하나도 없다.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고 순간 판단했다.

머리를 굴릴 일도 아니다. 책임이라면 우리도 있지만 헌병대사령부도 자유롭지 못하다. 둘이 경비 책임을 맡았고 되레 지휘 체계는 종로서보다 헌병대사령부에 있다. 완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사카는 주모의 뒤에 휴의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점례는 완용 얘기가 나올 때부터 휴의를 의심했다. 그가 개입했구나.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연약한 주모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시켰을까. 겨우 말단 경찰과 장교 하나로 뭐가 바뀐다고. 그리고 자신은 감쪽같이 빠져나가다니. 대범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애초 목표 였던 총독은 여기 살아있는데 조무래기 한둘을 해치는 것은 살인에 불과했다.

점례는 맞춰지지 않는 퍼즐에 당황했다. 유마가 이쯤에서 자리를 뜨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내일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이런 일은 제가 끼어들 만한 사안이 아닌 것 같고요. 정치는 정말 골치아파요. 유마는 이야기에 쐐기를 박겠다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조선정치를 잘 부탁합니다. 각하. 유마가 정중하게 마무리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가 너무 시간을 너무 빼았았습니다.각하 용서하십시오. 총독이 정중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바쁜 총독님을 되레 힘들게 했습니다. 아버님께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유마는 말을 마친 완용과 아는 체를 했다. 점례는 목례를 했다. 완용과 점례가 한동안 눈을 교환했다. 둘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죽마을 완용과 점례하는 것을. 완용이 고개를 숙이며 종로서장 완용 와타나베 입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사코에요. 점례는 조선식 이름인 점례를 일부러 뺐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프랑스식 인사였다. 그 순간 완용이 빠르고 낮게 말했다. 점례야, 나야 완용. 휴의는 어디있니? 빨리 말해. 뱃속이 다시 쿰틀거렸다. 메슥거워 곧 토할 것 같았다. 점례는 왼 손을 배에 갔다 댔다. 이 개자식아, 개 보다 못한 놈. 나는 널 모른다. 어라, 이 년이 욕을 하네. 네 놈이 우리 부모 죽였지. 네 놈 목을 내가 부러뜨리겠다. 무슨 여자가 그런 심한 욕을. 왜놈 앞잡이가 그렇게도 좋더냐. 네 년은? 네 년은 뭔데. 왜 놈 밑받이 주제에. 그 순간 점례의 손이 번쩍하더니 짤싹 소리가 났다. 얼떨결에 따귀를 맞은 완용이 아픔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점례의 손에 따귀를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그곳을 가렸다.

도적놈, 남의 것 훔쳐 먹으니 기분 좋지? 네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개새끼. 이 말을 끝으로 점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일이 더 커지면 자신이 불리할 것만 같았다. 완용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울 게 없었다. 그래서 둘은 서둘러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대단한 연기자들이었다. 유마가 다가왔다. 총독과 경무총감과 한 번 더 작별인사를 한 뒤였다. 예쁘게 차리고 오셨네요? 파리에서는 다들 이렇게 해요. 멋지세요. 정말로요.배우가 따로 없어요. 칭찬이지요. 아마 그렇게 보일거에요? 파리지엥으로 살려면 어쩔 수 없어요. 저벅 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경무총감이 유마 곁에 섰다.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내 지난번 조선호텔에서 잠깐 뵌 적이 있어요. 무슨 얘기인지 진지하게 하네요.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지요? 잠깐 지나는 인사를 했어요. 점례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하고 물러났다.

그렇게 완용과 점례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을 때 총독은 가려는 유마를 붙잡고 따로 볼 일이 있었다. 각하, 잠깐만요. 총독이 유마의 옷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사람이 안 보이는 코너로 가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여비에 보태 쓰시지요. 작은 성의이니 사양치 마시고요. 총독의 웃음이 턱수염 아래까지 내려와 걸쳤다. 유마는 주는 봉투를 받아 안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제 작은 성의입니다. 본국에 돌아가면 내무대신 각하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래야지요. 

관저를 나온 유마와 점례는 바로 인사동으로 향했다. 삼촌에게 인사를 하고 떠날 참이었다. 삼촌은 그림 몇 점을 점례에게 건넸다. 이건 조선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화가의 그림이다. 점례도 보았겠지? 아니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리고 이건 우리 일본 화가의 그림이다. 쓰모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화폭에 가득 담긴 두 명의 비대한 남자가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군중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구도는 물론 색감이 뛰어났다. 파리 화랑가에서 이런 그림에 호감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몇 점 가지고 가서 소개하면 네가 활동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점례는 황공한 듯이 그림을 받아 들었다. 삼촌. 언제나 신경 써주니 고마워요. 유럽 화풍에 조금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조상들의 이런 그림은 자부심을 줍니다. 더 당당히 활동할게요. 그러라고 그런 거야. 삼촌의 깊은 뜻은 거기에 있는 거고. 당신은 그걸 정확히 캐치했어. 유마가 전적으로 동조한다는 듯이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