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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고 답답한 자리를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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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고 답답한 자리를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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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이 두 번의 시가전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두만강 일대의 휴의는 일제와 일대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과 일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독립군의 준비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심지어 해볼만 하다는 전술적 평가도 나왔다.

단순한 기대감이나 우연을 바라는 것이 아이었다. 한마디로 키는 대봐야 알고 싸움은 붙어봐야 안다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어떤 좋은 예감 같은 것이 독립군 진영을 감싸고 돌았다. 휴의가 작전 성공의 가능성을 나름대로 예측해 볼 수 있는 근거였다. 충분한 준비와 알수 없는 감이 휴의를 자신감으로 이끌었다. 

훈련을 마친 군사들의 사기가 높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실력도 왜경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휴의를 대장으로 임명한 상해 임정에서도 미군 훈련을 받은 독립군 일진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휴동지만 믿소. 이제 우리도 성공할 때가 됐어요. 그렇지 않아요? 질문의 화법은 그렇다는 답변을 얻어 내면서 독립군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시오. 지금 경성은 뭔가 해보려는 의지로 들썩이고 있어요. 생각보다 왜가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어요.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기미면 만세 운동 때 우리는 곳 독립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후 몇 십년이 지나고 나서는 안 된다는 패배감이 가득찼는데 이제 다시 그날의 함성을 되살리고 있어요. 휴 동지의 공이 끕니다. 선생이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며 휴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야 뭐 한 일이 있나요. 지난번에 같이 간 여성 동지의 역할이 컸어요. 참 안 된 일이지요? 그 처럼 당찬 여성 열명만 있었으면 우리는 벌써 독립했을 것이오. 정말 슬프고 백번 소리쳐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해방이 되면 여성 독립군에 대한 장례도 성대히 치르고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해야지요. 다 제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일차에 성공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휴의가 슬픈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요, 휴 동지. 그 마음을. 찢어 지겠지요. 그러나 휴 동지는 어쩔 수 없었어요. 종로서 완용에게 신분이 드러났고 여기 상하이 일이 더 급했지요.

완용은 반드시 처단해야 합니다. 같은 조선인으로 이것은 아니지요. 글자를 배운답시고 글자체를 모방해서 여성 독립군을 사지로 몰아 넣었어요. 그래, 남편이 걱정입니다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의열단의 그 사람은 워낙 신중한 사람이오. 아내 잃은 슬픔이야 말 할 것도 없지만 복수의 일념 때문에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요. 연락은 되고 있나요? 아뇨. 잠수를 탄 거 같아요. 그러나 놀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때가 되면 임정에 연락을 해 올 겁니다. 그가 제의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도울 생각이지요. 의열단과 임정은 같은 길을 가니까요.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작별 인사를 저의 대원을 대표해 드립니다. 안경너머의 강인한 눈매가 조금 꿈틀거렸다. 선생은 일어나서 휴의에게 악수를 청했다. 놈들에게 조선인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계 만방에 조선독립의 의지를 알립니다. 이번 대동강 작전이 성공하면 외신들도 조선독립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겁니다. 여기 상하이에 있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기자들도 대기하고 있어요.

휴의는 내민 손을 잡았다. 거칠고 투박했으나 온기가 있었다. 어색하고 무거운 자리는 이것으로 끝났다. 밖으로 나왔다. 프랑스 조계지는 북적였으나 쓸쓸했다. 휴의에게 그곳은 삭막하고 어색한 곳이었다. 조선땅이 내 땅이다. 얼마전 경성에서 그는 인사동을 걷고 안국동을 걸었다. 종로통에서 흰옷입은 사람들 틈에 있을 때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총알이 튀고 사람이 피를 흘려며 쓰러지고 자신이 있을 곳은 다름아닌 이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지 조선땅으로 건너는 지금은 되레 평온하고 안정됐다. 심각한 전투를 앞에 두고 있으나 내 땅에서 치르는 전투는 이런 것이었다.

그는 출정식은 이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촐해도 이렇게 조촐할 수가 없다. 내일이다. 내일이면 대원들과 두만강을 건넌다. 무사히 건너서 남으로 남으로 계속 진군해야 한다. 서 너명이 치고 빠지는 전술이 아니다. 소대가 움직인자. 30명이 넘는다. 지난 번 작전에 이은 대규모 파병이다. 휴의는 안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작별할 때 선생 관저에서 보았던 영어책을 떠올렸다. 선생 하기도 힘들구나. 우리야 지시하는데로 따르면 되지만 군사를 훈련하고 지원하고 작전을 내리는 일이야 말로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나도 틈나는 배워야 하겠지. 조선인이 독립을 외치려면 우물안 개구리 여서는 안돼. 미국에 가고 구라파에 가려면 영어가 필수야. 

선생이 영어로 미국인과 직접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때로는 중국어를 쓰고 때로는 일본을 사용한다. 조선어로 죽 말하다가 상대국의 언어로 대화하면 맞은편의 상대는 조금 당황하지 않을까. 길게 보면 우리는 국제 정세에 둔한 면이 있어. 나만해도 무력을 쓰지만 두뇌는 없거든. 일본어나 중국어를 알아 듣는다고는 하지만 능숙하지는 못해. 더 분발해야 할 거야. 더구나 나는 이번 작전의 대장이 아닌가.

시도 때도 없이 영어 단어를 외울수야 없지만 전선이 고요해 지면 한 두 마디 써먹을 시간은 생기겠지. 선생은 독학으로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 나도 해보지 뭐. 그만큼은 못해도 절반만 해도 어디야. 휴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이 이어가자 자신도 말도 안되는지 허탈해서 껄껄 웃었다. 내일 싸움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영어 공부라니. 아무리 영어 없이 조선독립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내 주제 밖인 걸. 하지만 미군고문단을 만났을 때는 절실했어. 통역이 제대로 되는지도 알지 못했고 통역없이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데.

임정의 수장을 모시는 자가 미고문단을 상대할 수 없다니, 참 어이없네. 다행이긴 하지.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느닷없이 자네도 영어 공무하게라고 선생이 말하면서 전해준 작은 책이 휴의의 주머니 속에서 돌멩이처럼 덜그덕 거리고 있다.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날이 오겠지. 그래, 선생은 군사고문단에게 일제를 조선에서 몰아내면 그것이 미국에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태평양 전쟁의 승패는 조선 독립군이 조선땅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 고문단은 워싱턴에 타전을 했고 조선 독립군을 지원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군사훈련과 무기와 전투복. 이것은 어디서 왔나. 선생이 고문단과 협상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번도 조선의 독립이 조선민만의 이득이라고 읍소하지 않았다. 미국에게 엄청난 이득이오. 그걸 왜 현명한 미국인들이 모른단 말이오. 일제를 조선땅에서 몰아내면 미국은 자연히 태평양 전쟁의 승자가 되는 것이오. 군사고문단은 즉시 그 말을 작전사령관에게 보고했고 고문단의 의견으로 워싱턴에 전해진 것이다. 이것이 정치다. 휴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이 조선 독립의 길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여줘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움직일 것이다. 두만강 전투에서 승리하면 미국도 조선독립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고 임정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정식 대화 창구가 되는 것이다. 벌써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정의 이런 움직임을 눈여겨 보고 지원을 강화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간악한 일제를 몰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인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오? 장개석 정부는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첫째는 무기요. 둘째도 무기요. 셋째도 무기입니다.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수류탄과 박격포는 이렇게 해서 휴의의 독립군에 인계됐다.

주석은 무기를 주면서 반신반의 했다. 이것을 쏘고 다룰 준비는 되어 있소? 걱정 붙들어 매시오. 휴의 부대는 미군이나 일제보다 무기를 더 수월하게 쓸 것이오. 선생만 믿소. 조선독립군의 건투를 비오. 승전 소식이 전해지면 그것은 조선에도 좋은 일이지만 우리 중국에도 희소식이 될 것이오.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선생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왜 이토록 군대 양성에 목을 매시오. 내 첫 번째 소원은 조국의 독립이요. 두 번째 소원도 독립이고요. 세 번째 소원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외다. 그렇군요. 그날까지 우리 힘을 합칩시다. 

일제를 중국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우리가 돕겠소. 수류탄과 박격포가 힘을 보탤 것이오. 좋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총칼에 맨손으로 저항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했소. 우리가 삼일운동 당시 모두 무장했다면 벌써 조선독립은 이뤄졌을 것이오. 그렇게 됐다면 중국이 일제에게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그렇군요.

더이상 빈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일은 없습니다. 태극기를 드는 그 손에는 총이 있고 칼이 있고 수류탄이 있을 것이요.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이오. 수류탄과 박격포 가격은 이미 매겨 두었소, 그럴 필요 없어요. 그것은 우리 정부의 무상지원이오. 아닙니다. 미군의군사훈련비도 지급했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오. 이번에 조선 최고의 부자가 거금을 보내왔소. 거드름을 피우는 군사 고문단에게 그동안 훈련에 대한 보답으로 달러를 전달했소. 비웃던 그가 태도가 확 바뀌더군요. 당당하게 받고 당당하게 싸울 것이오. 조선인들이 공짜를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독립에도 공짜가 없습니다. 만약 공짜로 얻었다면 그 독립은 반쪽 독립이오. 그러니 빚없이 온전한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알겠소. 저정해 두겠으나 급한 것에 먼저 쓰고 우리 것은 독립후에 천천히 갚아도 되오. 그 마음 정말 고맙소. 우리 조선과 중국은 하나로 힘을 합쳐 일제를 타도합시오. 동감이오. 우리가 성공적으로 신의주 경찰서를 폭파할 수 있었던 것은 기관총 때문이었소. 백성 일년치 생활비보다 비싼 총이 이번에 제대로 제값을 한 것이지요. 휴의가 떠나고 나서 선생은 휴대장이 이번에도 신의주 사건 처럼 일을 내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는 오늘 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동지들이 사지로 가고 있다. 그런데 어찌 내가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는가.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있다. 어찌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선생은 그런 마음으로 먼동이 트는 아침을 꼿꼿한 자세로 맞을 작정이었다.

그 무렵 무사히 두만강을 건넌 휴의 소대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은하수 물결에 덮여 있던 별들 가운데 하나가 긴 꼬리를 흔들며 남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병사 중 하나가 소대장님, 저 별 보셨죠 하고 물었다. 휴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지난 번 경성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여성 독립군의 혼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고맙구나.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느냐. 그냥요. 오만가지 생각보다 그 생각이 싸우는데 도움이 될 듯 싶어서요. 네 고향은 어디냐. 저기요, 저기 바로 함경도가 네 고향이오. 그는 손가락으로 어둠 속을 가리켰다. 그래 정말 저기란 말이지. 달려가면 곧 사립문을 열고 강아지가 꼬리 흔들며 나온다 말입니다. 그래, 강아지도 키우느냐. 그거라고 있어야 보릿고개를 넘기지요. 암놈이라 지금쯤 새끼를 뱄거나 낳았을 거예요. 제가 여기 올 때 새끼였는데... 그래, 너는 언제 우리쪽에 합류했더라. 일년 조금 넘었어요. 어머니가 걱정하시겠구나. 괜찮아요. 위로 형이 둘이나 있어요. 저 하나 죽는다고 뭐 어쩌겠어요. 그래, 그럼 네가 막내냐. 네. 그렇구나. 어머니 마음은 그게 아니다. 더구나 네가 막내라면 더 그렇겠지. 편지는 썼느냐. 몰래 한 번 고향에 다녀 간 적이 있어요. 잘 계시던데요. 그래도 그렇지. 인사를 했고. 올 때는 못했어요. 워낙 급해서요. 일제가 집집마다 수색을 하더라고요. 황군에 끌고 가려고 남자라면 열 서넛도 잡아간데요. 위로 두 형은 모두 잡혀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아니? 모르겠어요. 엄마는 울고만 계시고.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겠구나. 그래 너는 독립군에 있다는 말은 했고. 아니어라, 그랬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못했겠지요. 중국에 가서 돈 벌어 가지고 온다고 했어요. 그렇구나, 이번 전투가 끝나면 돈 좀 주마. 소대장님, 정말 입니까. 암, 내가 거짓말 하는 것 봤니? 그런데 돈이 어디서 났어요? 응? 휴의는 뜨금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소년 병사에게 줄 돈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좀 기대자. 쉴 때 쉬어야 전투를 할 수 있다. 교통호에 휴의가 기댔다. 소년병은 소대장과 함께 기대기 어려웠는지 보초 교대 시간이 가까웠다면서 자리를 떴다. 

휴의는 기댄 등이 차갑게 느껴졌다. 밤기운은 오뉴월이라도 그렇다. 이슬 맞은 풀잎이 군복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대화가 끊기도 가만히 있으니 산의 강과 산의 바람이 추웠다. 그 날 밤 적의 저항은 없었다. 휴의 부대는 이른 새벽 산을 타고 다시 남하를 시작했다. 며칠 째 일본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휴의 부대는 경찰서 습격이라는 작전을 변경했다.

경비가 강화됐기 때문에 일대일로 붙으면 우리쪽 사상자가 더 크게 일어난다. 그래서 미리 평양으로 내려가 있던 조선청년이 지휘하는 독립군과 연합해 그곳에서 기습 공격을 한 후 경성의 모처에서 모이기로 했다. 또 며칠을 휴의 부대는 산을 타고 이동했다.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일까. 해주와 개성을 지났으나 평양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잠 좀 자두자. 내일은 더 일찍 출발하자. 휴의는 보초만 남겨 둔채 부대원들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그도 나뭇가지를 이불 삼아 누웠다. 

꿈속에서도 휴의는 싸웠다. 깨고 났을 때 휴의는 꿈 속의 일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꿈속의 일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죽은 여성 동지가 살아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서 자신을 깨웠다. 어, 당신은 죽었지 않소? 신문에도 다 나고 난 시체도 보았소. 아니오, 난 죽이 않고 이렇게 살아 있소?

휴의가 소스라 치게 놀라 일어났을 때 눈 앞에는 살아 있다면 권총을 겨누는 여성 독립군이 어른 거렸다. 그래, 내가 좀 더 침착했어야 했어. 아, 왜 나는 그녀를 홀로 떠나 보냈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일차처럼 같이 왔어야 하는데. 휴의는 여성 독립군의 죽음을 자신 탓으로 돌리며 이렇게 자책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꿈속에서도 휴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내내 싸웠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고 위기가 오면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 한 번은 내가 적에게 완전히 제압돼 죽을 목숨인데 어린 소년병이 다가와 덮치려는 자를 뒤에서 쏘아 죽였다. 분명히 죽었는지 죽은 자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엎어졌을 때 휴의는 몸에서 떼어 내면서도 피 한방울 손에 묻히지 않았다. 휴의가 일어났을 때 이번에는 소년병이 적의 조준 사격에 노출됐다. 손으로 총신을 딱 치고 놀라는 왜경을 앞발로 차서 쓰러트렸다.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옆에서 훈련 참관하듯이 지켜보던 미군 특수부대 요원이 물개 박수를 쳤다.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하라는 격려였다. 박수는 상해 임정의 선생도 치고 장개석 군도 쳤다. 독립군은 그것이 신호인 양 더 앞으로 진격하는데 왜경들은 태풍 맞은 가을 나뭇잎처럼 마구 떨어져서는 땅바닥을 덮었다. 일본군은 연전연패를 하고 있다. 한 수 아래라고 깔봤던 자신들의 오판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손에 피가 나도록 땅을 쳤다. 그날 휴의 소대는 일본군 대대급 부대를 전멸시켰다. 

어떤 전쟁사에 이처럼 일방적인 공격은 없었다. 휴의 부대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나 러일 전쟁에서도 일본군이 각개 전투에서 이렇게 참패한 적은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고 싶어서 맷돼지를 본 사냥개처럼 무조건 달려나가고 싶어 안달했다. 당연하게도 이길 줄 알았던 전투에서 지고 만 것의 후폭풍은 이처럼 심각했다. 그래서 마구 총질을 하다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을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빠르게 움직이는 독립군을 지나치고 다음에 들이닥친 일경을 독립군으로 잘 못 보고 집중사격을 했던 것이다. 공격을 받은 일경은 그들이 만주 13사단의 정예 일본군인 줄도 모르고 대응 사격을 하면서 독립군 놈들이 제법인걸, 하면서 더 세게 공격을 퍼부었다. 나중에서야 그들은 그들이 죽인 적들이 적이 아닌 아군인 것을 알고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밖으로 토해냈다. 서로 당했다고 울분을 품다가 오인 사격인 것을 알고는 괴성을 지르고 이번에는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일본 군대의 원산폭격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서로 분하다를 외치면서 이를 갈았다. 그들이 분하다를 외칠 때 휴의는 적진 깊숙이 더 진격했다.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갔다. 빠져나올 때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썰물처럼 빠르게 후퇴해야 하나 발은 말을 듣지 않았다. 추위 때문에 꼬부리고 자느라고 발이 발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당한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독자들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달리려고 하는데 자꾸 뒷걸음질 치는 사태 말이다. 아무리 뛰려고 해도 제자리 걸음이고 어떤 때는 뒤로 밀린다.

몇 초 후면 함성을 지르면서 착검한 총으로 찌르려는 일본군을 이 상태로는 막을 수 없다. 벗어나 깨어나야 한다. 휴의는 그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좀처럼 깨지지 않고 이것은 꿈이라며 자꾸 꼬집어도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반전은 없었다. 도와주던 동료는 사라졌다. 큰 동물에 쫓기는 작은 동물이 형형한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휴의는 그러지 않고 대신 남은 총알을 다 쓰고 죽자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적을 향해 마지막 총알을 발사했다.

다행히 팔은 쭉 펴고 있어서 총을 잡은 손은 자유로웠다. 칼끝이 이마에 스치는 순간 발사된 총알이 적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 피가 쏟아져 나와 휴의의 눈을 강타했다. 이번에는 피를 보았다. 적보다 더 놀란 휴의가 얼굴을 씻자 핏물은 붉은색이 아닌 검고 푸른 빛으로 손바닥을 채웠다. 이게 뭐야, 휴의가 좀 전의 상황보다 더 놀라서 고인 피를 눈 앞에서 멀리 나가도록 손으로 모은 다음 세게 던졌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비병소리가 들릴까, 깨자마자 휴의는 입을 꾹 닫았다.

옆자리 병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소대장 휴의에게 넘쳐났다. 그는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잠은 거의 사라졌다. 별들은 더 낮게 내려왔다. 은하수는 그들을 감싸고 돌았다. 휴의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 이번에는 죽은 여성 독립군 대신 점례를 떠올렸다. 점례는 출품했을까, 출품된 작품은 당선됐을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점례는 일등상을 먹었을까. 이랬을까, 저랬을까 그런 생각으로 휴의는 달아난 잠을 잡지 않았다.

그러나 곧 휴의는 자리에 누웠다. 더 자야한다. 내일의 행군을 위해 오늘의 잠은 필요했다. 앞장서야 할 그가 힘겨워하면 부하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체면은 둘째치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아직 날이 새려면 두 어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휴의는 억지로라도 잠에 빠져야 한다고 다짐했고 다짐한 대로 다시 잠에 들었다.

이번에는 다시 여성 독립군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전투방식과 같은 주장을 하는 여성 독립군이 휴의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적은 수로 많은 병력을 상대하려면 정면승부는 안 됩니다. 치고 빠져야 합니다. 여성 독립군은 소대장인 휴의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그가 쓰려던 작전을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데서는 잘 써먹지 않던 방법을 말할 때 여성 독립군의 얼굴은 반짝하고 빛났다.

적들이 치기 전에 먼저 치고, 치려고 할 때 후퇴해야 합니다. 제말이 그 말이입니다. 그녀는 눈치 있게 행동했고 휴의가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을 따르기 위해 동료들 앞에 가장 먼저 섰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 만주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었다. 그런 그녀가 죽어서 구천을 떠돌고 있다. 시체를 수습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소대장님,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알아요, 용감히 싸우다 죽었어요. 원통합니다. 그 심정 내가 안잘알아요. 남편이 있어요. 남편도 독립군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남편은 저의 죽음을 알지 못해요. 내가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대신 소대장님이 전해주세요. 그래요. 휴의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그 역시 그런 슬픈일을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약속을 지킬지 약속한 순간에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대신 아기는 없어요. 휴의가 망설이는 사이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잘 된 것인가. 아닌가. 휴의는 알지 못했으나 어떤 식으로든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 대신 엉뚱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어서 네 자리로 가야지. 갑자기 휴의의 입에서 반말이 나왔다. 상대도 그렇게 응수했다. 그래야겠지.너는 언제나 네 자리를 지켰다.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아니다.역할을 했으면 내가 여기 있겠느냐. 그러저나 너는 어디로 가느냐. 네가 갈 길은 저쪽이다. 길이 안 보인다. 저쪽이래도. 아, 이제 보인다. 그 말과 함께 여성독립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극랑왕생을 비옵니다.  휴의가 그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 만나면 남편과 셋이서 막걸리 한 잔 합시다. 동지. 휴의는 그런 위로가 여성독립군의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녀를 쉽게 보내지 않았다. 시체를 끌고 온 그들은 산사람에게 하지 못한 화풀이를 죽은 사람에게 했다. 경성역 광장에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땅에서 긴 장대를 바라다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무심했다. 자비를 호소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는 어떤 근심 걱정도 읽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장대 앞에 조선독립군 잔당의 최후를 보라,는 푯말을 붙였다. 그 앞에는 던져도 좋다는 표시로 작은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대개는 그냥 지나쳤으나 일본에 충성심을 보이려는 자 가운데 하나가 돌을 집어 그녀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빗나가자 그는 한 번 더 시도하려다 다른 사람의 눈빛을 보고는 던진 돌의 손을 옷에 쓱 문지르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어떤 자들은 돌 대신 손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손에 쥐고 있던 다른 걸 던지는 자들도 있었다. 욕을 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욕보다 더 큰 욕을 해댔다. 생전 해보지 않은 욕을 하는 자들은 경계를 서고 있는 왜경을 향해 얼굴을 돌리면서 나 잘했지? 하는 칭찬받고 싶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살아서 용맹한 자에게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왜경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록 몸뚱이가 없어 보이지 않았으나 흰옷을 입을 사람에게 하는 태도는 조선식이 아니었다.

무지한 자들의 잔인함이었다. 그들은 나쁜 짓을 하고도 나쁜 짓인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만 못했다. 일본군의 전시효과는 기대에 못미쳤다. 대신 독립군의 전과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경성 일대는 물론 평양까지 오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여러사람의 귀와 입을 거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내용을 몰라 궁금했던 사람들은 사실을 알고는 누가 들을새라 덮어 놓고 눈치를 살폈다. 손을 까부는 시늉은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신호였다.

파다하다는 말은 증명됐다. 산골의 노인들까지도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지지 않고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대를 향해 돌을 던진 자들은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틈에 재빨리 섞여들었다. 부끄운 짓을 나중에 알고 감추려는 행동이었다.

겨우 30여 명의 소대 병력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애초에 무모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세상 이치라는 것이 언제나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만 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적들 편에 섰던 신이 화가 나서 총구를 뒤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선은 언제나 밀고 밀리는 형국이 되고 밀 때 확실히 밀고 밀릴 때 조금 밀리는 쪽이 승기를 잡는 것이다.

휴의는 그러기 위해 이 기세를 죽이지 않고 늘리면서 차근차근 진군해 나가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임정 선생은 휴의를 언제나 그에게 병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라고 주문했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내 목숨처럼 부하의 목숨을 아끼시오. 그러면 병사들은 더 힘을 냅니다. 알겠습니다. 휴의는 손에 든 주먹밥을 반쯤 먹다 말고 상해서 나눈 선생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이걸 다 먹으면 다시 남하해야 한다. 적들과 아직 직접 교전은 없었다.

산과 산을 타고 야간에만 은밀히 이동한 때문인지 적들은 휴의의 은신처를 급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들은 늘 한 박자 늦었다. 차단선은 휴의 부대가 지나간 뒤에 쳐졌다. 그만큼 독립군의 이동시간이 빨랐다는 말이다. 그들은 산양처럼 날래고 지치지 않았다. 평양이 눈 앞에 있다. 대동강이 보인다. 을밀대도 어디가지 않고 온전히 있다. 여기서 전투를 치르고 삼팔선을 돌파하자. 둘러싼 참모들 가운데 휴의가 손바닥 위에 지도를 그리면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듣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조선 땅에서 그것도 평양에서 적들과 한바탕 전투를 한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그 긴장은 승리에 대한 확신보다는 어쩌면 그 전투가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 전투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신의주 경찰서를 치고 빠지는 것과 평양을 거쳐 총독부를 공격하는 것은 질과 양면서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못해 볼 것도 없었다. 총독부 뒤쪽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신의주 공격처럼 당기고 던지고 나서 냅다 도망치면 놈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당황할 것이다.

서늘해진 간담이 식은 뒤에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추격대를 조직한다느니 부산을 떨 것이다. 급습을 당하고 나서 흔히 취하는 그런 행동말고는 대비가 없었던 총독부가 다른 어떤 신묘한 대책을 내놓겠는가. 이번에는 총독부가 당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질 것이고 흥분한 민중은 수군 거릴 것이고 그러면 일제는 더 큰 동요를 막기 위해 강압 책이든 유화책이든 어떤 식으로든 식민지 정책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어떤 결정이든 그것이 비록 당장은 조선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반드시 필요한 공격이라는 데는 삼천만 조선인 누구도 의견이 다를 수 없었다. 이 작전이 마음에 들었던 휴의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명령했다. 날마다 비슷말이 되풀이 됐따. 이른 아침에 출발하니 일찍 자 두어라. 별로 망설이지 않고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각자 자리를 찾아 누웠고 그 결과 오늘은 원래 계획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그들은 미리 와 있던 조선청년 부대와 은밀히 접선하는데 성공했다. 조선청년은 휴의에게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동지는 서둘러 경성으로 출발하는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이것은 휴의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힘을 합쳐 평양을 공격하고 같이 남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작전은 휴의가 미리 결정한 것이었다.

상하이 임정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청년과 합세한 후 둘이 현장 상황에 맞게 결정하라고 지시했을 뿐 평양에서 전투를 벌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점검해 보니 이렇소. 여기는 우리 병력만으로 충분히 치고 빠질 수 있소. 그러니 휴 대장은 그대로 삼팔선을 통과해 경성으로 가시오. 동시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적들에게 더 혼란을 주고 우리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오. 휴의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그 말을 들이니 일리가 있기도 했다. 건투를 비오. 우리도 평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바로 휴대장의 뒤를 따를 것이오. 가서 총독의 목을 따 옵시다. 그리고 조선 독립을 이룹시다.

그때 휴의는 보았다. 조선청년이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악수를 나누고 그의 아내 이야기를 할지 말지를 망설였다. 그도 알 것이다. 임정도 알고 있는데 모를리 없다. 산 속 생활을 여러 달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들었을 것이다. 저, 짐승같은 형형한 눈빛이 그걸 증명한다. 휴의는 잡을 손을 놓기 어려웠다. 조선청년 아내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고 되는양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 아내는 잘 있을 거요? 꿈속에서 봤는데 편안했어요.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당장 떠나시오. 건투를 비오. 건투를 비오. 그들은 같은 말로 서로 위로 하고는 각자의 길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즉시 휴의 부대는 밤의 깊숙한 곳을 서둘러 벗어나 동트기 전에 파주 인근까지 도달했다.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부족한 병참으로 병사들을 급히 몰아친 것에 대해 휴의는 조금 미안했다. 그러나 제대로 먹기 위해 벌이는 일이니 대원들도 용서할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러기를 멈추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효과를 보았다. 딱히 몇 시까지 어디에 도착하자는 정한 시간은 없었지만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기로 했고 그렇게 했다. 벗어나는 지역마다 위험 지역을 돌파했다는 자신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동이 성공을 거듭할 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 독립군에게 이 정도 움직임은 익숙한 것이었다. 서두르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으면서 휴의는 이 정도면 휴식을 취해도 될 만한 장소라고 여긴 곳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쉬어야 전진할 수 있다는 진리를 휴의는 알았기에 쉬었다 갔으면 하는 병사들의 간절한 마음이 들기 바로 직전에 앞으로 나가는 병사들을 제지한 것이다.

여기서 좀 쉬자. 모두 누워라. 그리고 누운 머리를 들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숨을 골라라. 병사들이 그 말을 따르자 휴의도 그들의 옆에 누워서 그들처럼 머리를 들 생각도 없이 흙이 주는 포근한 느낌을 뒷머리를 받았다. 훈련이라는 것이 무섭다. 애초에 오합지졸이 정예군이 됐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게 가능하겠나. 그래, 우리가 살길은 훈련뿐이고 늘 훈련대로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는 일은 즐겁지. 쉬지 못하고 보초를 서면 보초병을 휴의가 교대했다. 소대장이라고 보초 서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미안해 하는 병사에게 휴의는 이렇게 말하면서 가서 쉬어 하고 형이 동생에게 하듯이 애정을 담아 말했다. 

쉴 때도 이동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기습 공격에 전멸하지 않겠다는 전술을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싸움에서 죽거나 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부대 전체가 당하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쪼개기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무엇보다 초병과 보초병의 중요성을 상기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휴의가 잠시 머문 곳은 행주산성이었다. 낯설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휴의는 듣고 배워서 이곳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임진란 당시 왜놈들을 뜨거운 물과 돌로 내리쳐 방어한 곳이다.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나른 돌이 병사의 손을 떠나 기어오르는 적의 머리를 박살 냈다. 뜨거운 물이 옷속으로 파고 들었다. 휴의는 선 채로 앞을 가리는 풀잎을 손으로 쳐내면서 시야를 확보했다. 먼 풍경을 보기 위해서 흔히 하는 행동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조선의 땅은 평화로웠다. 한강은 유유하게 흘러 서해로 내려갔고 들판의 곡식은 풍성한 수확을 위해 푸르게 익고 있었다.

뜨거운 쌀밥 한 그릇을 편히 먹고 싶다는 생각을 그가 한 것은 옆에 있던 부관이 우리 고향 목포 땅에도 벼가 저렇게 익고 있겠지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후였다. 그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족과 도란도란 살고 싶었다. 시절이 하 수상해 이리저리 쫓기고 도망치고 급기야는 군복을 입고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는지 휴의는 분통을 터트렸다. 잘 살았는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살고는 있었는데 쳐들어와서는 백성들을 죽이고 노예로 만들고 강제로 병합해서는 온갖 것을 수탈해 가고 있다. 도대체 하늘에 신이 있다면 이런 자들은 응당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더 잘 먹고 뻐기며 살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의 침략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조선땅을 넘어 만주로 아니 세계로까지 치닫고 있다.

끝모를 침략에 휴의는 모든 시작하는 것은 끝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끝날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앞당기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곳은 고립된 지형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참모들은 불러 모았다. 적들이 우리의 위치를 안다면 퇴로가 없다. 왜 그런 생각이 이제야 들었는지 모르겠다. 급하게 강 너머 삼각산 인근으로 이동하자. 그 말과 동시에 병사들은 안식처로 여겼던 행주산성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서둘렀기 때문에 그들은 땀을 흘렸고 긴장감으로 더 많은 체력 소모가 이어졌다. 휴의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한순간에 병사들을 사지로 몰았던 것을 알고는 자신을 책망했다. 이런 실수 하나가 힘겹게 이어온 독립군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 그는 다짐을 거듭하면서 작전의 실수가 없도록 참모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 하라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자신에게 있고 나희들에게는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저곳에 모인 것은 순전히 자신의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전 병사들에게 고지했다. 지휘관의 위엄을 스스로 깎아내린 것은 위엄의 실추가 아니라 더 나은 결정을 위한 결과로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병사들은 휴의의 결정에 그를 따르는 마음이 더 깊어졌고 상관에 대한 존경심이 더 강해졌다.

그것은 대 놓고 말하지 않아도 눈빛과 명령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시켜 주기만 하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의가 두 눈 가득히 들어왔고 기꺼이 군소리 하나 없이 지시를 따르겠다는 의지가 병사들 사이에서 충만했다. 분명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명령하는 자나 그것을 실행하는 자나 다 같이 기쁘기는 어려운데 지금은 둘이 하나가 될 것처럼 잘 어울렸다. 지휘관과 병사가 이런 마음이니 이럴 때 적들은 강하다 해도 약하기 마련이다.

과연 그런 마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휴의는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정말로 일어나서 뒤를 보았다. 산하는 여름은 붉은 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것이 누가 일부러 배치해 놓은 것처럼 산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이 산하가 나를 부르는 구나. 휴의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 들었다. 그런 감상은 나쁠 것이 없었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는 전선일수록 마음을 다독이는 그 무엇이 필요한데 휴의에게는 그것이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일이었다. 수 천년 내나라 였다가 남의 나라가 된 것이 마음의 동요를 더 일으켰다.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하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그것은 해가 가고 달이 가고 한 해가 지나도 말끔히 씻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 하나 처리해 나가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부하들이 보이는 복종심을 최대치로 끌러 올리는 일이다. 여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명령을 따르는 자들은 그 명령때문에 자신이 위기에 빠지면 태도를 금세 바꿀 수 있다.

그런 점을 휴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기쁜 마음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이것 역시 나쁠 게 없다. 지휘관은 감정의 기복이 있더라도 마침내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압감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심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평상시라면 군기를 잡는다고 빳다를 치면서 호기를 부릴 수 있고 계급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

그러나 전시에서는 그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게릴라 전에서 자발적인 복종심 없는 일방적 명령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어쩌다 작전에 성공했다고 해도 다음 작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적은 수로 강한 적을 상대할 때는 서로 의지하고 믿는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휴의는 자신이 부하들에게 해준 것에 비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두철미한 의식으로 무장된 독립군이라고 해도 때로는 작은 바람에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상하이를 출발해 한 달 간 달려 왔음에도 그들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전진해 오고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오는가. 휴의는 자신도 때로는 이곳을 도망쳐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 때가 있었다. 점례와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토박이들에게 잘 봐달라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인생을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저들에게도 없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아주 많이 시도 때도 들것인데 그들은 어떤 연유로 험악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쉬고 있는는 병사들을 하나씩 흔들어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그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 실제로 흔들려고 옆에 있는 병사의 어깨에 손을 뻗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만두었다. 대답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할 것이고 아니라 한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만두고 하산하라고 등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에 휴의는 헛웃을 짓기도 했다. 갖은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병처럼 문득 점례는 잘 있는가?  그림은 잘 되고 있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는 보란듯이 조선 총독을 해치우고 병사들을 안전한 장소에 모은 다음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인사동을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느끼는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그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다부지고 아름다운가. 나는 화실로 점례를 찾아간다. 마침 화실을 나온 점례와 마주친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손을 잡고 달려나가자. 달려서 지구 끝까지 가자. 휴의는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나도 역사에 남는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싶었다. 그러나 점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손에 수류탄을 든 의열단 소속의 선배 열사가 떠올랐다. 

거슬러 올라가면 1921년 의열단 소속의 그 열사는 실제로 총독부에 잠입해 수류탄을 던졌다. 어이없게도 첫발은 불발이었다. 제일 중요한 첫발이 터지지 않은 것은 의열단뿐만 아니라 조선민 전체에도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을 삼낀 것은 수류탄을 던지고 몸을 엎드린 자신이었다. 기어이 성공하리라고 수 없이 연습했건만 실제에서는 그러지 않자 그는 절망했다. 그러나 열사는 굴하지 않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는데 성공했다.

총독부 이층은 엄청난 굉음으로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마침 그곳을 지나지 않았던 침략자의 수괴는 폭탄의 불벼락을 운좋게 맞지 않았다.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총독 암살이 실패라고 해서 모든 것이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도를 했고 실제로 던졌으며 던진 것이 장난감이 아닌 살상용 무기였다는 사실에 일제는 서늘한 간담을 진정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꼭 성공해야지. 총독 초소를 무사히 돌파하고 관저까지 진입한다면 휴의는 자신의 손으로 총독을 격파하고 싶었다. 총독은 두번째는 운 좋은 사내로 남지 않을 것이다. 휴의는 적의 심장을 향해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 발의 수류탄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 감촉을 느끼면서 손으로 하나 하나 만져 보았다.

세 발을 다 아기 손가락 만지듯이 만져본 다음에는 권총도 같은 방식으로 옷 위로 감촉을 느꼈다. 총구에서 부터 총열과 몸통 그리고 권총 손잡이까지 일일히 만지고 나고 나서 휴의는 성공의 열쇠는 이것이다, 라고 자신에게가 아닌 무기에게 다짐을 주었다. 기다려라. 배불뚝이야. 그때까지 더 나쁜 짓 하지 말고 지금까지 해온 나쁜 짓을 반성하고 있어라. 그래야 조금이나마 죄를 벗고 지옥행을 면할 수 있다.

얌전히 총알을 받기 위해 갑옷은 입지 말고 얇은 잠옷 차림으로 있어라. 옆에는 너의 사랑하는 부인이나 가족 대신 네가 신뢰하는 일급 참모가 있어야 한다. 나는 가족은 해치고 싶지 않다. 너에게도 가족은 소중할 것 아니야. 네 죄가 크지 네 식솔의 죄는 이 순간 용서해 주겠다. 대신 너를 충동질하고 너에게 나쁜 마음을 심어주는 심복은 반드시 너와 함께 구천으로 가는 길동무 삼아야 한다.

저승길도 혼자면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같이 가면서 과오를 더듬어라. 휴의는 이 같은 계획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다. 결과는 늘 이런 식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뒤에는 다짐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작전은 세부적인 것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일의 성공과 실패에 따른 후퇴방법도 정해졌다.

물론 정해진 것이 메뉴얼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피가 튀는 현장은 수시로 상황이 바뀌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갑자기 숨어 있던 사냥개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 그런 것은 현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병사의 손가락 마디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전을 성공하고 나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상하이로 도피해야 한다. 아직 조선 땅에 남아 장기전을 치를 여력은 되지 못한다.

거기서 임정의 새로운 지시를 받고 새로운 계획하에 새롭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휴의는 상하이로 가는 대신 발길을 돌려 인사동에 머물 것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살아남은 병력의 이동은 자신이 아닌 부관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그는 떠나 올 때 임정 선생에게 조선에 남아 총독부 피습 이후 일제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다음 작전에 쓸 보고서를 만들기로 사전에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할 사람은 소년병사였다. 휴의는 소년병사와 함께 총독부를 염탐하면서 조선 내에서 새로운 투쟁 동력을 끌어모아야 한다. 그가 이런 논리로 선생의 허락을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미안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점례가 없었다면 과연 이런 생각이나 이런 작전을 세울 수 있었을까, 휴의는 고개를 저었다. 총독 관저 공격도 점례가 없었다면 점례를 만나려는 휴의의 간절한 마음이 없었다는 가능한 시도였을까.

휴의는 조선의 독립보다 점례가 자신의 마음에 더 깊게 새겨진 것을 알고는 손에 뜨거운 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듯이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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