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층 창가에서 점례는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보았다. 느긋한 사람도 있고 서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할 일 없이 나무 그늘에 앉아 노닥이는 사람들은 나이든 노인들이었다.
더구나 반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고 조선말로 하는 호객행위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왔다. 이것이 평화다. 점례는 비로소 조선에 온 것을 실감했다. 살아서는 밟지 못할 조선 땅에 점례는 이렇게 두 발로 서 있었다. 뒤돌아 보면 모든 것이 극적인 순간이 아닌 적이 없었다. 운명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유마를 만난 것은 그녀에게 생명이었고 빛이었으며 자신을 유지하는 존재이유였다. 다른 것은 다 잊고 벗어날 수 있어도 유마 호사카와 연관된 끈 만큼은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끈은 어떤 경우에도 끊어져서는 안 되는 강철같은 것이어야 하고 점례는 그러기 위해 자신을 더 담금질 해야 했다.
내 삶은 나의 것임과 동시에 유마에 속해있다. 그래, 그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어. 그림을 그리고 삼촌의 환대를 받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유마의 힘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감사함, 고마움은 그런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위해 자신을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점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와 재회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 실력을 보여줘야지. 더 성장한 모습을 보면 좋아할거야. 그는 눈이 있어.예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알지. 내게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밑그림을 그릴 때도 물감을 짤 때도 붓에 그것을 바를 때도 유마의 떠나지 않고 항상 점례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가 와야 한다. 살아서 와야 그녀도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림도 삶도 모두 그의 것에 속해 있다.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그렇게 되기를 점례는 매일 밤 기도했다. 다치지 말게 해주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해 달라고 점례는 빌고 또 빌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유마의 무사 안녕을 기원했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장독대 대신 책상 옆에 냉수를 떠놓고 손을 마주 잡고 빌었고 염주와 묵주를 번갈아 손에 잡고 부처님과 하느님을 찾았다.
어떤 때는 인자한 부처님이 어떤 때는 하느님이 나타났다. 전쟁터에서는 어느 한 신만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기 어렵다. 점례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신을 번갈아 불러 내면서 총알이, 파편이, 독가스가 그의 몸에서 멀리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손발이 닿게 비벼댔던 것이다. 한동안 그러고 나면 꿈자리가 뒤숭숭해도 마음이 진정됐다.
그런 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화구 앞으로 갔다. 그에게서 배운 삽화를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렸고 물감을 칠했고 마르면 덧칠했다. 이 모든 것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마치 접골 아주머니?( 여순 아닌가) 의 굿처럼 신명 나는 일이었다.
마쓰유 삼촌은 점례의 그림에 대해 처음에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명 화가들의 도판이 새겨진 커다란 책자 하나를 들이밀었다.
보고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점례는 책장을 넘기며 본 적이 있는 그림이 나오면 미소 지었고 처음 보는 그림은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았다.
인상적인 그림도 있었다. 자기 마음에 들면 점례는 보고 또 보았고 배울만한 작품이라면서 표식을 해 두었다. 나도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이런 살아 움직이는 눈동자를 그려 낼 수 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삶의 찌든 때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래야 하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응당 그러해야 하는 의무이면서 권리였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마를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힘이 더 났다.
그럴 때면 어떤 영감이 떠오르기를 시작했다. 나라면 사과 옆에 칼을 놓을 것이다.접시 위에는 포크를 놓고. 그 옆에 군침을 흘리는 아이와 그 아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늙은 신사를 넣어야지. 그래야 해. 늙은 남자는 어디서나 욕심이 많거든. 서양사람도 마찬가지야. 그 늙음에 욕심을 더해야 진짜 그림이 되는 거야. 그녀는 이런 식으로 도판위의 그림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이것은 그녀 혼자의 힘이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설명이 뛰어난 도판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평을 외우다시피할 정도로 자꾸 읽고 또 읽었다.
삼촌이 준 것이니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좋은 기회였다.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것은 유마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으며 삼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도쿄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조선미술계에서 그는 최고의 화가로 통하고 있었다. 나를 인정받고 싶다.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 최고의 화가로 부터. 점례는 욕심이 생겼다.
자신을 알아봐준 유마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는다면 지원을 받을 때도 삼촌에게 덜 미안할 것이다. 받은 것의 열 배 이상으로 갚아주어야 한다. 나는 빚지고는 못살아. 내 철학은 그런거야. 점례는 나름대로 예상도 하고 준비도 하면서 삼촌이 준 미술책을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았다.
친절한 삼촌은 점례를 위한다기보다는 유마를 생각해서 자신을 대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내용에 대해 유마가 삼촌에게 편지를 썼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말끝마다 조카가 그랬다, 조카가 했으니 나도 한다는 말을 입에 달았다. 그것은 너 때문이 아니고 유마때문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말이었다. 너는 둘째고 첫째가 유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고 점례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구나 삼촌은 점례가 어떻게 유마를 만났고 어떤 인연으로 자신과 엮이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드러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둘러댈 필요가 없어진 것은 점례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어떤 여자였는지 무관심한 삼촌에 대해 점례는 이 인물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내공의 소유자라고 판단했다. 그래, 과거가 무엇이 중요하지.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데. 과거의 점례가 아닌 현재의 점례만이 삼촌에게 각인돼 있었고 이것은 점례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점례는 그림 한 점 한 점 마다 자신의 느낌을 글로 썼다. 좋은 점과 나쁜점은 물론 총평이라고 할 수 있는 받았던 인상을 자신만의 필체로 써 나갔다. 그림 설명을 다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주관은 없었는지 다른 사람도 객관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지도 따렸다.
그러다 보니 도판에 나와 있는 133점에 대한 평가가 작은 책 한 권 정도 분량에 다다를 정도로 길었다. 어느 날 안국동으로 출타했다 화랑으로 돌아온 삼촌이 가끔 보던 늙은 화상과 그림값을 놓고 흥정을 벌이다 실패했는지 낭패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앉아있었다.
점례는 그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쓴 일기 비슷한 공책을 삼촌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이미 여러차례 언급한 도판에 대한 감사함을 표했다. 이것은 삼촌의 준 책에 대한 저의 보잘 것 없는 기록입니다. 느낌인데요. 좀 거칠어요. 삼촌이 보고 평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이 아니고 글이니 잘 좀 봐주세요. 글은 제 전공이 아니잖아요.
처음에는 시끈둥한 표정을 짓던 삼촌은 두꺼운 노트에 빼곡한 글씨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용은 둘째치고 그 방대한 양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닥치자 뭐 이런일이, 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한 두 줄이 아니라 책보다 더 많은 분량이었다. 삼촌은 놀라면서 대단하다는 인상으로 점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틈을 이용해 점례는 자신이 느낀 감상평인데 형편없다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고 다시 한 번 겸손을 떨었다. 삼촌은 미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르는 사이 점례는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그림에 대해 말을 했다.
이미 글로 적혀 있었지만 말로 한 번 더 설명을 해주는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 말은 글과 또다른 의미가 있진 않은가. 글도 제법 썼지만 점례는 말을 품위있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유마와 생활하면서 다 배운 것이다. 그가 일기를 쓰라고 해서 썼고 이렇게 말하라고 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구사하는 단어도 적절하고 아무나 쓸 수 없는 고상한 표현을 빌려오기도 했다. 삼촌은 유마가 네게 빠진 이유를 알겠다며 방금전의 실망하고 난처한 기분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는 듯히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삼촌은 점례를 활용하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지 그때부터 심사숙고했다. 단순히 조카의 부탁으로 하숙생으로 받은 것에 머물지 않겠다는 심사였다. 반도인이고 거기다 여자다. 여자의 그림은 희소성이 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고 이런 말재주와 글재주 까지 겸비했다면 틀림없이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
삼촌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툭쳤다. 거래가 실패한 것은 다 잊었다. 점례는 복덩어리다. 화랑을 오늘 부터 점례로 인해 번창에 번창을 거듭할 것이고 나는 더 큰 돈을 벌고 그 돈의 일부는 정치하는 형님에게 주고 아, 우리 집안이 조선여자로 인해 커갈 것을 생각하자 삼촌은 욕심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의욕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림과 글이 동시에 된다. 그런 사람은 조선은 물론 본토에서도 흔치 않다. 글이 되면 그림이 안 되고 그림이 되면 글이 안됐다. 그런데 점례는 다 된다. 자신도 못하는 것을 점례가 한다. 신은 공평해서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재주를 다 주지 않는데 점례는 신의 손을 벗어났다. 신도 점례는 예외였다.
삼촌은 점례에게 내가 읽을 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그 자리에서 몇 장을 내쳐 읽었다. 그리고는 이 정도 솜씨라면 잡지에 기고해도 되겠다면서 아는 기자를 당장 불러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점례는 얼떨떨 했다. 기자는 뭐고 또 인터뷰는 뭔가. 아직 점례의 머릿속은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점례는 아직은 일러요. 배울 게 많은 걸요, 하고 사양했다.
개인전도 열지 않은 제가 인터뷰라니요. 하면 삼촌이 해야지요.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의 입에 개인전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솜씨도 그렇지만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겸손하게 거절하고 정중하게 부탁하는 말에 삼촌은 걱정말라는 투로 그런 일이라면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조선에 온지 8개월 후였다. 그 사이 점례는 38여점의 유화와 그 보다 배는 많은 삽화를 그려 놓고 있었다. 삼촌은 틈틈이 그녀의 작업 상황을 지켜봤다. 그때마다 그 역시 그녀에게 개인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다. 그럴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점례의 입에서 직접 그 소리를 듣고 나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그러자고 화답했다. 점례는 그날 저녁 유마에게 편지를 썼다. 유마 호사카는 그 전에 보낸 편지에도 답장이 없었으나 점례는 게의 치 않고 다시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가 그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도착할지 알 수 없어도 점례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에 정성을 더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갔거나 그곳 상황이 나빠져 편지마저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점례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유마는 소식을 받을거야.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능력이 있거든. 편지를 쓰라고 했고 그러마 하고 약속했으니 분명 유마는 내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면 이전의 주소지에 자신의 편지 여부를 묻고 새로운 주소로 보내달라는 부탁쯤은 하고도 남았다.
3개월 전 유지는 세 장의 편지지에 그곳 전황과 자신의 위치 그리고 점례에 대한 이야기를 각각 1장씩 할애해서 썼다. 우리가 이기고 있다. 적들은 크게 패했다. 이제 승리의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는 것이 첫 장에 있었다. 둘째장은 태평양의 어느 섬에 관한 내용이었다. 섬은 더웠다. 너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찰 정도다. 그러나 경치는 그보다 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편지는 중간 정도에서 멈췄다.
그리고 나머지는 야자수와 그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본군 병사, 꼬리치고 있는 점박이 개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그림에 전쟁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나와 병사와 두 마리 점박이 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 장은 네가 없어 심심하다며 보고 싶고 잘 있느냐는 점례의 안위를 걱정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추신으로 삼촌은 좋은 사람이니 믿고 의지하라는 당부의 글로 끝을 맺었다.
다 읽고 나서 점례는 눈물을 흘렸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은 그녀에게 삶의 충만과 애정을 한 가득 품어 주었다. 점례는 서랍에게 꺼낸 유마의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유마의 따뜻한 품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숨소리와 체온이 그리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바르르 떨리는 편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점례는 그 모든 것에 자신을 갈아넣어 화답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안았으나 감정이 격해 오자 그만 편지가 유마인 것처럼 꼭 껴안았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걸 깜박 잊을 정도로 점례는 유마와 자신이 지금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상태 그대로 한동안 그녀는 그렇게 있었다.
네 품은 따뜻해. 유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실제로 그가 그런다는 듯이 목을 약간 위로 들어 올리면서 움츠렸다. 그러자 유마는 그녀가 더 간질거리는 것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 마디 더했다. 가만히 있어. 그래 응 좋아. 명령이라도 따르듯이 점례는 그 말에 복종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숨도 죽였고 그래서 가슴의 고동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크게 울렸다.
감정이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제 그녀는 가슴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런 것은 나중에 그에게 구겨진 것을 보여주면서 형편없는 종이에 쓴 편지를 책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당황하는 그에게 숨기지 못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것이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이 이렇게 했어요. 잠시 영문을 모르는 유마가 어떤 상황이냐고 말 대신 눈짓으로 묻는다. 그러면 점례는 부끄러워하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벌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다. 점례는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바람을 맞았다. 그렇게 그녀는 또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올려다 봤다면 막 감은 머리를 말리는 행위쯤으로 여겼을 것이고 그 머리에서는 봄 바람을 머금은 비누 냄새가 날 것이다.
그녀는 창문은 그대로 둔 채 작은 책상을 끌어당기고는 편지를 그 위에 놓았다. 그와 동시에 펜을 잡은 손이 빨리 무엇이라도 적고 싶다는 듯이 편지지 쪽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쓰는 것을 한 템포 늦웠다. 적기 전에 구겨진 편지를 바르게 펴고는 그것을 한쪽에 밀어 놓았던 것이다. 잡은 펜의 부드러운 느낌으로 그녀는 여백이 검은 잉크로 채워지는 것으로 보았다.
떠나올 때 유마가 그녀에게 가지고 가라고 한 서양식 만년필. 이제 점례의 눈은 백지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는 만년필로 향하고 있다. 고마워. 정말로. 검은 몸통과는 달리 금빛나는 촉의 끝을 잉크에 찍어 바르면서 그녀는 유마의 사랑이 여전히 뜨거운 것을 알고는 놀랐다.
바람이 불어와도 그녀는 달뜬 상태였고 그래서 그것을 누르려고 그녀는 마구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고마운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맨 앞에 적은 다음 그녀는 조만간 개인전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생각해 봤어요. 내가 개인전을 한다고. 정말로 그래요. 내이름으로 개인전을. 꼭 초대하고 싶어요. 그림도 한 점 사주실 거죠. 아니, 거기 걸려 있는 전부다요. 그것도 최고 값으로. 완판이네요. 개장 삼십문 만에 완판이라고요. 점례는 여기까지 적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성과가 좋았으니 대회에 출품하겠다는 뜻도 언뜻 비쳤다. 유마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같은 건 전혀 쓰지 않았다. 그가 웃고 있을 것이다. 입에 시가를 물고 상체를 드러낸 그가 선글라스 너머로 엷게 웃고 있다. 그래, 그 모습이야. 난 안보고도 알아. 당신은 웃고 있네요.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대회 출품도 응원해 줘요. 서투른 솜씨로 망신당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고요.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닌 삼촌의 견해라는 것을 밝혔다.
삼촌이 그러는데 괜찮대요. 겨뤄볼 만한 상대가 많지 않다는 군요. 그녀는 이 말을 적어 놓고 몇 번을 고쳤다 다시 썼다를 반복했다.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표현이 찾으면 더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장 다음에는 한동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 것이다. 유마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뜻 전해 들은 전황에 따르면 유마의 편지글과는 달리 일본은 태평양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구축함이 파괴되고 전투기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삼촌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듣고 오는지 간혹 혼잣말 비슷하게 힘든 전쟁이야, 힘들어 하고는 점례의 눈치를 살폈다.
점례는 전쟁에 관해서는 묻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눈으로 봤던 참혹한 경험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일본이 지면 어떻게 되는지 점례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일본이 질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나는, 그리고 유마는?
점례는 거기까지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삼촌은 일본이 져도 조선에 남아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언제나 조선은 나의 제2 조국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국에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벌려놓은 일이 많은 삼촌은 조선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양 조선찬양을 수시로 했다.
조선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야. 이만한 나이에 이런 업적을 이룬 건 다 조선 때문이지. 그림, 여기 걸린 그림. 이건 약과야. 일본에 보낸 그림의 십분의 일도 안돼. 점례는 삼촌이 조선의 그림을 일본으로 많이 옮겨간 것을 유추했다.
삼촌은 그림 뿐만이 아니라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청자니 백자니 하는 말들이 자주 들렸고 얼마에 사서 혹은 어디서 구해서 인천으로 보낸다는 말을 했다. 거기서 배편으로 본국의 자기 집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불상같은 골동품도 삼촌은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석상이나 금동상 같은 것을 가지고 화랑으로 들고온 적도 있었다.
일본도 조국이지만 조선 역시 그에게는 조국과 다름 없었다. 그러니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그녀는 삼촌에게 의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마 일본이 전쟁에서 지겠어? 하는 안도감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제로 졌을 경우는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이 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한 다음 날 삼촌은 경시청에 갔다 온다면서 종일 화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점례는 한동안 잊었던 전쟁에 대한 생각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잊었던 것이 불쑥 나타나서는 손목을 잡아채서 다시 트럭에 구겨 넣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몸가짐을 더 챙겼고 그림에 열중했다. 실력은 날로 늘었다.
원근법 같은 것은 이제 식은죽 먹기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보이는 사물을 비틀어 현실과 꿈 속의 중간 어디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력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여인의 손이 잡고 있는 옷자락은 방금 다린 것처럼 각이 섰고 날이 잡혀 있었다. 도판의 그림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전쟁이 떠오를 때면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열의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녀가 속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그녀는 이제 알아주는 여류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아니 남자 화가를 포함해 손가락에 꼽는 정도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점례도 알고 있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면 특선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세계의 화가’ 도판에 실린 명작의 기준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일었다. 그녀는 그림의 제목을 생각하는데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어떤 식의 이름을 붙여야 할지 고민했다. 제목도 그림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례는 무제라는 제목을 혐오했다. 그것은 화가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림에 제목이 없는 것은 글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과 같았다.
점례에게 완성되지 않은 작품의 제목은 고상한 것이어야 했다. 완성된 작품에 그대로 가져가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그림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다시말해 한 번 들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제목을 달아야 한다. 처음에 그녀는 ‘천황에 바치는 조선 청년의 붉은 피’ 같은 역사에 남을 극적인 제목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진부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산 사람의 피는 끓겠지만 예술성은 떨어진다고 보았다.
애국 가요의 아류에 다름 아니었다. 모나리자 같은 외국식 이름은 좋았으나 후대에도 이어질 작품치고는 왠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상이 정밀하면 제목도 정밀해야 한다.
조선 청년이 전투를 막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등을 보이고 있으나 총을 잡은 손에서 근육이 꿈틀거린다. 다음 전투도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그래서 천황에게 한 충성으로 맹세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그래 이런 그림은 좀 가슴을 뜨겁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해. 조선청년은 필히 들어가야 하고. 이번엔 좀 간단하게 갈까. 조선 청년의 승리에 대한 각오. 각오 앞에 피끓는을 넣었까. 점례는 오늘따라 제목이 잘 나오지 않자 고개를 저으면서 제목은 그림이 완성되면 정하자고 뒤로 밀어놨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점례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거울속의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뽐내는 듯이 얼굴을 이러저리 돌려 보았다. 흥, 나야 실제가 더 이쁘지. 그녀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점례는 이제 완연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선 팔도강산에서 누구도 그녀의 기품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루가 상쾌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하는 일도 진척이 있고 여기 일도 이제는 편안할 정도로 안정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때 사람들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는 법이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유마가 이런 머리 스타일을 좋아했지. 뒤로 땋아서 들어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습을. 이것은 일본 스타일이아닌 조선스타일이야. 유마는 조선을 좋아해. 그래서 나도 좋아하나 봐. 점례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거울을 당겨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마의 잔털이 막 들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은빛 비녀 역시 은은한 색으로 물들어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본국의 여자들도 이랬으면 좋겠어. 언젠가 그는 점례가 오늘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상을 물리자 이런 말을 하면서 조선 여자들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점례는 그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비교하는 것 같아 그렇게 좋아하는 시늉을 하지는 않았다. 입을 샐쭉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자신이 보아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 역시 유마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패션의 품평이 세련됐고. 그는 예술가의 기질이 충만해. 그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유마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고 쓴 내용을 한 번 더 다듬어 보았다. 전선의 유지가 기뻐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당신이 칭찬했던 그 스타일로 머리 모양을 냈으니 상상해 보라고.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이니 어디서든 나를 만나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사랑하는 당신. 나는 이곳에서 전쟁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당신의 고마움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당신을 두고 나만 홀로 와서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당연히 미안하겠지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웃음을 주세요. 살아 돌아와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꼭 약속해요. 당신은 전쟁보다는 예술을 해야 합니다. 총은 어울리지 않아요.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제 길 대신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최전방을 고집한 당신의 천황을 향한 충정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전선에서만 꼭 애국하는 것은 아니 잖아요. 당신은 도쿄나 조선에서 얼마든지 애국할 수 있어요. 총칼 대신 펜이나 붓을 잡아요.
그러니 아버지께 연락해 이곳으로 속히 오세요. 제 욕심만 차린다고 나무라지 마시고요. 살고 나서야 애국도 있고 예술도 있는 겁니다. 아녀자의 섣부른 호소라고 여기지 마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더 큰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점례는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흘러 더는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창가는 이제 훤하게 밝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 익숙한 소란이 일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다시 창가로 갔다.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과연 분주히 움직였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볼때마다 흥미로웠다. 저들은 각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속에 유마가 있어 자신을 찾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유마를 데생하고 싶다. 주변은 흐릿하게, 그는 뚜렷하게 윤곽에 힘을 주면 좋은 풍경이 될 것이다. 눈물을 닦은 점례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마무리를 서두르고 싶다. 더 길게 늘어지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편지를 끝내면 좀 전에 구상했던 것을 하자.
그래야 심란한 마음의 혼란이 가라앉는다. 내 생각은 충분히 정리했다. 결정은 그가 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는 언제든지 귀국을 할 수 있고 전선에 더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는 아니 그의 아버지는 힘이 있다.
그가 비록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벙커에서 작전을 지시하는 대장 역할을 한다고 해도 위험은 언제나 가까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경성에서 점례 마사코 드림.
점례는 점례 뒤에 마사코를 붙여넣어 유마가 자신에게 준 일본식 이름을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모른다. 편지를 가지런히 접은 다음 점례는 종이 한 장을 더 폈다. 비녀가 드러난 그녀의 옆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편지만 달랑 보내면 성의가 없다고 나무랄지 모른다.
연필을 잡은 점례는 거침없었다. 쓱쓱 힘차게 붓질을 하듯이 손을 놀리자 어느새 자신의 옆 모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눈동자를 그릴 때는 조금 정성을 들였으나 나머지는 거칠은 상태로 그대로 두었다. 유마가 보고 평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들고 일찍 집을 나섰다. 광통교 다리 아래까지 왔을 때 아침을 물린 부지런한 아낙들이 설거지나 빨래를 하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청계천은 아낙들의 다듬이 소리와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점례는 눈을 돌렸다.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엉겨 붙은 초가집과 그 집들과는 달리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거로 엉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점례는 인사동에서 경성우체국까지 걸어갈 참이었다. 그녀는 간혹 마차나 전차를 타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보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조금 거리가 있지만 우편국까지 걸어가고 있다.
오가는 남루한 행인들의 모습과 잘 차려입고 뽐내며 걷는 신흥 부자들의 모습 역시 초가집과 기와집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말로만 듣던 모던 걸이 지나갈 때면 점례의 시선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양복에 지팡이를 든 신사는 인력거를 끄는 잡부들과는 결코 한데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지근 거리에서 함께 있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우편국 앞에서 점례는 잠시 머뭇거렸다. 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경성 우편국 건너편으로 미쓰코시백화점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그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송구스러워했다. 자신의 발걸음이 행여 안에 있는 귀중한 물건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서둘러 위압적인 건물 앞을 지나쳐갔다.
그들을 시야에서 떠나보내자 대각선으로 조선은행이 보였다. 점례는 만주를 거쳐 경성역에서 마차를 타고 올 때 느꼈던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자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음산한 날씨가 몰려 올 때 느끼는 신경통 환자의 느낌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당당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밖과는 달리 포근한 느낌이었다. 사무원들도 안정적으로 제 일을 했고 점례역시 편지를 붙이는 일을 쉽게 마무리 지었다. 접수 받는 여직원이 점례가 보내는 주소를 보고는 전선에 계시는군요, 한마디 했을 뿐이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점례는 우편국을 나왔다.
원래는 다시 화랑으로 가는 일정을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고 남산을 가기로 했다. 따뜻한 마음이 점례의 마음을 그리고 이끌었던 것이다. 한 번은 오르고 싶었던 길이니 시간 있을 때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시장통에서 국밥을 말아먹었다. 경성역에서 보았던 남대문 시장안쪽으로 들어가자 많은 인파들이 오고갔다.
점례는 물어 물러 남산을 올랐다. 생각보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딱 그 수준이었다. 정상에 올라선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총독이 있는 경무국앞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유마가 있어야 할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저곳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꼭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오면서 보았던 신사쪽을 향해 참배를 했다. 그녀 말고도 신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는 일행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성만큼이나 점례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두 손을 세우고 손끝을 입술 가까이 대기를 여러차례 되풀이 했다.
그런 정성이 효과를 본 것일까. 유마에게는 좋은 일이 닥쳤다. 그는 또다른 전선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에 점례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극적이었다. 사이판의 전선에서 조선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을 때 유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말 점례는 대단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찌알았을까. 벌써 난 두번째 부대를 이동했어. 군함도 탔고 비행기도 탔고 그리고 짚차는 수도 없이 탔지. 그런데 용케도 내가 있는 이곳에 그녀가 편지가 도착했다.
참, 세상은 요지경 속이야. 이런 난리통에서 편지가 오다니. 어떻게 이것이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한동안 유마는 편지를 든 채 멍하니 있었다. 그는 급할 것이 천천히 편지를 개봉했다. 접어진 편지 역시 펼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급하게 아래까지 단번에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음미하듯이 읽었다.
흡족했다. 이런 내 모습을 점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용도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그린 삽화는 더 마음에 들었다. 유마는 멀리서 남이 봐도 웃는 사람인 것처럼 입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편지를 든 채 모처럼 혼자 자기 방에 들어가 크게 웃었다. 그가 살아서 여기를 빠져나가 할 이유가 보다 더 분명해졌다.
전선이 밀리고 있을 때 이런 짓은 무모했지만 유마는 그렇게 했다. 너무나 기쁘고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애초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볼수록 빠져 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장 파리의 거상들이 서로 사려고 앞다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체취를 점례는 화폭에 표현했다. 모방의 단계를 벗어나 확실히 자신만의 화풍을 가슴에 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조선 제일의 화가를 넘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될 것이다. 사람 볼 줄 알았던 유마는 자신보다 점례가 치고 나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했다. 아무렴, 괜찮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경쟁하면 서로에게 이득이다. 그런 확신이 유지를 웃음과 환호의 상태로 만들었다. 그림에서 눈길에 떼고 글자에 눈을 고정 시킨 유지는 그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껴안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전쟁의 승리보다도 당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요. 내게는. 불순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유마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당신의 안위에 눈길이 머무는 동안 그리운 나의 점례라는 말이 절로 입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 흔해 빠진 그래서 마음속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조국이니 명예니 천황이니 하는 구호보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소중한 당신, 속히 내게로 와요. 당신에게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은 총대신 펜을 들어야 하고 물감을 칠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다마다. 그 말을 모를까봐. 내가 바보야, 난 바보아냐. 바보 아니라고. 그는 환장해서 미친사람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 못해 따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실된 것이다. 유마는 집단 체면의 광기에서 자신이 한 발 빠져나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바람직한 것이고 빠를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런 나를 비웃지 말아 달라고 점례는 호소했다. 아녀자의 속좁은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왜 내가 너를 비웃니? 난, 전쟁이 싫어. 예술이 좋단 말이야. 그리고 충분히 했어. 참의원 아들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전쟁에서 공을 세웠어. 무려 6년동안 난 전쟁터를 누볐어. 자원해서 전투병과에 왔고 사이판의 최전선에서 미군과 맞서고 있다고. 이런 나를 누가 감히 비난하겠어.
유마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지. 해답을 준거야. 점례가 바로 내 구세주야. 흔들리는 방향을 조선으로 돌리게 한 거야. 암, 백 번 이해하고 말고. 작은 부상이지만 부상을 당했어. 난 부상자라고. 그래서 전역하는 거야. 더 싸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선으로 가는 거야. 거기서 점례와 함께 싣컷 그림을 그리고 파리로 떠나야지. 내 가슴에는 적에 대한 증오보다는 예술혼이 더 세게 타오르고 있어. 그걸 누가 끄겠어. 못끄지. 절대 못꺼.
조국을 위해 산화하라고 했으면 편지를 찢었을지도 모른다. 유마는 갈수록 점례가 좋았다. 떠어져 있으니 가치가 더 커보인다. 당장 만나서 못다한 회포를 풀어야 한다. 방에서 나온 유마는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이미 유지는 유마는 본국 철수를 명받고 상해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의 짐이야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더 꼼꼼히 점검했다.
점례에게 줄 그동안 그렸던 삽화와 유화와 그녀에게 배운 자수 솜씨로 만든 흰 천에 그려진 자신과 점례의 모습. 자수를 뜰 때의 그 정성을 회상하며 그는 여전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마워, 아빠. 부상이라는 말 한마디에 아빠는 나를 전역자 명단에 넣었어. 내 책임이 막중하지만 나보다 더 열성인 군인은 많고도 많아. 그들은 나의 전역을 환역할거야. 이렇게 유마는 짐을 만지작 거리면 흥얼거렸다. 그는 계속 흥얼거렸다. 어깨를 흔들기도 했다.
부하의 찾는 소리가 없었다면 유마의 그런 행동은 얼마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그는 곧 표정을 바꾸었다. 웃던 얼굴은 금세 초조한 사람의 기색으로 바뀌었고 곧 쏘아보는 눈빛으로 변하더니 무슨 일인지 입으로는 물었다. 혹시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럴리야 있겠어. 과연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부하의 말은 지금 당장 베이징으로 가라는 본국의 명령을 신속히 수행하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곧 죽을 자 앞에서 살아서 돌아가는 자가 해서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겉으로는 표정을 엄하게 하고 속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웃음을 감췄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유마는 그 말을 듣고 하려고 했던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편지를 행운으로 간직했다. 그녀는 나에게 행운을 준다. 행운의 여인은 이런 모습으로 오는 거지. 그가 일장기를 단 검은색 군용 차량에 오를 때 유마는 여전히 냉혹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웃음기 사라진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는 마지막 인수인계를 마친 후 그를 배웅하는 후임 대장에게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출발 전에 한 번 더 업무를 숙지시켰다. 못 미더운 표정을 지은 것은 자신이 떠나는 것은 신상의 안위보다는 더 큰 대업을 위한 것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마의 다른 한 곳은 미안함과 자신만 사지를 벗어난다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그래서 트럭대신 군용기가 왔으면 했다. 그러나 비행기 지원은 쉽지 않았다. 비행기라면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텐데. 트럭에 오르고 나서도 대장과 부하들은 일렬로 모여서 경례한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저들 가운데 몇 명이 살아서 돌아올까.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유마는 죽음이 겁내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거짓말이 아닌 진짜다. 죽으면 죽는 거고 그럴 때까지는 싸워야 한다는 젊은 피를 재우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진해서 최전방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해 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서서히 변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점례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니 점례가 없었더라도 이제 그는 전선을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하고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점례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고 그는 불길이 잡히기 전에 어서 사이판을 떠나야 했다.
예술에 대한 열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충만했다. 그는 이미 수백 장의 삽화를 완성해 놓았다. 전쟁의 참상에 관한 것도 승리에 대한 환호의 순간을 기록한 것도 그 찰라를 예술로 승화하는 것도 모두 군대서 배운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았다. 그 즈음 본국의 아버지에게 유마는 긴급한 상황을 알렸었다. 부상을 당했다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그래도 신경은 좀 쓰인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외아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노심초사했던 아버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이판 최고 사령부에 연락을 넣었다. 유마 육군 대장을 당장 전역 시켜.
연락을 받은 총사령부는 유지 대장에게 당장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황을 근거리에서 모시면서 일본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는 그 명령을 접수하고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그는 유마가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경성에 잠시 머물 거라는 연락을 받고 조선 여행을 결심했다.
그는 동생이 운영하는 화실도 구경할 겸 조선 나들이를 위해 5,6 명의 동행자를 꾸리고 조선길에 올랐다. 그가 조선에 도착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유마도 조선에 당도할 것이다. 부자는 재회의 순간을 기다렸다.
-휴의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았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함께 했던 동지 두 명과 전략상 헤어졌다. 전략상이라고 했지만 조선청년은 오래 은신하면서 건강을 회복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고문 후유증은 상당기간 요양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긴 것은 타고난 그의 체력이었고 배짱 때문에 가능했다.
동지라고 불러도 되겠지. 조선청년이 악수를 나누며 휴의에게 말했다. 물론 너는 내 동지야. 살아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모르지. 운명의 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고. 나는 너에게 두고두고 사죄할게. 한 인간의 신념을 고문으로 꺾으려한 내 우둔함을 비난해줘.
아니야. 넌 이미 속죄받았어. 내가 용서했거든. 당사자가 용서했으니 절대 마음에 두지 마.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그 마음으로 이겨내길 바래. 어려움이 닥치면 나를 고문하던 그 잔인한 마음으로 돌아가봐. 그러면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일거야.
넌 그런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뭐, 그냥 책도 보고 다른 사람 말도 듣고. 그런거지 뭐. 넌 어디로 갈 거야. 일단은 토벌대 추격을 피해야 해. 그들은 워낙 강해. 토벌대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보다 더 악랄하게 독립군을 탄압해. 베이징에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추격대로 날 쫒을 거야. 그의 집념을 난 알아. 내 가죽을 벗기고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가 없을 거야. 당분간 만주를 떠나 국경을 넘어야지. 나도 내 철학이 필요해.
그렇지.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거든. 당장 일본군에서 독립군으로 옷을 갈아 입었으니 그런 마음의 정리가 꼭 필요하지. 이론이 없는 실천은 모래성으로 금방 무너져. 나를 지탱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씀. 그래, 알았어. 우리 너무 떠들었다. 여기서 헤어지자. 그러기 전에 넌, 고향이 어디야? 난 밀양 사람이야. 너는 난 보령. 그렇군. 살아 있다면 언젠간 만나겠지. 그땐 독립된 조국에서 술 한잔 하자. 잘가라 동지. 잘가 동지.
국경을 넘은 휴의는 배고픈 개처럼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정말로 그랬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한끼를 채울 식량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구석진 곳만 돌았으니 음식은 쉽게 그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 이었다. 스스로 자처한 이방인이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쓸쓸함으로 객사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어쩌다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 걸리면 휴의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동물이 아닌 것에 안도했다. 난, 사람이라고. 동물 아냐.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그는 버텨냈다. 어떻게든 살아와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간혹 조선인을 만나면 휴의는 시베리아 강제 이주 한인으로 행세했다.
때에 따라서는 남만주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혈혈단신 조선을 떠나 온지 십 년이 지나 이제는 고향 생각 같은 것은 나지도 않는다고 둘러댔다.혹시 모를 첩자나 일경의 끄나불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도피생활에 지칠 즈음 그는 어렵게 임정 요인들과 끈이 닿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쫓고 쫓기는 삶에 대한 환멸을 아직 떨치지 못할 때였다. 그들이 먼저 휴의에게 다가왔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면서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런 제의를 한 자가 토벌대 사복요원인지 아닌지 휴의는 의심하는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휴의는 지쳐 있었던 것이다. 먼저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나를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 나를 알고 그런 말을 하지요. 믿지 못하니까 제의하는 겁니다. 믿었다면 동지하고 덥석 손을 잡았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갑시다. 가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눈으로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하지만 휴의는 그 날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이 알려준 주소와 접선 방법 등을 숙지한 후에도 한동안 홀로 지냈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토벌대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받아 줄지 모른다. 그래, 등따뜻하고 배부른 토벌대로 다시 돌아갈까. 돌이켜 보면 잘못한 것이라고는 대장님도 짐작했겠지만 이미 죽은 청년을 풀어 준 것 뿐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그러면 남은 것은 사전 보고 없이 부대를 이탈한 죄가 전부였다. 물론 이것 저것 뒤집어 씌운다면 살아 남기 어렵다. 토벌대장이 그렇게 어리숙한가. 아니다. 어리숙하지 않으니 그걸 이용할지 모른다. 받아주면서 역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립군에 대한 첩보를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어떤 경우에도 독립군 토벌이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믿었다.
살려주려고 마음먹으면 죽일 이유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내친 김에 그들을 따라 가서 임정의 아지트를 불어 볼까도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자신이 일부로 꾸민 자자극이라고 둘러 댈수도 있다. 대장께 보고 하지 않은 것은 상황이 급했고 아직 베이징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가 믿어 줄까. 결과가 좋아 임정의 우두머리나 아니면 간부급을 체포하면 그동안의 죄가가 사라진다. 그러나 의심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배고픈 고생은 그를 과거의 편했던 시절로 이끌었다. 쫓기는 삶보다는 쫓는 삶이 좋았다. 눈알을 부라리면서 억압하는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휴의는 그런 결정을 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조선청년 같은 신념은 없어도 자신이 조선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조선사람이 왜 일본사람 편에서 조선사람을 잡아들이냐는 질문에 휴의는 여전히 마땅한 답을 차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청년은 조선 사람이었고 가슴 밑바닥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흘러 내렸다. 휴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미워졌다. 완용같은 인물과 토벌대장이 뭐가 다른가. 그는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면서 임정 요원이 알려준 국경 근처의 비밀 장소를 찾았다. 그곳은 상해 임정의 임시 거쳐 였으며 새롭게 마련한 안가였다.
접선을 한 지 삼 일 만이었다. 그러기 전에 휴의는 독립군 아지트를 여러번 스쳐 지나가면서 자신에게 닥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최후까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으나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는 독립군 일원이었다는 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정은 휴의를 철떡같이 믿었다.
그래서 그를 요긴하게 쓰기 위해 아껴 두지 않았다. 그도 궂은 일을 자청했다. 위험하고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작전에는 언제나 휴의가 참여했다. 전투 지휘를 하고 왜경을 암살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신참을 훈련 시키고 정규군으로 키우는 일도 휴의가 담당했다. 그는 활동가였다. 처음에 임정은 그를 철썩 같이 믿지않고 일제의 밀정으로 여겼다. 임정은 어쨌든 그는 활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밀정이라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이었다. 일거리는 주로 잡혀도 아무 문제 없는 하찮은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진심을 읽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의 선한 행동이 요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한 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는 약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었다. 자기보다 급한 사람에게는 밥을 양보했다. 옷을 주고 신발을 내주었다. 이런 사람은 옳은 일이라면 쉽게 배신할 수 없다. 임정의 선생은 보는 순간 그의 선한 눈을 마주하고 그는 밀정이 아니라는 확신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직감이라는 것은 때로 필요하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것이 쌓아 놓은 첩보를 앞지르기도 한다.
업적이 쌓여갔다. 임정은 그를 믿었다. 토벌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러번 목숨을 잃을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번번히 살아 돌아왔고 전과를 올렸다. 전투에 나가서는 부상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다. 현장을 보지 않은 요인들은 그 말을 작전에 투입됐던 동료들부터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휴의를 추어 섬겼다.
한 두 번도 아니어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전투는 수시로 이어졌고 죽어 나가는 대원들도 많았다. 생사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진실된 것은 없었다. 산발적인 전투는 일본군을 괴롭혔다. 미군이나 영국군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데 조선 게릴라와 싸우는 것은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같은 나라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고 사령관은 토벌대장을 윽박질렀다.
너희 반도인들 때문에 우리가 수세에 몰린다면 넌 어떻게 책임질래. 그리고 우리 대원이 이탈해서 독립군쪽에 있는데 여태 체포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넌 도대체 뭐아는 놈이다. 일본인 사령관은 토벌대장을 세워놓고 조인트를 깠다. 부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지만 사령관은 그만큼 독이 올라 있었다. 일본 육사 후배인 토벌대장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장은 휴의를 잡는 자에게 큰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휴의는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신출귀몰하게 적들을 괴롭혔다.
젊고 혈기왕성한 그는 독립열망에 사로잡혔다. 처음 토벌대에 들어와서 해했던 그 무모한 용기를 독립군에 쏟아 붇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길로 이끌었는지 그는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겼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한 반발심은 아니었다.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성직자 같은 본보기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독립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조선인 토벌대장 밑에서 이인자 노릇을 하던 휴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 때의 실수 였으나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될 것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침묵하기보다는 행동으로 갚아 나갔다. 그럴 때마다 고문으로 살점이 뜯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했던 청년을 기억해 냈다.
그에게서 그가 감화를 받았다면 조선인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조선인이 왜놈을 위해 충성하는 것에 대한 직설적인 거부감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휴의는 조선청년 말고 또다른 사람을 자주 떠올렸다. 바로 점례였다. 떠올린 것은 점례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점례는 그의 가슴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경성에 가면 만나리라. 일본으로 돈 벌러 간 그녀가 만주에서 화가가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점례를 확인하고 싶었다. 종로 화상을 수소문하면 그녀의 존재는 쉽게 파악 될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경성행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도 방법은 있다. 그러나 임정도 그렇고 휴의 자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제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독립군과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에 질렸는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망타진을 선언했다. 때려잡자, 독립군 이기자 토벌대. 그들은 작전에 나가기 전에 이런 구호를 외쳤다. 한 번은 휴의가 안가를 나와 시내를 돌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런 외침을 듣고는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그들은 이제 전선을 시내 쪽으로 좁히며 압박해 왔다.
임정과 독립군에 대단한 현상금이 걸렸고 누구든 독립과 관련된 조선인을 잡아오면 포상하겠다는 포고문이 만주 시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만주에서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다시 상해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토벌대의 일부도 상해로 접근했다.
임정은 몸을 사렸다. 꼭꼭 숨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독립자금은 바닥이 났다. 밀정을 파견할 기차표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화와이의 동포 들이 보내는 자금과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마른 하늘의 단비와 같았다. 그러나 날로 커지는 조직을 갖춘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적단 처럼 민가를 습격하거나 은행을 털 수도 없었다. 독립군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행동할 수 있는 독립자금이었다. 그 때 소식 하나가 휴의의 귀에 들어왔다. 조선의 거부가 거액의 자금을 헌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경성에 잠입하는 임무를 휴의가 맡았다. 거부를 만나 거금을 가지고 다시 상해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정은 고심끝에 휴의를 선택했고 그와 동행할 인물로 젊은 여성을 추천했다. 이 여성은 일제에 부모를 잃은 원한을 품기 위해 자발적으로 임정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남은 생을 원수를 갚는데 쓰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음식이나 빨래며 부상병 치료까지 손이 안가는데가 없었다. 안경쓴 임정의 지도자는 경성으로 떠나기 하루전 둘을 한 자리에 불렀다. 동지들, 이 번 일은 우리 조선의 독립운동에 있어 중요한 임무요.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바라오.
그러면서 그는 손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러 휴의에게 주었다. 그러기 전에 여성에게는 봉투 하나를 주었다. 공작금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단발머리 대신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공손하게 봉투를 받았다. 그래야지요. 받드시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겠어요. 여성이 당당하게 말했다. 인순 동지. 휴 동지와 함께 꼭 성공해서 오시오. 지도자는 두 사람을 양쪽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우리 정부의 공식 일정이요. 국무위원들의 승낙까지 다 받은 사안이니 책임감 있게 해 나가시오.
휴의는 여성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부부지간으로 위장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중 여성은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했다. 난 휴 동지와 결혼했으니 두 남자와 결혼한 셈이군요. 정말요. 휴의는 놀랐다. 그래요. 작년에 결혼했어요. 남편도 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조직에 몸 담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임정과는 거리를 두고 있고요.
그렇군요. 전 아직 솔로 입니다. 결혼할 여자도 없고요. 좋은 시절이 오면 친구를 소개할게요. 신념이 있고 무엇보다 잘 생기셨잖아요. 인순 동지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휴의도 따라 웃었다. 달리고 달린 기차는 조선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를 머물다가 마침내 신의주를 출발했다. 드디어 경성에 가고 있다는 생각에 휴의의 신경은 갑자기 점례에게 쏠렸다. 그녀를 어떻게 만날 것이며 만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임정 지도자에게도 이것은 비밀이었다. 임무를 완수하든 그렇지 못하든 어쨌든 그는 점례를 만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기차는 평양에서 멈췄다. 잠시 하차한 일행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태평한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 찬 헌병들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더 빨리 움직일 것을 종용했다. 군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 무리의 경찰이 박자를 맞추면서 역 구내를 순찰했다. 휴의는 저 무리 속에 완용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하면서 그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이제 완용은 친구가 아닌 적이다. 만난다면 적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는 일제 조선인 경찰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일제는 그를 거물로 키우기 위해 경성은 물론 조선 팔도로 파견을 보냈고 최근에는 만주 관동군을 돕기 위해 그 지역 시찰을 동행시키기도 했다. 군경이 한 몸이 돼 만주국을 완성하고 독립군 잔당을 소탕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임정도 완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숙청 대상 일호로 선정하고 반드시 뽑아야 하는 손톱밑은 가시로 완용을 지목했다.
휴의도 어렴풋이 완용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이곳까지 마수의 손길을 뻗쳐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눈앞에 두고 휴의는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의 죽마고우로 자신을 군에 입대시킨 완용에게 그는 총을 겨눴다. 완용도 그에게 맞섰다. 토벌대장으로 부터 휴의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잡아 변절자를 혹독하게 다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