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7 06:51 (토)
섬 전체가 굉음 소리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상태바
섬 전체가 굉음 소리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8 1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신은 하찮은 존재였다. 하찮은 존재보다 더 보잘것 없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버려진 물건 신세였다. 여순은 무너지는 것이 무엇이지도 모르고 스스로 무너졌다.

무너지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그것은 무엇이 문제 인지 모르는 무기력이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무엇을 재고 따지고 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고민은 사치였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허물어지고 나서 물먹은 스펀지처럼 몸이 쳐졌다. 사냥개에 한참을 쫒기다 이제 벗어났다 싶었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어린 양이 되었다.

마구 도망쳐 왔으나 갈 길은 양은 우두커니 거기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상태는 오래 지속됐다. 마치 이곳에 내리는 비처럼 한동안 멈출줄 몰랐다.

모든 것이 무자비했다. 사람도 비도 그랬다. 남양군도 어디에도 자비는 없었다. 죽죽 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정말로 비는 끊어지지 않고 빨랫줄처럼 길다랗게 쏟아졌다. 멈출 때가 됐는데도 도무지 멈출줄을 몰랐다.

하루 이틀 내리다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비는 난생 처음이었다. 모든 처음이 두려운 것처럼 여순은 폭우에 또다른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다 쓸려가는 것은 아닌가. 군인들이 행군하는 연병장은 배가 떠다닐 만큼 물이 불어났다.

저녁이 되면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거기에 포 소리인지 천둥소리인지 모를 굉음까지 더해지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는 한 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았다. 포소리도 그렇고 비도 그렇고 번개도 그랬다.

조명탄과 번개는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조명탄이다 피해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밤을 낮과 같이 밝히는 하얀 꼬리를 물은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아무 소리 없이 문가가 번쩍 대고 뒤이어 문이 흔들릴 만큼 소리가 나면 번개였다.

여순은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잡을 수만 있다면 손을 뻗쳐 잡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서쪽 하늘 아래서 번쩍이다가 어느새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하늘을 갈라놓는 번개를 잡으려고 밖으로 나오기 까지 했다.

번개맞아 죽었으면. 벼락 맞아 뒤질년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뒤질년이 아니라 뒤진년이라도 상관없다. 모든 것은 변했다. 그렇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너무 짧아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한 달이 됐나, 그러나 여순은 백만년 같은 세월을 느꼈다. 누구도 내 편은 없었다. 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말 거지 같은 삶이었다. 모기는 또 어찌나 많은지. 뭔가 좀 생각할라치면 어김없이 나타난 모기는 손등이며 목뒤며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크기도 엄청커 모기가 아니라 파리 몸통처럼 굵은 침을 가졌다. 왠만해서는 그것들은 달아나지 않았다. 때려서 잡아야만 침을 뺐다. 손등에는 피가 흥건했다. 정말이다. 핏자국 정도가 아니라 핏덩어리가 모기 사체와 함께 손등에서 나뒹굴었다.

정말이지 싫었다.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돈, 그래 돈은 좋다. 가끔 돈 아닌 종이쪽지가 온다. 그 쪽지에 도장이 찍히고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가면 돈으로 바꿔 준다고 했다. 어디로 가지고 가라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그곳에 도장이 찍히면 기분이 좋았다. 모기 때문이라도 제명에 살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은 빈 칸에 도장이 채워질 때면 그래도 살아봐야지 하는 의욕이 살아났다. 모순이었다. 정신은 혼란했다. 검다 희다를 반복했고 그 중간 회색의 어드메쯤에서 멈춰섰다. 

근로정신대가 이런 것인가. 

여순은 문을 열었다. 열기 전에는 그냥 열었다가 곧 닫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을 보자 나가고 싶었다. 두려웠으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여순은 슬금슬금 걸어 철조망 앞까지 왔다. 철문은 열려 있었고 병사들은 없었다.

그녀는 그 문을 통해 비가 막 그친 해변으로 가는 길을 조금 걸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 뭐든 시작하면 처음이지.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는 쉬울거야. 나오니 좋네. 조금 떨리기는 하겠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죽으면 죽는거지.

그런 심정으로 여순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나 파도가 치는 해변까지 갈 수는 없었다. 언덕을 내려가면 해변에 닿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발이 미끄러웠다. 넘어질 지도 모른다. 다치면 누가 치료해주나. 아프면 더 서럽다.

운무가 거치면서 여러 섬들이 고개를 들었다. 꿈속에서 처럼 그것들은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이것 역시 처음보는 풍경이었다. 손가리개를 하고 여순은 섬이 몇개 인지 보이는 것을 세어보았다. 열 세개 였다. 많기도 하구나.

여순이 그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 보자 잠시 그쳤던 비가 먹장구름을 뚫고 곧 쏟아낼 것만 같았다. 안개는 다시 섬들을 가렸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가 올 것이다. 이렇게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 기온이 한껏 올라왔다. 덥다. 여순은 들었던 손을 얼굴로 가지고와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여순은 철조망을 통과했다. 비가 막 쏟아졌다. 그러나 달리지 않았다. 좀 맞고 싶었다. 비를 맞으며 여순은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쏟아지는 비를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팠으나 비맞은 사람의 기분을 더 즐기고 싶었다.

습하고 더운 열기속에서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조용하던 마음이 심란해졌다. 자신의 내부에 눌려 있던 것이 폭탄처럼 터져 나올지도 몰랐다.

그것은 이곳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고 정리된 이곳의 생활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살아서 여기를 나가자. 죽음의 순간에 여순은 삶을 보았다.

비를 맞고 여순은 기분전환에 성공했다. 어떤 알 수 없는 환희 같은 것이 몰려왔고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내려라. 계속 내려라. 섬까지 잠겨 버려라.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쓸고 가버려라. 다 쓸려가면 그 뿐이다.

서러울 것도 미련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견딜 때 까지 견뎌야 한다. 긴 고민 할 것 없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여순은 지금의 어쩔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속 편했다. 산자가 취할 행동 중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여순은 빗속에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알았다.

이제 뱃멀미 같은 것도 없다. 울렁거림은 좋은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것은 잊어야 한다. 여순은 두 손을 잡았다. 아무리 속을 뒤집어 놓아도 더는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포기나 체념도 없다. 뒤로 가지만 않으면 된다. 제자리 걸음도 상관없다. 제자리서 걷다 보면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뒤로 밀어내기보다는 앞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여순은 느꼈다.

그러자 밤이 조금은 덜 두려웠다. 장막을 걷어낼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근로정신대 생활은 그런대로 습관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공장일 대신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 다를 뿐 근로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 애초에 한 약속과 다를 바 없다고 일본인 군속은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여순은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조선인이 들어왔다. 일본군만 상대하다 조선인이 들어오자 여순은 놀라면서도 반갑고 반가우면서도 창피했다.

아는 사람에게 얼굴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호기롭게 들어와서는 조금 쭈뼛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자 작심했던 것을 하기 위해 그는 일본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끝마쳤다.

마지막에 그의 입에서 의미 없는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여순은 가만히 생각했다. 누굴까. 말수였다. 갑판 위에서 기대감에 들떠 혼자 떠드는 바로 그 사내였다. 정박한 선박에서 빨리 빨리를 외쳤던 통영 사람이었다.

그도 여순을 알아봤다. 잠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잠깐 잊은 것 같았다. 무엇을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잘못으로 판정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낭패감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말수를 당혹하게 했다.

그러나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쉽게 지나갔다. 그도 일본군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이후 여순은 구렁이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점례와 휴의와 완용과 함께 했던 마을 앞 해변가를 뛰어다니는 꿈을 꿨다.

백사장은 길었고 눈부셨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온통 하얀 모래가 햇볕에 부서지고 갈라지고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해당화가 붉게 물들었다. 붉은 물결은 하얀 백사장을 타고 끝없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여순은 뛰어다녔다. 점례가 따라오다 넘어지고 휴의가 다가가 그런 점례를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여순은 점례와 휴의의 눈이 어떤 신호처럼 서로에게 전달되는 것을 보았다. 완용은 그런 모습을 보고 따라 웃었다.

웃음의 끝에 여순은 자신의 눈에서 점례의 눈으로 완용의 눈길이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이미 집안끼리 성례가 오가기도 한 점례에 대한 미련이 완용에게 남아 있었다.

여순은 점례에게 주는 완용의 눈에서 따뜻함보다는 이글거리는 어떤 욕망을 보았다. 여순은 완용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날 넷은 물 빠진 바다를 건너 앞의 섬으로 이동했다.

소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소뿔섬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한 삼 십분 정도 절벽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그들은 쉬지 않고 떠들고 깔깔댔다. 언덕에 오르자 잘 정돈한 쌍묘가 드러났다.

비석도 없이 서 있는 묘는 벌초가 잘 돼 있었다. 효심이 가득한 가난한 자손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들은 누워서 숨을 다듬고 일어나 앉아서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끝에 눈길을 모았다.

여순은 떠나 올 때 죽어서도 함께 한 쌍묘를 뒤돌아 보았다. 점례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까지 그러고 있었다. 아이들은 먼저 내려갔고 여순은 조금 더 있다 일행과 합류했다.

나도 죽으면 이런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 사랑했던 사람과 나란히 누워 바다를 보면 이 또한 즐거울 것이다. 여순이 그때 죽음을 떠올린 것은 남동생이 그 석달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서 배와 함께 영영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동생은 임자 없는 산의 깊숙한 곳에 묻혔다. 아버지는 남 부끄럽다면서 아들을 지게에 지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밤늦게 돌아왔다.

어머니도 어디에 무덤을 썼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울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하도 재촉하자 마지 못해 그 장소를 알려줬다. 여순도 땔감을 하러 몇 번 가본 서살매였다. 거기에는 토끼도 잡는 매가 살고 있다고 했다.

늦은 오후 여서인지 그늘이 진 묘는 초라했고 불쌍했다. 얼마나 추울까. 무서울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설움이 너무 크고 깊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아, 아들아. 깊은 산속에 울려 퍼지는 여인의 갸냘프고 찢어지는 목소리는 여순을 가슴에 칼처럼 박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여순은 깜짝 놀랐다. 손에 갈색의 몸집이 큰 메뚜기 한 마리가 날라와서 앉았다.

얼른 손을 털어 내면서 소리차지 어머니가 울음을 멈추고 여순 쪽을 쳐다봤다. 니 동생이 왔나보다. 그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어머니의 울음이 딱 그쳤다.

말수는 간혹 찾아왔다. 유일한 조선인 손님이었다. 그는 언제나 돈을 낼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을 했다. 나 돈 많아. 그 말에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과 다를 바 없이 대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돈은 똑같은 돈이니 일본놈 돈이나 조센징이라고 다를 게 뭐 있노.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여순의 눈치를 살폈다.

광신일이 고되. 정말 이런 노동은 난생처음이야. 뱃일 힘든 거 알제. 그런 건 약과야 약과. 여기서는 반은 죽는다니께. 허다하게 죽어나가. 맨 앞에선 조선인 제일 먼저 죽어. 난 용케 살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그는 전쟁이 곧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 광산에서 번 돈으로 배를 여러척 사서 선주로 살고 싶다고 했다.

통영으로 가야제. 그래도 내 고향 아닌감. 넌 보령이라고. 그래 한 번 놀러와. 내가 잡은 고기로 생선구이 해줄게.

그 말을 하면서도 말수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전표에 도장은 늘 찍지만 기록한대로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 일본놈들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거든. 너도 알잖여.

말수가 고개를 저을 때 여순은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면서도 약속인데 안주고는 못 배길껄. 하고 말했다. 말수가 못받으면 자신도 받지 못한다. 그걸 여순은 걱정하고 있다.

벌써 조센징 세 명이 죽었다야. 부상자는 열 명이 넘어. 그래도 그냥 일해. 시체를 옆에 두고 곡괭이질을 한당께.

그날 말수는 돈 대신 성경책 하나를 여순에게 주고 갔다. 여순은 필요없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도움이 된다고 기어코 방 구석에 밀어 놨다. 성경책이라면 여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작았다. 작은 성경책 말고 노트 만큼 큰 성경책을 여순은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전날 이웃 마을에 사는 고모를 따라 천웅 읍내의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발걸음을 깡총 거리며 간 것은 무언가 기대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삶은 달걀 하나를 받아 들고 용여순은 정말로 행복했다.

천웅 읍내와 십자가 걸린 성당. 떠나올 때 그 읍내서 기차를 탔고 그 십자가를 보고 기도를 올렸었지. 여순은 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 또 울고 있네. 그녀는 얼른 알아채고 눈물을 닦았다. 아껴 두어야지. 아무때나 흘릴 눈물이 아냐. 그러나 자꾸 나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울었다.

울면서 그녀는 하나님을 부르면 나 있는 여기로 하나님이 달려올까. 십자가를 걸고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은 내 눈앞에 나타나 너의 고통을 알고 있으니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할까. 무거운 짐진자여, 내가 네 짐을 대신 지어주마. 하고 홀연히 말씀하실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여순의 여린 손을 잡고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성경책을 부여잡고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었다. 그래도 여순은 손에 잡은 성경책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는 그냥 책을 펴고 아무데나 읽었다. 그러는 것이 나았다.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편했다. 여러 번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장은 반질반질해져 있고 또 어떤 장의 글씨는 흐릿해지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읽는 것이 습관이 됐고 또 재미를 붙였다. 책을 읽다니...내가 성경책을 읽다니, 여순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은 낯설었으나 익숙해졌다.

여순이 맞닥트리는 것은 모두 처음이었고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새 습관이 됐고 몸에 뱄다. 이국만리에서 작은 성경책으로 위안받을 때 여순은 고향을 잊었다. 그러면서 살아나갔다. 산 사람은 살기 마련이다.

이런 것도 사는 것인가. 숨 쉬고 있다고 사는 것인가. 여순은 살기는 살았어도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무엇이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 늘 이어졌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예쁜 옷을 만들고 질긴 고무신을 만든다는 꿈은 헛되고 또 헛됐다.

그래서 여순은 때때로 주저앉고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살아야지 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날 다음에는 또 죽는 꿈을 꾸었다. 죽자고 두어끼를 굶기도 했다. 그러나 산목숨은 그런다고 죽어지지 않았다. 되레 살려는 욕구가 더 심해졌다.

비가 또 왔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하늘의 모든 물이 말라야만 비는 그칠 것이다.

멀리서 익숙한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출병했던 장병들이, 훈련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빗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특기였다.

비가 온다고 해서 자세가 틀어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여순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지켜봤다. 오늘은 좀 늦었군. 여순은 어두운 밖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발목까지 물이 들어찬 연병장에 도열한 그들은 바로 해산하지 않았다. 구호를 외치고 승리를 다짐했으며 내일은 오늘 못한 적을 물리치자고 총을 쥔 손을 흔들었다.

허리에 찬 긴 칼이 흔들렸고 어깨에 걸친 번쩍이는 총구도 흔들렸다. 그들은 그것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한다는 자만을 드러냈다. 나무토막같이 서 있던 그들이 마침내 해산했다.

밤이 오기를 기다린 적군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하나둘씩 적진에 침투했다. 그런 자세로 여순에게 다가왔다. 어둠의 자식들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여순은 오늘 밤은 길고도 길 것을 예감했다.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졌고 여순은 다른 예감도 이처럼 맞아 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여기온 한 달은 여순의 전생애보다도 길었다.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지는 그 긴 세월 동안 여순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하늘에 대고 묻고 또 물었다.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그럴 때면 여순은 말수를 떠올렸다. 그가 주고 간 작은 성경책을 쳐다볼 때마다, 조선말로 욕을 하는 말수가, 비록 거칠고 사나웠으나 작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군인이 없으며 여순은 밖으로 나왔다. 철조망 너머의 세계를 그리워 하면서 해변에서 찰싹 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유난히 그 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온다는 신호다. 그 많던 바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말 바람 한 점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군인들이 떠난 막사 주변은 그야말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멀리서 들리던 폭발음도 사라졌다. 광산에서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소리도 없다. 들물인가, 썰물인가. 찰싹 찰싹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소리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여순은 바다를 걷고 싶었다. 맨발로 발가락 사이를 오가는 물살을 느껴보면 좋을 것이다. 그럴수 있을까. 썰물이라면 좋겠다. 물 따라 멀리 저 멀리 사라지고 싶다. 흔적도 없이 가버려 영원히 바다와 함께 살아도 상관없다.

누가 알겠는가. 태평양 바다 어디쯤에서 고향 죽마을이 나타날지. 아버지가 하는 고기잡이 배에 올라 그물을 당기면서 어영차, 어영차 노래부르면 신이 날 것이다.

그런데 노는 아버지가 아닌 완용이 젓고 있다.

완용이, 우리 배를?

여순은 의아했으나 고기만 많이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따라 고기가 정말로 많이 잡혔다. 완용은 이제 그만 가자는 여순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잡을 때 더 잡아야 한다며 채울 공간도 없는데 그물을 더 내렸다. 그에게 내일은 없었다. 들어올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고기들이 걸려들었다. 완용은 이것봐 하면서 만족했으나 여순은 떼어낼 고기에 그만 기가 질렸다.

고기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늘이 떨어지고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움직임이 없는 고기들은 그물에 그냥 걸린채 이리저리 휩쓸렸다.

완영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여순을 덮쳤다.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여순은 발버둥쳤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고기처럼 여순도 죽었다. 눈을 떴을 때 여순은 그물에 걸린 고기와 자신이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고기처엄 여순도 나도 이렇게 죽어가는 신세라고 여겼다. 그게 나였다. 그물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 물고기. 물고기는 말라갔다. 해풍은 그런 역할을 했다.

몸에서 수분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리고 또 말렸다. 여순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미이라가 됐다. 박제된 자신의 미이라를 여순은 바라보았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일본군이 들어왔다가 그런 여순을 보고 기겁을 해서 도망갔다.

귀신이 있다. 말라버린 시체다.

그들은 나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순은 그들의 등뒤에 깔깔대고 웃었다. 미친년, 저년은 미쳤다.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사이렌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졌다. 높았다 낮았다를 반복할 때 연병장에 커다란 폭탄이 터졌다. 파견에 맞아 내가 죽는구나. 여순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어 미이라 신세인데 두 번 죽는다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지금 전황이 어느 쪽에 유리한 것이야는 것이었다. 일본군에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항상 승전가를 불러 이기는 줄만 알았는데 일본군 밀집 지역에 폭탄이 터지고 있다. 여순은 일어나서 얼른 커튼을 내렸다. 다행히 폭탄은 여순의 막사를 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여순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바람빠진 공에 공기가 들어차는 것처럼 여순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여순은 좋을 것이 없는데 하고 낙담했다.

어려운 시기였다. 여순은 완용인지 일본군인지 말수인지 모를 씨를 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애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기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폭탄이 터졌다. 이번에는 막사 저편이었다. 섬광이 번쩍였다. 섬 전체가 귀를 막아도 소용없이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