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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점례는 보따리를 품은 손을 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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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보따리를 품은 손을 풀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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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옆에서도 쉬지 않고 울려댔다. 비행기 소리와는 다른 소음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한 동안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맴돌았다.

한 무리의 군대가 급히 점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소녀들은 가슴에 품은 보자기를 더 세게 안았다. 군인들은 소녀들 앞에서 이동을 마쳤다.

그들은 멈추었을 대 구호 소리도 멎었고 그 와 동시에 일사분란한 줄이 만들어졌다. 잘 훈련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자세로 자신들의 지위를 확인했다. 

군인들이 멈춘 앞으로 군용트럭들이 짝을 맞추듯이 들어섰다. 소리는 이들이 내는 것이었다. 몸짓만큼이나 거친 소리에 소녀들은 잔뜩 기가 죽었다. 트럭의 뒤쪽에서는 시커면 매연이 수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시끄러운 소리와 혼탁한 공기는 점례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다른 군인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군가를 불렀다. 처음에는 걷던 그들은 호각 소리에 따라 조금 빨리 걷더니 나중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고 나자 광장에는 작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네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이 하나 둘 숫자를 외치며 트럭에 올라탔다. 능숙하게 올라탄 그들은 먼저 탄 순서대로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채워나갔다. 

타는 동작이 어찌나 똑같은지 마치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 타는 듯이 보였다. 짐칸은 어느새 군인들로 꽉 채워졌다. 차 한 대가 채워지면 그 차는 바로 떠났다. 그러면 대기하고 있던 다른 군인들이 앞쪽에 세워져 있는 차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같은 동작으로 매연을 뿜어대는 연기를 마시며 꽁무니로 올라탔다. 군인들이 차에 오를수록 광장에 있던 군대의 숫자는 점차 줄어 들어들었다. 어느 순간 광장에는 군인들의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점례는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런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벗어났다. 인솔자로 기차를 함께 탔던 사람은 소녀들을 앞쪽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군인들 처럼 줄을 맞출 수 없었다. 인솔자는 그것이 불만이었으나 불만을 토로할 시간이 없었는지 빨리 빨리 걸으라는 재촉을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광장에는 다 떠난 줄 알았던 트럭 하나가 더 있었다. 그 트럭이 여자들이 탈 차였다. 기차역에서 다시 트럭으로 갈아타는 것으로 소녀들은 자신들도 군인들 처럼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는 곳이 조선의 가장 위쪽인 신의주라는 것을 안 것은 한 참 후였다. 누구도 그들이 그곳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인솔하는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트럭에 옮겨진 그들은 날이 어두워져 멀리 가지는 않았다. 하룻밤 묵을 장소가 인근에 있는 지 올라 탔다가 금새 내렸다. 거기서 그들은 신의주가 최종 목적지가 아닌 것을 알았다. 

인솔자들이 군인에게 여자들을 인계하고 떠나자 적막감이 돌았다. 허름한 숙소에서 여자들은 여럿이 포개서 함께 잤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경성역으로 다시 왔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역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붐볐다.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운 점례는 벌써 집이 그리웠다. 일본으로 간다는 꿈은 사라졌다. 신의주에도 공장이 있겠지. 비행기를 닦거나 총알을 만드는 일이라고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으나 믿을수는 없었다. 

다들 궁금했으나 누구도 군인이나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외에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위해 잠시 머물고 있는 이곳을 점례는 둘러봤다.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서양식 건물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녀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오후와 달리 아침에 보는 경성역은 더 위압적이었다.

저렇게 큰 건물은 난생 처음 본다. 그러나 더 큰 건물을 보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놀라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두자.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이 학교에 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점례는 담담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어제보다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가난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난해도 여순과 함께 웃고 떠들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런 일은 이제 다시 돌아올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아늑한 옛날의 어느 날 처럼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가 마치 수 십년이 지난 듯 했다. 

여순은 어디로 갔을까, 간다는 일본으로 갔을까. 아니면 우리와 같은 신의주 쪽으로 갔을까. 점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이런 생각은 한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군인들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이쪽으로 향했다. 점례 일행은 깜짝 놀란 물고기 떼처럼 어부가 모는 그물 쪽으로 몰려들었다. 어제 보았던 괴물처럼 생긴 트럭이 다시 대열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곧 하차 하 것 같지 않았다. 길고 긴 여행길이라는 것을 점례는 직감했다.  

행인들이 점례 일행이 탄 트럭을 힐끔 거리며 쳐다봤다. 안 보는 척 하면서 그들은 이쪽을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군인들은 아직 명령을 제대로 전달 받지 못했는지 점례 일행을 남겨 두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군인들은 서너 명이었다. 소녀 가운데 일부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인파속으로 숨어서 대열에서 이탈했다. 뒷걸음 치다가 군인들과 눈이 마주치는 소녀도 있었다. 그러면 황급히 다시 제자리로 왔다. 나머지들은 명령을 기다리면서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듯이 잔뜩 겁먹은 그대로였다. 보자기를 잔뜩 가슴으로 끌어 당긴 점례는 군인들에게 책잡혀 망신을 당할까 두려웠다.

역으로 들어갔던 군인들이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소녀들을 소몰이 하듯이 몰고는 역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씩씩거리며 화난 표정의 기차가 곧 떠날 것처럼 길게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기차 한 칸에 점례 일행을 따로 태웠다. 소녀들이 다 타자 남은 군인들이 맨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차장가에 앉은 점례는 밖에서 아쪽을 쳐다보고 있는 군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색 했는지 곧 눈기를 피했다. 그 전에 점례도 눈을 바닥에 깔았다. 길고 긴 기차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기차는 여러 역을 거쳤다. 말로만 듣던 평양에서는 서너 시간을 대기했다.

그곳에서 점례 또래의 여자들이 수 십명 올라탔다. 빈 자리가 없었던 기차는 서서 가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열기로 기차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점례는 그러나 가슴에 안은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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