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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23:03 (금)
열개가 넘는 이름을 다 알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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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개가 넘는 이름을 다 알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03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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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들 어찌 알겠어요? 몽양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데요.

몽양? 여운형 말이지.

당신 알아요? 이름은 들었지. 아마 당신도 들었을 거야.

그런 것 같더라고요. 수염하고...신문에도 났었지요?

그래, 몽양이라. 이거 원, 우리 집이 임정 본부 처럼 독립운동가들로 득시글 하구먼.

말수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어이없어했다.

난데없이 떨어진 날벼락 같은 상황을...난처하군.

소고기를 사 왔어요. 보자기 안에 이게 있더군요. 읽어 볼까요.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 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몽양.

그리고 추신이 붙어 있었다.

휴 장군을 잘 부탁하오.

이게 뭔 일이래요?

용희가 자못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글씨가 좋네요. 문장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그건 나도 인정. 

말수가 자신과 비교되는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곧 이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하소연했다. 

여보, 우리가 무슨 팔자가 세기에 이런 거물들은 맡고 있어야하나... 그건 그렇고. 몽양이라는 사람은 보기보다 허세가 심해. 무슨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이 수염을 기르고 상표달린 비싼 양복을 입고 번쩍 구두를 신고 지팡이 휘두르며 다니니. 꼴사나워. 무슨 헐리우드 배우도 아니고 말이야.

말수가 사내의 몸과 옷차림을 타박했다.

그래야만 알아주나.

뭐, 독립운동하는 사람은 다 거지꼴로 다녀야 하는건 아니잖아요? 얼굴도 핏기없이 해쓱하고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 생겨야만 운동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광산업으로 돈을 좀 만진다는 소문을 당신도 들었잖아요?

역성드는군. 벌써 빠진 거야. 그런 거야.

여보, 좀 진지해 보자구요.

나, 엄청 진지하거든.

말수가 자신보다 키가 크고 훤칠하고 돈 많아 보이는 사내에 불만을 드러냈다. 비교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고 무엇보다 독립운동 한다면서 멋쟁이 차림을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넝마는 아니어도 저렇게 쫙 빼입고 다녀야 하나. 날라리 아냐. 끄나풀인지도 모르고. 혹시 일제 밀정인가. 아니면 연합군 시다바리든지. 참 내, 기가막혀. 

사람을 외관으로만 평가하지 말아요.

알았어. 알아 모시겠다고. 그러니 나도 시내로 나가 옷 한 벌 해야겠어.

좋아요. 당신 생일도 곧 다가오니 기분한 번 내지요.

쉽게 용희가 동의하고 나오자 말수는 멋 적었는지 어쨌든 조선 독립에 그 만한 사람도 없을 거요. 그 사람은 헌병이나 경찰을 무서워 하지 않을 만큼 배포가 커. 숨어 다니지 않아. 저런 사람은 도망다니는 스탈일과는 거리가 멀어. 잡으라면 잡으라는 거지. 부럽거든. 내게는 없는 그런 것이 없어, 하고 두둔하는 말을 했다.

그 정도인줄은 몰랐어요. 

조선땅으로 곧 간다지. 독립을 하는데 왜 외국으로 떠돌아. 난 조선에서 조선독립만세를 할 거야. 그런 신문 기사를 읽었어. 자유주의자, 낭만가, 그래 조선독립은 저런 사람의 힘에서 나와.

이제야 인정해 주는군요.

생각해봐, 낭만없는 혁명이나 독립이 있겠어. 낭만은 힘이고 그 힘이 결국 일을 내거든.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 납셨어. 

당신도 대단해요. 아니 더 대단해요. 난 당신이 조선에서 최고에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사모님. 

말수가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연극 배우 흉내를 냈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용희도 웃으면서 이제 그만 하세요, 하고 말렸다. 

여보, 저 환자 수시로 체크하는 것 잊지마. 언제 쇼크가 올지도 모르니.

지금까지는 괜찮은 거 같아요.

걱정이 되서 하는 말이지.

알았어요. 그런데 약산이라는 사람은 아세요?

약산이라? 이름은 아니고 호인가?

네, 약산 김원봉이라고. 밀양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밀양이라면 내가 통영이니 고향 사람이네.

그렇네요.

알고 있지. 김구 선생보다 몸값이 높아. 일제가 그를 얼마나 잡고싶어하는지 몸값으로 드러나잖아. 무장 투쟁의 일인자라고 포목점 집 사장이 말하더군. 조선독립은 무장투쟁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지.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 없군요.

포목점 집 사장과 어울린 덕분이지 뭐.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우리 집에 그 사람도 오는 거야? 큰일이군. 큰일났어. 빨리 일본으로 도망 갑시다.

말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면회 온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환자를 데려갈 임무를 띠고 있다고 몽양이 전해 달라고 했어요.

아이고 이거 참. 귀찮아 죽겠네. 그나저나 저녁만 먹고 올게. 위급한 환자를 두고 떠나는 것이 미안했던지 말수가 저녁만에 힘을 주었다.

포목점 사장을 만나려고. 아무래도 궁금해 할 것 같아서.

환자를 그냥 두고 가면 어떻게요.

금방 올거야.

당신도 있고... 박군은 내가 말했어. 나 올 때까지 퇴근 좀 미루라고. 의사 두 명이 있는데 좀 해봐, 그 사이 무슨 일이라고 일어나겠어.

저녁만이에요.

알았대두.

그리고 몽양이니 약산이니 이런 말은 해서는 안되요.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봐.

특히 환자가 휴의라는...

말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 정도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나를 판단하느냐고 나무라는 투였다.

알았어요. 중요하니 한 번 더 점검했어요.

그래, 그래.

말수는 자신이 용희의 점검 대상이 된 것이 불쾌했으나 그것으로 꼬투리를 잡고 싶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일이 갑자기 밀려들었는데 사소한 것으로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혈압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어. 자고 있으니 한고비 넘겼다고 봐야지. 버텨낼 것야. 워낙 강한 사람이니. 그러나 모르지. 사람은 몰라. 당신이 간호를 잘 해줘.

말수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일부러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알아서 잘할 텐데 잘하라고 부탁한 것이 조금은 속 보이는 행동 같아서 말수는 머쓱했다.

용희는 말수를 배웅하고 수술실로 돌아왔다.

박선생은 저녁 식사하고 오세요.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용희는 박군을 내보내고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방금 떠난 자리라 온기가 느껴졌다.

참, 열심히 해. 사람 좋고. 박군같은 저런 사람이 옆에 평생 같이 있으면 좋겠어. 일본도 같이 가보자고 해야지. 도움이 될 거야. 낯선 땅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해.

용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휴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간 정도였다. 가볍게 맥박이 뛰는 느낌이 전해졌다.

꼭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용희는 그가 자신의 병원에 오래 머물기보다는 속히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눈에 보면 더 마음이 쓰인다. 약산이라고 했던가. 오늘 밤에라도 아니면 내일 새벽이라도 와서 데려갔으면 좋겠다.

아니, 오늘 내일은 아니다. 적어도 사흘을 걸려야 한다. 미리 준비해 둬야지. 글쎄, 항생제가 먼저고 다음은 소독하고 붕대갈고. 그거면 일단은.

그녀는 넉넉하게 챙겨야겠다며 일어섰다. 생각난 김에 준비해 놔야 한다. 급하다 보면 잊을수가 있고 그러면 환자는 위험에 빠진다. 이 난리통에 약품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희는 자기방으로 들어가 소고기를 싼 보자기를 한 번 털고는 거기에 의약품을 챙겼다. 잘가라. 오빠야. 용희는 미리 작별인사를 했다.

휴의는 잠을 깼다. 푹자고 난 다음의 개운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사방에서 치고 빠지고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비명을 질렀나? 누군가 잠깐 왔다 간 것 같은데 누구였지? 용희였나.

그러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누가 찬물을 끼얹어 줬으면 싶었다. 고문이 낫다. 동휴가 인두를 들고 지져도 이보다는 낫겠다.

그래 동휴가 그립다. 그자의 워커발이 정강이를 걷어찼으면. 딱히 어느 쪽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 몸 전체에서 통증은 우열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와서는 밀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폭우가 쏟아져 범람하고 있다. 차라리 피부를 벗고 싶다. 살점이 하나 없는 뼈로 남고 싶다. 그 뻬에 부채질을 하면 살 것 같다. 뼈를 말려야 해.

함흥 경찰서에서 받던 동휴의 고문이 선명하다. 그때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할 힘이라도 있었다. 입을 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지금은 입을 열 수도 손가락을 움직일수도 눈을 뜰 수도 없다.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용희야 말해봐. 휴의는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비틀댔다.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리는 듯싶다. 아니 핀가. 무언가 입으로 나오고 있는데 휴의는 멈출 힘이 없다. 이게 무슨 꼴이람. 용희가 보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 따로 없다고 아이처럼 달래 줄까.

다 와서, 거의 끝나가는데 내 임무의 완료 시점이 보이는데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나저나 주석님은 무사할까. 적들은 체포했을까. 위신이 말이 아냐. 대전을 앞두고 이게 무슨 꼴이람.

몽양은 왜 하필 그 때 전갈을 보냈지? 혹시 일본과 내통하는 건 아닐까. 일제는 왜 그를 내버려 두지.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텐데.

의열단장은 왜 안오지? 나 처럼 부상을 당했나? 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은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거든. 독립운동하는 사람치고 옥살이 한 두 번 안 해 본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은 그런 경험도 없이 날고 있어,

어떻게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지. 한 수 배워야지. 총알을 피하는 법을. 이름이 열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다 외우고 있는지도 물어봐야지. 나도 새로운 이름이나 지을까.

그나저나 공산주의자들이 설쳐서 걱정이야. 아니겠지? 약산은 연안파와 손을 끊었다고 하니. 기왕이면 일본식은 어떨까. 하려면 히로히토 정도는 돼야지.

그래, 누가 물으면 와타나베이며 히로히토라고 해야지. 왜, 우리는 하나로 합치지 못할까. 당이 너무 많아. 임정으로 뭉쳐야 해. 아, 그래도 아파. 용희는 왜 안 오지? 마취약이 떨어졌는데. 병원도, 설마 병원도 마취약이 없는가. 있겠지. 아주 조금이라도.

노래나 부를까. 신대한에 독립군... 아니야. 이렇게 아플때는 군가는 아니야. 섬색시는 어때. 황혼이 찾아오면...옛날이 그리워. 그래 그거야. 바닷가 모래밭에 해당화 잎이 지네.

죽마을 해당화는 여전하겠지. 점례야. 잘있니? 아니지. 지금은 용희를 불러야지. 용희야, 내가 그때 준 해당화꽃 잊지는 않았지.

오빠는 풍각쟁이야,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 만은... 선술집 풍경이 그립네. 김해송 노래가 좋지. 어중이떠중이 모여드는 선술집에서 아 술맛 좋다 좋아 좋아 , 애 삼월아 한 잔 부어라 크윽 어 취한다.

휴의는 다시 잠들었다. 길지 않은 잠이지만 환자에게는 더 없는 보약이었다. 잠은 어떤 약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수술환자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휴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고 운 좋게도 취한 채 잠이 들었다. 말수가 문을 휙 열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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