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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7:46 (금)
앞으로 그렇게 차려 입고 날아보자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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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그렇게 차려 입고 날아보자고 그가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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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는 총독의 일을 어느 순간 잊었다. 점례가 아파서 누워 있자 오로지 점례의 건강만이 걱정됐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그래, 내 본성이 이렇다고.

그때 의사가 왔다. 흰 가운을 입고 검은 줄이 달린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다. 어울리는군. 목걸이로 해도 되겠어. 여자라면 어울릴 거야. 손에 차트를 든 간호사가 뒤따라왔다.

보조가 필요하지. 권위를 세우려면 말이야. 그런데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해열제 정도는 내놓을 수 있겠지. 임신 여부도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호사카는 병실 의자에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대자 자신도 어딘가 아팠다. 어디지?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났는데 정확히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어디지? 그는 손으로 머리부터 집어 내려왔다. 이마 눈 코 입 그리고 목과 어깨 가슴 배 다리, 아픈 곳이 어디지? 그러다가 호사카는 두근거리는 심장에서 자신의 생각이 멈춘 것을 알았다.

그래, 아픈 곳이 여기야. 여기 조선 땅이라고.

어서 조선을 떠나고 싶다. 여기 와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국밥을 먹은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어서 떠나자. 파리로 가자.

거기라면 아플 이유가 없다. 몸은 고달파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점례가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조선을 떠나자. 총독을 만나는 일도 삼촌이 파는 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싹 가셨다.

그들에게 억지웃음을 파는 것도 귀찮다. 나라 걱정은 내 일이 아니다. 얼마를 받든 알아서 하시고, 내가 없을 때 보살펴 준 값으로 부족하지 않을 거야.

병실 창문 밖으로 행군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그 전에 땅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와 악을 쓰는 구령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들은 왜 시도 때도 없이 총을 어깨에 메고 걸어 가는가.

박자에 맞춰 구호를 지르고 군가를 부른다. 행인들은 급히 피한다. 잘못한 사람보다 더 잘못한 사람처럼 얼른 등을 보이고 숨는다. 쥐새끼 처럼 숨어서 나갈까 말까 밖을 내다 본다. 그렇게 무서운가. 그런 무서움으로, 위협으로 그들은 존재를 증명한다.

이 땅의 주인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라고. 그렇게 해야만 지배가 되는가.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감정은 그들이 행한 것만큼이나 잔인했다. 가차 없는 처벌이 이뤄졌다.

살아 남은 레지스탕스는 그 정도는 약하다고 더 세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걸 프랑스에서 느꼈다. 조선도 그렇까. 친일 부역자들을 프랑스처럼 할까. 그러면 볼 만 하겠지. 그 전에 우리 일본인들은.

삼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호사카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런 문제에까지 끼어들었다. 조선 독립은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문명화된 사회를 만들어주는 일본을 굳이 배척하면서까지 독립하려는 이유는 뭘까.

극소수라고 해도 그것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휴의라는 자와 이야기 하고 싶다. 만날 수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조선 독립이 목숨만큼이나 중하냐고.

병실 창가에 정오의 해가 비춰들고 있었다. 호사카는 정신이 조금 들었다. 정오다. 그러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오찬은 오후 1시다. 정오라고 한 것은 속임수다. 점례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떠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례는 첩자가 아니다. 그녀는 순수했다. 여전히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군인들 틈에서 온갖 술책을 연구하면서 사람을 믿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었다.

점례를 만나고 나서부터 호사카는 사람을 믿어도 된다는 신념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믿어도 된다.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점례였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총독은 관저에서 차를 마시거나 일정을 소화하면서 일본각으로 이동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정오로 시간이 휴의에게 전달됐다면 그는 헛수고 한 것이다. 만약 타이머가 달린 폭약을 설치했다면 지금쯤 터졌을 것이고 우리측 인사의 피해는 겨우 경비병 정도일 것이다. 주요 요인은 하나도 없다. 원하는 대로 됐다.

점례는 나의 안전을 지켰다. 휴의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쾌했다. 정보가 샜다면 내가 점례에게 말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 점례 말고도 그날의 행사를 알고 있는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종로서만 하더라도 동휴는 물론 그 아래 참모들까지 모를 리 없다. 작전 반경을 넓힌 헌병대사령부나 총독 관저를 보호하는 방첩부대도 안다.

그들이 모두 1시로 오찬을 통보 받았을리 없다. 어떤 부대에게는 12시 통보가 갔을 것이다. 요인 행사는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나게 정보를 흘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래, 점례를 믿자. 휴의에게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시간도 없다. 내내 나와 같이 있었다. 의심할 만한 흔적도 없었다. 의사가 다가왔다. 긴장에 의한 일시적 복통과 두통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호사카는 의사 뒤를 따르면서 혹시 임신은 아닌지 넌지시 물었다. 입 속에서 맴돌던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거라면 다른 의사가 검진할 겁니다.'

이번에도 틀렸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호사카는 병실에서 누워 있는 점례를 보았다. 마치 산고를 마친 산모가 무사히 출산한 것에 대한 안도의 미소가 얼굴에 비쳤다.

'걱정할 것 없어. 일시적인 거래. 뭐 잘못 먹었다고 생각해야지. 다행이야.'

호사카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거 봐요.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회색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조용하게 종을 쳤다.

'여보, 정오예요. 총독 만찬은 어떻게 해요?'

'걱정 붙들어 매셔. 한 시로 늦춰졌어. 방금 부하가 말했어.'

'그래요? 그럼 당신은?'

'글쎄. 가봐야지 않겠어?' 

'아니면 늦어진 김에 아예 날짜를 내일로 하루 미루면 어떨까요?'

점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일로 미루자고? 그럴 것까지야 있나. 아직 시간은 있어.'

'그럼 저도 가겠어요.'

'아니야, 당신은 그대로 누워 있어.'

점례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런 표정을 호사카는 놓치지 않았다.

난감한가. 일정이 변경돼 휴의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안타까운가. 아냐, 저 표정은 그런 것을 담고 있지 않아. 대신 내 안전을 위한 거야. 내가 가면 위험하다는 거지. 그래 맞을 거야.

'여보, 좀 걱정이 돼요. 시간을 늦춘 것이 되레 어떤 위험이 오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점례의 입에서 위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당신, 몸이 아파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잘 못 들을 수 있고 잘 못 보기도 해. 아픈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든.'

'그런 게 아니고요. 전 때로는 직감을 믿어요. 예감 같은 거 말이죠. 조금 불길하다고나 할까요. 여보, 당신도 나처럼 여기에 누워요. 아프다고 해요. 아니 당신도 아파요. 여기 병실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아니 어제까지의 일이 서랍장의 옷처럼 정리돼요. 그동안 고생했잖아요. 글 쓴다고 날새기도 했고 카페에서 독한 담배 연기를 마셨지요. 내 건강이 아니라 당신 건강도 챙겨요.'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아픈 거 같아. 나도 환자가 돼 볼까.'

점례가 몸을 옆으로 비키자 호사카가 구두도 벗지 않은 채 점례 옆에 누었다. 좁은 침대에 두 명이 눕자 침대가 삐걱거렸다.

'천장을 봐요. 거기에 어제의 우리가 있어요. 아니 일본각으로 가기 직전의 모습이 거울처럼 환하게 보여요.'

'어디? 어디에 그런 게 있어?'

'보세요. 눈을 감고요.'

'그런 말이 어딨어. 눈을 감고 보라니. 억지 쓰지 말라고.'

호사카가 농담을 했다.

'병실 천장은 눈을 감아야만 보여요. 그렇지요? 보이지요?'

'그래 보이는 거 같아. 허겁지겁 살아왔어. 그럴 필요 없었잖아.'

'조선을 떠나고 싶어요. 당장요.'

'그래, 나도 방금 전에 그런 생각을 했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의사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당장 조선을 떠나야 한다고. 마침 군인들이 줄을 지어 행진하고 있었지. 사람들은 놀라서 피하고. 어깨에 맨 총의 끝에서 빛이 났어. 단검이 찌를 듯이 달려 들더군. 싫어. 난 군인도, 전쟁도 총도 검도 싫어. 내 안에는 그걸 밀어내는 힘이 있어. 어쩌면 당신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여보, 지금 당장 떠날까요. 총독 만찬은 할 수 없다고 해요. 대신 총독부에 찾아가면 어때요?'

'병원에 왔으니 총독도 이해하겠지. 장소 변경쯤이야 별것 아니라고. 총독님이 출발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한 시간 내로 가겠다고. 그래, 그래야겠어.'

호사카는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지시했다.

'전화로 연락해 먼저. 그리고 직접 네가 총독부로 가서 전해. 한 시간 후에 총독 관저로 가겠다고. 아마 그 시간이나 일본각 약속 시간이나 얼추 비슷하니 시간을 어긴 건 아냐. 장소만 바뀌었을 뿐 총독과의 약속은 살아있어. 이제야 마음이 편하군.'

호사카가 점례의 손을 잡았다.

'그래, 당신은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해. 옳은 소리만 하고. 내가 막혀 있을 때 뚫어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여보.'

점례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됐다. 모든 것이. 총독도 대신들도 심지어 동휴까지도 목숨을 건졌다. 휴의도 자기 몫은 한 것이다. 기습할 사람이 없으니 그가 위험에 빠질 일도 없다.

내가 없을 때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마음의 부담을 느낄 이유는 없다. 난 벗어났다. 해방이다. 모든 사람이 살았다. 내가 사고 친 것 아냐. 휴의에게 손댄 건 내가 아냐.

점례는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대신 몸은 가뿐했다. 그녀는 일어났다.

'다 나았어요. 복통도 두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어요.'

'그래, 거기에 처방이 있군. 맞아. 우리는 조선 체질이 아냐. 당신의 전성기를 여기서 썩게 할 순 없어.'

'제가 할 소리에요.'

'파리로 가자. 당장 비행기편을 알아봐야지.'

'총독에게 말해요. 오후 비행기가 있으면 오늘 당장 떠나겠다고.'

'군용기라도 마련하겠지. 저녁에는 도쿄에 있는 거야. 부모님 뵙고 다음 날 파리로 가자.'

'그래요. 여보, 빠를수록 좋아요.'

'난 오로지 책만 쓸거야. 아버지처럼 정치가도 아니고 군복을 벗었으니 군인도 아냐. 내가 이기주의자라고? 그래도 좋아. 나는 나대로 애국하는 거야. 애국의 방식은 각기 다르지.'

'맞아요. 정치인은 정치를 군인은 군대를 작가는 글을 화가를 그림을. 각자 자기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이 애국입니다. 안 그래요?'

점례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언제 아픈 사람이었나. 저런 사람도 아플 수 있나. 

'당신의 장점외에 내가 아는 것이 없어.'

휴의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피. 날 놀리지 말아요.'

점례가 호사카의 구겨진 옷을 펴며 말했다.

'잘 어울려요. 화신 백화점에서 산 이 가디건과 상의요.'

'그래, 조선에서 좋은 일은 백화점 쇼핑도 있지.'

'정말 당신은 아무 옷이나 잘 어울려요.'

'그렇게 감탄하지 마. 원래 내 옷걸이가 좋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차려입어요. 옷이 날개라고 하잖아요. 날개를 달아요. 날자구요. 날아 보자꾸요.'

'그래, 흔들리지 말고 날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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