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점례는 아팠다. 아니 아프려고 했다. 아파야 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호사카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점례와 마주쳤다.
‘어디 아픈 거야?’
‘그러게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런데 조금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열도 있는 거 같고요.’
점례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어디 봐.’
‘아이 걱정 없어요.’
‘그러지 말고 이리와 봐.’
마지못해 점례가 호사카 앞에 섰다. 숨이 꽉 막혔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이 이마를 만졌다. 따스했다.
‘가만, 가만히 있어.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아니 조금 있긴 한데 심하지 않다는 말이지. 조심하지 않고선.’
책망하듯이 그가 말했다.
‘오늘 총독 오찬에는 당신은 빠지면 어때?’
그러면서 그는 슬쩍 점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작은 단서라도 찾는 형사처럼 그는 미묘한 점례의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럴 순 없어요. 겨우 이것 가지고 빠지다니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가야지요.’
‘심해지면 어쩌려고.’
‘ 나를 봐요. 내가 그렇게 허약해 보이나요?’
점례가 운동선수처럼 팔을 안으로 구부리면서 알통을 내보였다.
‘알았어. 당신 고집은 누구도 못 꺾지. 얼마나 남았나?’
겨우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길어야 두 시간. 점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사카도 시계를 보았다. 아직도 그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점례가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를 위해 좋은 징조였다. 만약 혼자 가라고 내버려 뒀다면 호사카는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나를 사지로 모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여보, 그런데 말이에요. 아니에요.’
‘어, 무슨 말인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그런 속담도 아세요?’
‘나도 배웠지. 당신만 조선 속담에 익숙한 줄 알아. 서당개 삼면이면 풍월을 한다고 했잖아. 우리가 만 난지는 그보다 더 오래야.’
‘정말 당신은 못 말려요.’
그 말을 하고 점례가 다시 인상을 썼다. 아랫배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해야 한다. 이상한 것이 맞다. 호사카의 눈이 매섭게 움직였다.
‘그러면 그렇지. 빠져나가려는 구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어.’
‘지난번에 한 번 말했던가요.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에요.’
‘그러게 그때 병원에 가 봤어야지. 상상 임신일 수도 있고.’
‘아닐 거예요. 기분이 좀 그렇다는 것뿐이에요. 총독 만찬 끝나고 병원에 가볼까요?’
점례가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가보겠다고 나섰다.
'나야 좋지. 당신 몸이 우선이니까.'
그럴 즈음 동휴는 일본각을 철저히 수색했다. 폭파 전문가이니만큼 그가 장소와 시간을 안다면 미리 폭탄을 설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가 못 미더워 자신이 직접 실내를 점검했다. 건물의 내부는 물론 화장실이나 계단 복도 아래까지 꼼꼼히 살폈다. 심지어 천장까지도 사다리를 놓고 조사했다.
의심살 만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주변의 길목까지도 살폈다. 차가 올라오는 길목의 가옥에 대한 수색도 했다. 집마다 사복 경찰을 대기 시켰다.
이처럼 경계가 삼엄한 적이 있었던가. 휴의 아니라 휴의가 백 명이 온다고 해도 뚫을 수 없다. 그러나 동휴는 뭔가 뚫린 듯한 기분 나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는 발을 굴렀다. 이 느낌은 뭐지? 안 좋은 느낌. 휴의에게 내가 당하나. 그가 제아무리 미군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은 특수 전문가라고 해도 폭탄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설치할 수 없으면 이 또한 쓸모가 없다. 그는 다시 한번 병력을 동원해 내부를 샅샅이 훓었다. 훈련된 사냥개를 동원하기도 했다.
서너 마리의 군견은 헌병대사령부에서 차출됐다. 사령관은 흔쾌히 종로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총독은 물론 자신의 안전도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도 초청 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혀를 길게 뻗고 헉헉대는 독일제 세퍼드를 데리고 냄새를 맡고 있을 때 동휴는 멀찍이서 건물을 바라봤다. 내가 휴의라면, 내가 폭파 전문가라면 어디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할지 가늠해 보았다.
실내다. 실내보다 더 살상능력을 극대화시킬 장소는 없다. 천장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심지어 종이를 뜯어 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것 아닌가.
무사히 만찬이 끝나면 이제 내 시간이다. 점례나 호사카도 조선에서 편한 일정을 보낼 것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에 호사카는 궁궐을 가보고 싶어했다. 창경원이나 덕수궁 정도는 안내할 수 있다.
남산도 올라야지. 그는 벌써부터 호사카의 조선 여행 일정을 짜고 있었다. 일부러 신문에도 내야지. 휴의가 보고 걸려 들 수 있도록 덫을 놓는 거지.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주마. 냄새 좋은 가죽을 만들겠다. 그것을 점례에게 선물로 주겠다. 음흉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고 동휴는 저쪽에서 총독 일행이 탄 차가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총독이 먼저 오는군. 그렇지. 내무 대신의 아들이 나와서 영접할까. 그는 부하들에게 건물 입구에서 양쪽으로 도열해 있을 것을 지시했다. 그 시각 점례가 탄 차도 호텔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뒷자석에서 팔짱을 끼고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점례는 팔짱 낀 손을 풀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이다. 배가 아파야 한다. 현기증이 와야 한다. 마비가 온다. 그렇다. 이런 상태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쓰러진다. 호카사가 옆에서 부축한다.
'여보, 비서가 나 대신 병원으로 함께 갈 거야. 난 총독에게 인사나 하고 바로 갈게.'
'아니에요. 당신이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차 안에서 죽어도 당신과 함께 있을 겁니다.'
'고집부리지 마요.'
'이건 고집이 아니에요. 여기서 헤어지면 당신과 영영 이별입니다.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요.'
점례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준비한 것처럼 코피가 나온다. 일부러 피가 번지게 손으로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피다, 피야. 여보 피를 흘리고 있어. 운전수 긴급 상황이다. 경성의전으로 돌려라. 그리고 총독에게는 점례 마사코가 아파서 후송됐다고 전해라.'
점례는 호사카의 팔을 세게 잡았다. 마치 자신의 손을 풀고 그가 떠나려는 것을 제지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병원으로, 빨리 병원으로.'
호사카가 안절부절못했다. 총독의 일정은 까마득히 잊은 듯 했다. 무슨 일이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전쟁터에서도 파리에서도 그녀는 강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이순간에 왜. 우연일 수 있다.
그녀는 아침부터 아팠다. 배가 아프고 현기증이 인다고 했다. 미열도 있다. 임신인가. 호사카는 차가 원남동으로 향해 갈 때까지 이 생각 주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점례는 신음도 간신히 했다. 그의 품에 안겨서 마치 발작난 아기처럼 헐떡였다. 말은 나오지 않고 몸은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들떴다. '그러나 이제 안심이다. 그녀는 물었다.
'여보, 몇 시에요?'
'10분 전이야.'
'11시 50분요?'
'그래. 가만히 있어. 병원에 다 왔어.'
점례는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것을 그 순간 느꼈다. 파란 하늘을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고통은 사라졌다. 그를 살렸다. 아이도 살았다.
죽마을 모래사장을 달린다. 장난삼아 쌓은 모래성에서 급하게 손을 뺐다. 파도가 밀려온다. 그때까지 버티던 모래성은 점차 허물어진다. 다시 모래성을 쌓는다.
쌓고 또 쌓는다. 휴의의 손이 겹쳐진다. 그 순간 가시에 찔린 것처럼 불쾌하다.
'치워. 그 손 치워.'
'여보 무슨 말이야.'
호사카가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여보. 내가 헛소리를 했나봐요.'
'정신차려. 다왔어. 병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