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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16:37 (금)
평정심을 찾기 위해 그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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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을 찾기 위해 그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4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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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를 남겨 두고 점례는 로비로 내려왔다. 커피숍은 한산했다. 그러나 텅 빈 것은 아니었다. 창가 자리로 열 명 남짓이 띄엄띄엄 앉아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이미 만난 사람들은 담소에 열중이었다.

커피 향은 파리의 기억을 떠올렸다. 맛보기 전에 코로 스며드는 산미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조선에서 프랑스를 느끼다니. 이대로도 괜찮아. 점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한 모금이 마셨다.

기분이 좋았다. 상쾌한 아침이 오후를 향해 느리게 이동했다. 그녀는 모자에 손에 댔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이 전해지면서 파리 골목길에서 호사카와 쇼핑하던 모습이 떠올라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누구도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편했다. 마치 이국의 낯선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의 기분이 이럴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으면 마음이 이처럼 편할 것이다.

점례는 느긋했다. 기자회견도 무사히 마쳤다. 모레 전시회 준비는 삼촌이 할 것이다. 그림은 다 넘겼다. 자신은 개막식에 참석해 귀빈들을 가볍게 접대하면 된다.

이미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떤 표현을 할지 나름대로 구상했다. 그릴 때의 분위기도 머릿속에 다 들어있다. 메인 장소에 걸 작품은 가볍게 스케치한다는 생각으로 했다가 마음에 들어 유화를 여러 번 덧칠한 '하늘을 나는 나와 그리고 당신'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정했다.

나머지는 삼촌이 배열할 것이다. 삼 일 후에는 총독 면담이 있다. 호사카가 같이 가자고 두 어 차례 말했으니 빈말은 아니다. 자신이 입고 갈 옷을 미리 머릿속으로 골라보았다.

분홍색 브라우스? 아니다. 너무 튄다. 보라색에 호박 단추가 장식된 셔츠가 어울릴까. 점례는 머릿속에 있는 옷을 객실에서 확인해 볼 작정이다. 문을 열고 펼친 옷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기자회견장에 입고 간 옷이나 전시회 때 입은 옷을 또 입을 수는 없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옷이 없다. 가방에 다른 것을 챙겨 오느라 옷 넣을 공간이 없었다.

유지가 깨면 화신백화점으로 갈 생각에 점례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불과 로비에 내려온 지 10분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서두르지 말자고 다독였다.

십 분 쯤 후에 올라가도 충분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어떤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호사카 말고 삼촌이나 동휴 말고 자신에게 다가올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있었다. 바로 휴의였다. 그의 첫마디는 점례야, 였다. 점례야, 점례야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점례는 놀라 뒤를 돌아보기 전에 한 번 생각했다.

왠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로 서 있었다. 그러나 눈만은 젊은이처럼 초롱초롱했으며 입은 급하고 거칠게 움직였다. 점례야, 그가 다시 한번 점례를 불렀다.

'조선총독과 언제 만나니? 빨리 말해줘. 나 여기 떠나야 해. 오래 있었다. 잡힐지 몰라.'

점례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어깨에 손을 댔다.

'휴의 오빠.'

점례는 저도 모르게 가늘고 낮은 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그래 나다. 총독은 언제, 어디서 만나니?'

점례는 기가 막혔다.

'어서 떠나요. 동휴에게 잡혀요.'

'나도 알아. 그러니 어서 말해.'

휴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롱불이 창호 문을 여닫을 때 흔드리는 것처럼 초점을 잡지 못했다.

'몰라요.'

점례는 단호했다.

'점례야.'

휴의가 다시 애타게 불렀다. 점례가 입을 열었다.

'모레 일본각 11시 50분요.'

'고맙다. 점례야.'

점례가 일어섰다. 휴의가 손을 잡았다.

'우리 저쪽으로 가요.'

점례가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구부정한 노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리게 커피숍을 나와 계단으로 오르는 비상구 앞에 섰다.

점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행히 그들은 그들 일에만 열중했다. 점례는 노인이 비상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례가 오자 휴의는 비상구 문을 열고 점례를 먼저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도 열린 문 사이로 물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둘은 격하게 끌어안았다. 누구의 심장이 더 세게 뛰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요동쳤다. 지팡이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만요. 그만 해요.'

점례가 겨우 입을 떼면서 말했다.

'오빠, 이러면 나도 죽어요.'

'알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도 그만둘 거야. 네 행복 깨트리지 않아. 너는 네 인생이 있어. 모레라고? 알았다. 고마워. 난 간다.'

점례가 비상구 손을 잡는 휴의의 손을 잡았다.

'내일 전시회가 있어요. 화랑 삼층에서 열리는데 누구나 올 수 있게 개방했어요. 혹시 일정이 바뀔지 몰라요. 아까 말한 장소와 시기는 변경될 수 있어요. 모레 오시면 확실하게 알 거예요.'

'알았어. 한 번 더 운에 맡기자.'

휴의가 가고 나서 한동안 점례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옳은지 나쁠지도 몰랐다. 그러나 점례는 점례였다.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야지, 점례야 그는 주문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타고 8층까지 올라갔다. 혹여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운동 삼아 올라왔다는 핑계를 생각해 내면서 어느새 숙소 문간에 섰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은 누그러졌다. 평정심을 찾은 점례는 열쇠를 구멍에 넣기 전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서두를 필요없다.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어찌 이리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가. 어쩌자고 나는 말했는가. 어쩌자고 나는 그를 돕는가. 당장 호사카에게 이 일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비밀로 묻어야 하나.

이렇게 생각의 끈이 이어졌으나 점례는 말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신념을 믿었다. 대신 끝나지 않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저주했다.

'가련한 내 운명이여.'

점례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운명을,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나직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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