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169.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상태바
169.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11.28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약뉴스]

적을 살리기 위해 동료를 죽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느냐고?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

예의나 상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포로를 잔혹하게 대 했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심한 무기를 썼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철부지들의 투정이다.

팔다리가 쪼개지고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전장에서 무슨 협약 운운은 기가 막히는 일이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그래야 한다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군 미필자거나 총 한 번 쏴보지 않은 그야말로 꿈속의 박애주의자일 뿐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작가 레마르크의 또 다른 작품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막바지 부분에 이르면 주인공 그래버는 아군 슈타인브레너를 사살한다.

그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가 게슈타포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버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후회라는 것 일도 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 포로다. 슈타인브레너는 여자 포로는 어찌어찌 하자고 수작도 부린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러시아 선발대는 그래버의 참호를 뛰어 넘어갔다. 방어선이 뚫린 것이다. 슈타인브레너는 끌고 갈 수 없으니 쇠창살 사이로 쏘아버리자고 말했다.

▲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그 사랑은 슈류탄을 든 손보다도 더 강하다.
▲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그 사랑은 슈류탄을 든 손보다도 더 강하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권총을 꺼내 들고 그러려고 작정하고 있다. 이때 그래버가 그러지 말라면서 포로 대신 그를 사살한다. 그리고 포로들을 풀어준다. 죽은 동료를 보고 그래버는 뒤늦게 말한다.

살인자.

누가 살인자인가. 죽은 슈타인브레너인가. 살인한 그래버 자신인가. 아니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인가. 러시아 국민, 독일 시민인가. 전세계인가. 그래버는 절규한다. 

앞서의 놀라운 일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하나도 놀랍지 않다. 전쟁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상식이나 인간성이나 포로대우 같은 말들은 공허할 뿐이다.

배가 갈라져 내리는 비를 바가지처럼 내장으로 받으면서도 살아서 꿈틀대고 있는 동료를 보고도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고? 그럼 알아서 각자 판단하자.

다만 전쟁은 그런 것이라는 것만 알고 넘어가자. 그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다.

2차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기울고 있다. 러시아 영내로 들어갔던 독일군이 밀리고 있다. 밀리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독일 영토까지 내줄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적국의 포로는 게릴라든 농부든 살려둘 수 없다. 그 즉시 처리해야 한다. 언제 뒤통수에 총구를 겨룰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그럴 것이다. 후환을 제거하지 못하면 당한다. 더구나 후퇴의 긴박한 와중이라면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겠다. 그래서 그래버의 행동은 순진하다.( 동료에 대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감정을 제쳐 두고라도)

전선이 교착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 포로를 심문하거나 포로 맞교환을 위해 얼마간 살려 둘 수 있다. 그러나 그래버가 속한 중대의 상황은 처지가 다르다.

상부의 사살 명령서 같은 것은 도착하지 않는다. 상부조차도 살기 위해 줄행랑을 쳐야 할 형편이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며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명령서가 없다고 그냥 두면 고참병이 아니다. 방아쇠를 당기고 그 순간 그런 사실조차 잊으면 그만이다. 농부인지 게릴라인지 불분명한 러시아인 서너 명의 목숨 같은 게 무엇이 중요할까.

그러나 그래버에게는 중요했다. 그에게 선택지는 없다. 그는 죽음 직전에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기를 원했다. 여기서 아군을 죽이고 적군을 풀어주는 것이 그런 것이냐고 따지면 할 말이 없다.

자, 그러면 아군을 죽이고 풀어준 포로는 그래버의 인간성에 감복하고 그의 안전을 위해 가슴에 손을 대고 성호를 그었을까. 아니면 몰래 숨겨둔 권총을 꺼내 그래버의 눈앞에 검은 총구를 드러냈을까. 맞다. 후자가 맞다. 그랬다.

그래버는 농부아닌 게일라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그러니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냈을까.

다시 시계를 더 멀리 돌려보자. 병장 그래버는 3주간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전방이나 다를 바 없다. 설마 하던 후방마저 폐허가 됐다.

집은 부서지고 부모의 생사조차 알기 어렵다. 절망한 그에게 동네 친구 엘리자베스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전쟁을 언급했으니 이제부터는 사랑이다. 사랑은 평화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애초 그래버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엘리자베스가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결혼은 휴가 막판에나 가서야 결정됐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에 그들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사랑의 끈이 둘을 묶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빌어먹을 가정은 그만두고 그래버의 달콤한 휴가를 따라가 보자. 둘은 그야말로 가마솥에 콩 볶듯이 사랑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다시 그래버는 전선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한 일은 서두에서 말했다. 작품은 쉽고 간단하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쉬운 말로 반전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아버지 세대가 일으킨 전쟁에 아들 세대가 죽어나가는 현실은 비현실적이다.

범죄자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싸우러 간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범죄자는 히틀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54년에 발표됐으니 전쟁 후 10년이 지났다. 그러니 이런 문구도 가능했을 터. 적국 러시아 보다 조국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자주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글의 일부가 삭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일 초 전까지 살아 펄펄 뛰던 동료가 바로 그 직후로 눈을 감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을 때 읽는 독자들은 삶과 죽음의 순간이 이토록 짧을 수 있는가 하고 고뇌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간접 체험일 뿐이다. 사방에서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썩는 냄새가 들판을 가득 채워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 냄새는 내 콧구멍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 전쟁 중에도 휴가가 있듯이 전쟁 중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엘리자베스는 공장에 가야 하고 배고픈 자는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

저녁이 되면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개처럼 쏘아 다녀야 하고 친위대는 불순분자를 색출해야 한다. 게슈타포는 유대인을 찾고 전쟁 중에 한 자리 차지한 자는 고급술에 넘쳐나는 돈으로 흥청거린다.

보충병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해 쉽게 죽고 다치고 정치인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국민을 죽음 속으로 내몬다. 애국을 하라고, 총을 들라고 독려하고 등 떠민다.

한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 이차 대전의 참혹을 목격하고도, 직접 겪고 나서도 인간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 어서 전쟁이 끝나 살아남은 자들이 가족과 재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