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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사진에서 아는 얼굴이 있었느냐고 그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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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아는 얼굴이 있었느냐고 그는 물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18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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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섬의 광산 노동자 말수는 분명히 보았다.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때는 늦었다. 일제 강제 징용에 끌려 갔던 통영 뱃사람 말수.

얼굴에 땀 범벅이 되도록 석탄 가루를 가득 묻히고도 허리 한 번 펼 수 없었다. 그는 씩씩 거렸다. 사냥개에 쫓겨 달아난 깊은 숲속의 멧돼지 처럼.

'젠장, 일을 시키려면 쉴 수 있도록 해야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말수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했다. 팔팔했던 기운을 그대로 토로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한 거 아녀, X발.'

그의 입에서 쌍욕이 나왔다. 감독관이 그걸 들었다. 눈치 없는 말수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자기 뒤에 바짝 숨어 있던 일본인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군홧발이었다. 일본인은 인정사정 없었다.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나무에 매달린 개 패듯이 마구 질렀다. 같이 대들수는 없었다. 노려 볼 수는 있어도 싸울수는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말수가 통나무처럼 꿍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너그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는 쓰러진 말수의 목이 타겟이 됐다. 육중한 군홧발이 사정이 없이 눌렀다.

숨이 턱 막히다 못해 얼굴이 새파래졌다. 핏기는 사라졌다.

이러다 죽는다. 임마, 그만해 저 조센징은 말은 거칠어도 일은 다른 놈보다 세배는 잘해.'

감독관의 상관이 마침 그곳을 지나다 살인자를 돌려세웠다. 그는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우수한 인력의 손실을 걱정하는 상관의 뜻에 미치지 못한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했다.

'하이.'

그는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수통의 물을 말수의 얼굴에 끼얹었다. 꼬박 하룻 만에 정신이 든 말수는 다음날부터 다시 막장속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말수는 군홧발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것은 개머리판으로 날아왔고 마구 몸통을 갈기는 주먹질이었으며 뺨을 때리는 넓은 손바닥이었다. 그 길고 긴 고통의 강을 넘은 것은 병원을 차리면서부터였다.

어느 날부터 말수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는 다시 그날의 악몽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몸을 보채자 옆에 있던 포목점 집 주인이 그를 흔들었다.

귀찮아서 그냥 자려고 했으나 어찌나 크고 날카로운지 내버려 둘 수 없을 정도였다. 흠뻑 땀에 젖은 말수가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조금 못됐다.

새벽녘 이거니 생각했으나 일찍 시작한 술판 덕분에 시간은 의외로 더뎠다. 그는 일어났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못됐다. 겉옷을 챙겨 입고 그는 주인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견딜만했다. 말수는 우울했다. 취기는 가시지 않았고 발걸음은 제멋대로 였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용희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너무 열심히 살았어. 이제 좀 쉬어도 좋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여기가 어디인가 하고 올려다봤을 때 붉은 유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안에 있던 여자가 이게 왠 떡인가하고 말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놀다 가요. 선생님. 일본인이죠. 일본인.'

'난 조센징이야. 조센징은 안 받지?'

말수는 화난 눈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자기, 돈 있어? 그거면 돼. 우리같은 여자가 인종 가릴 처지야. 뙤놈이든 왜놈이든 양놈이든 조센징이든 다 받아. 돈 보여줘.'

말수는 허허 웃었다.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돈을 여자에게 확 뿌렸다.

'어머 어머, 돈 날아 간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말수는 그런 여자를 발로 확 걷어 찼다. 여자가 죽는 소리를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왠 지랄맞은 놈이 염병하고 자빠졌네.'

그 말을 하면서도 여자는 돈 줍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수는 여자와 더 싸우지 않았다.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상가 문은 닫혔고 인적은 끊겼다. 저쪽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어렴풋했지만 틀림없었다. 순찰 도는 야경꾼인가. 아니면 독립군의 아지트를 급습하는 일경의 움직임인가. 말수는 잽싸게 담벼락 사이로 몸을 숨겼다.

만취한 상태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이 정도 몸놀림이라면 나 하나쯤은 방어할 수 있다. 말수는 귀를 기울였으나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용희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서성이기를 반복했다. 이런 적이 없었다. 말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오고 있을까. 창밖은 희끄무레한 가로등이 흐릿하게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 걸어온다면 멀리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창 아래에 서야만 한다. 과연 창 아래에 누군가 서 있다. 말수다. 그 말고 이 시간에 거기에 서 있을 사람은 없다.

용희는 층계참을 뛰듯이 내려왔다. 그러나 일층 문을 여는데 망설였다. 말수가 들어오지 않고 한동안 계단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 오겠거니 했지만 말수는 그러지 않았다.

참다못한 용희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말수는 몰랐다. 모른 척 한 것일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온기가 훅 끼쳤으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몸에 데우기 위한 것처럼 말수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니~'

말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희가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기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맡았던 익숙한 냄새가 용희의 코를 자극했다. 그에게서 폭약 냄새가 났다.

다이너마이트 냄새. 그가 신난 얼굴로 막사를 찾아온 첫날에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불안과 어떤 기대감과 공포가 섞인. 코를 뚫고 뼈마디를 뚫고 그 냄새는 용희의 온 몸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용희는 화들짝 놀랐다. 화약이라니, 왜 그 냄새가, 사라졌던 그 냄새가 다시 나왔을까. 구역질이 올라왔다. 용희는 그러나 기댄 몸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을 고른 용희는 말수를 불렀다.

'여보, 나에요. 용희.'

말수는 응답이 없다.

'이렇게 처량하게 앉아 있으면 어떡해요. 쓸쓸해요. 그런 것 하지 않기로 우리 약속했잖아요.'

이번에도 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끊어진 '목포의 눈물'을 이어갔다. 용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말수는 술을 더 먹어야겠다며 일어서기 위해 손을 바닥에 짚었다.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서자 말수가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겨우 몸을 지탱한 말수가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취했어'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영락없는 술꾼의 목소리였다.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알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해요. 아까부터 많이 마셨잖아요.'

'아냐, 아냐 한 잔만 딱, 아니 두 잔, 아니 세잔만 먹자.'

용희의 반대에도 말수는 기어이 술을 서너 잔 더 먹었다. 그리고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습했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이 뚝 다물어졌다.

'여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요. 꾹 참지 말고.'

용희도 한 잔 따라 먹으면서 말수에게 말했다.

'다 말해요. 하나도 남김없이.'

'아냐, 없어. 다 했어. 끝났다고.'

'그러지 말아요. 할 말이 더 있어요. 사진에서 무얼 봤나요. 혹시 아는 얼굴이 있었나요. 여보, 다 말해요. 속에 있는 말 감추지 말고 끄집어내서 다 말해요.'

그러나 말수는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 아는 사람 있었어요?'

말수의 어깨가 순간 들썩였다.

'울고 있어요. 여보, 울고 싶으면 울어요.'

용희는 엎어진 그 옆에 나란히 엎어져서 저도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여보, 나 울고 싶어요. 울겠어요. 실컷 울겠어요.'

말수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찔했다.

'그래요, 오늘은 우는 날이에요. 날도 흐리고 울기에 정말 딱 좋은 날이죠. 몸도 그렇고요. 여보, 나 술 한 잔 더 해도 돼요?'

용희가 물었다. 그리고 또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아까 마신 술에 또 술이 들어가자 용희는 취기에 온몸에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 함께 울어요. 우는 것 정말 오랫만이죠.'

용희가 다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여보, 그거 알아요? 내가 그런 여자라는 걸. 더러운 여자. 당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네, 그런 여자가 바로 나에요. 더러운 년이라고 욕해줘요. 퍼부어줘요.'

'난 너를 알아. 네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다 알아, 다 안다고. 거기 있었지. 군용막사. 모포 한 장으로 발발 떨면서 너는 나를 기다렸어. 아니 내가 아니야. 세상의 모든 군인이야. 넌 그런 여자야. 내가 목격자야. 포장했어도 숨길 수 없어.'

용희는 말수가 이렇게 지껄여 주기를 기대했다. 환청으로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말수의 눈물이 그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수는 어느 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용희는 어떤 마술에 걸린 여자처럼 마구 몸을 떨었다. 소금에 절인 고기처럼 용희는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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