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17:47 (금)
감동적인 다른 말은 없고 수고해 주시오, 그게 전부였다
상태바
감동적인 다른 말은 없고 수고해 주시오, 그게 전부였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11.11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덜컹거릴 때마다 검은 커튼 사이로 낮게 깔린 빛이 잠깐씩 들어왔다.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할지 몰랐다. 휴의는 그런 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하는 불만과 함께 무덤덤하게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군용 트럭 비슷한 것에 올라탄 뒤로 한 시간쯤 달렸을까.

무어라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 지면서 앞자리 서양사람의 윤곽도 흐릿하게 나마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기도 하고 뜨기도 하면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여느냐 하는 내기 처럼 느껴졌다. 유치했다. 그래서 휴의가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나도 몰라.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 겠지?'

'그럼 도착 시간도 당연히 모르고?'

그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실루엣이 느껴졌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몸이 뒤로 쏠리지 않기 위해 휴의는 차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았다. 앞쪽의 서양인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산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알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아까는 맡지 못했던 입냄새가 순간적으로 났다. 아니 몸 냄새인지도 몰랐다.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발생한 냄새는 이리 저리 떠돌다가 휴의의 콧구멍으로 다 들어오는 것 처럼 느껴졌다.

모든 냄새를 한 꺼번에 빨아 들이겠다는 듯이 휴의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러는 것이 나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이키는 것이 되레 고통이었다. 고통의 핵심은 역겨움이었다.

'창문을 열어서 좀 환기 시키자.'

휴의는 답답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냄새 이야기는 일정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 였으며 휴의 자신에 대한 감정의 절제였다.

그러나 앞자리 남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럴 의사가 없다는 표시였다. 휴의는 참아야 했다. 달리 도리가 없었다. 차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경사가 심한 것을 보니 3번 훈련장인것 같기도 하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면서 남자는 다시 발을 휴의쪽으로 쭉쭉 뻗었다. 워커 발이 휴의의 정강이를 건드렸다.

'더러운 양키놈.'

속으로 중얼 거리면서 휴의는 그가 더 편하게 뻗을 수 있도록 다리를 한쪽으로 오무렸다. 양보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실히 알렸다.

'양놈이, 덩치가 좋아.'

'뭐라고 떠드는 거야.'

'별 것 아니야. 다리가 저려서 피가 안 돌아.'

'그럼 너도 나처럼 옆으로 뻗어.'

그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휴의는 고분고분 따랐다. 그렇게 하자 정말로 피가 도는 것처럼 편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차가 평탄한 길로 접어 들었다. 휴의는 뒤에 있는 오른손을 앞으로 끌어 당겼다. 기어를 바꾼 차가 속력을 냈다.평지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달리다가 멈춰섰다.

'내려.'

'오케이.'

원하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에 만족감을 표하면서 휴의가 상쾌하게 받았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눈이 약간 부셨으나 곧 적응이 됐다. 예상대로 훈련소는 산 속에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천혜의 요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민간인 도 보였다. 군인 훈련소 같지 않았다.

'걷자.'

남자가 예의 역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휴의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여기가 목적지 아냐?'

'왜, 실망인가.? 두 어 시간 더 가자.'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저쪽 보이지? 저 산을 넘어야해.'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얼추 보아도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다. 저 정도라면 빨리 걸어도 두 시간 정도는 가야한다.

'이건 뭐지? 도대체 어디서 훈련을 한다는 거야.'

휴의는 조금 당황했다. 예상했던 곳과 벗어난 장소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일행이 있다. 너와 같은 조선인 2명과 중국힌 3명 도합 5명이다.'

휴의는 다섯 이라는 숫자를 세면서 나머지 4명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 거렸다.

'어, 여긴 없어. 한 시간 전에 출발했어. 너도 그들과 같이 출발했어야 하는데 일정이 늦어진 것 뿐이다.'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휴희는 남자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내리면서 그가 준 배낭이 어깨에서 제법 묵직했다.

'먹을 거야. 식사는 해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리고 도착하면 바로 저녁 훈련이 있어. 갈아 입을 옷과 분해된 기관총이 들어 있다. 알겠지만 조심해서 다뤄.'

'애인처럼?'

휴의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받자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했다가 나중에 알고는 남자가 반색을 하면서 작게 웃었다.

'너 그거 알아. 네가 처음으로 농담했어. 넌 냉혈한 인 줄알았지. 한 시간 이상 차안에 있으면서 너 처럼 무뚝뚝한 애는 처음 봤거든.'

녀석이 뒤 돌아 보면서 말했다. 휴의는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네가 하도 인상을 쓰고 있어 조심하느라고 그랬다고 둘러댔다. 그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산길은 급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잡목들을 헤치면서 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고 줄 없이는 오르기 힘든 바위 구간도 통과했다. 상대는 이 길이 제법 익숙한 듯이 거침없이 쓱쓱 앞으로 나갔다.

뒤질세라 휴의가 따랐다. 산을 타는 것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도 훈련의 일종인가? 휴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와 약간의 간격을 두었다. 따라오는 냄새를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항상 똑같은 간격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앞서가던 남자가 잘 따라오는 멈춰서서 종종 뒤돌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제법인걸. 하는 시늉을 내면서 제 속도로 멈추지 않고 계속 이리저리 산길을 옮겨 다녔다.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휴의는 왔던 길을 봤다. 차가 멈춰 섰던 곳의 건물이 어디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인간이 만든 구조물은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됐나. 휴의는 다시 몸을 돌려 앞선 사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차에서 내렸을 때 좀 자세히 볼 걸 그랬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밥을 먹자.'

배낭을 내려놓은 그가 휴의가 앉을 수 있도록 바위 한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밥이 있어?'

그가 배낭을 풀고 빵부스러기를 꺼냈다.

'네 건 네 가방에 있어.'

휴의가 앞 가슴에 배낭을 안고 묶인 줄을 풀었다.

'애인처럼 안고 있니?'

남자가 손짓하며 대단한 유머를 던진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래, 뭐든지 안고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지. 너도 그렇지? 안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야.'

한 마디 덧붙이고는 휴의는 배낭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무거운 것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직감적으로 그는 분해된 기관총의 총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몸통을 찾기 위해 손을 반대쪽으로 움직이자 작은 개머리판이 만져졌다.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휴의는 배낭속으로 고개를 가까이 댔다. 그러나 차가운 총 대신 봉지에 쌓여 좋은 냄새를 풍기는 부드러운 빵을 집어 들었다.

'빵이군. 냄새가 좋아. 먹자, 먹자고.'

거칠게 빵을 한 잎 베어 물고 휴의는 녀석을 뻔히 쳐다봤다. 제대로 보는 얼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란 눈이 자기 바로 앞에 있었다. 눈 앞에서 그것은 뱀의 비늘처럼 움직였다.

화사의 붉은 무늬 사이로 비치는 푸른 빛이었다. 독이 없는 놈이지만 물리면 기분 나쁘니 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녀석을 죽이든 살리든 피한 다음 일이었다.

기분 좋은 눈은 아니었다. 맞설 생각이 없다는 듯이 휴의가 눈을 다시 빵으로 돌려 다시 한 입 소가 풀을 뜯듯이 뜯어 먹었다.

'맛있어. 정말로.'

휴의는 우걱우걱 소리나게 씹기 위해 입안에 다시 빵조각을 우겨 넣었다. 순식간에 손에 쥔 빵이 사라졌다. 빵 하나로 요기하기에는 젊은 위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더 없나, 찾아 보기라도 하듯이 휴의는 다시 배낭 속을 뒤졌다.

부드러운 것은 만져지지 않았다. 대신 딱딱한 군화 굽이 손에 닿았다. 군복같은 꾸러미도 잡혔다.

'뭐, 이 정도면 바로 침투해도 되겠는걸.'

휴의가 일어서자 남자가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를 벗어나면 바위가 나타났고 바위를 지나면 다시 숲이 이어졌다. 그가 길을 잘못들었는지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휴의도 사람이 걸어 다닌 흔적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가 다시 앞장섰다. 틀렸어도 정상쪽으로 가면 목적지가 있다는 듯이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 새로운 목표 새로운 무기, 휴의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끌렸다.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넓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익혔다.

알수록 신비롭고 재미나는 일들이 늘어났다. 이곳은 또 어디인가. 알지 못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을 가고 있다는 흥미로움이 휴의의 마음을 산의 능선처럼 가볍게 감싸고 돌았다.

'동지, 수고해 주시오.'

내민 손을 잡았을 때 휴의는 그 손이 크고 널찍하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함보다는 그런 느낌이 왜 왔는지는 모른다.

'동지, 수고해 주시오.'

휴의는 수고해 주시오를 한 번 더 새겼다. 무엇을 수고해 달라는 말인가. 어쨌든 그는 지금 수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고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막 시작되고 있다.

무언가 감동적인 말을 기대했으나 주석은 그 말을 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동지, 수고해 주시오.'

그게 휴의가 떠날 때 한 말의 전부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