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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좋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의 기운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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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좋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의 기운을 뿜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06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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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의 병원에는 작은 긴장감이 떠돌았다. 포목점 집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보다 조금 일찍 중년의 조선 남자를 치료하기 전까지는 말수는 오로지 치유에만 집중했다.

자기 내부에 있는 울분을 잠재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머리에 있는 액운을 아래로 힘있게 찍어 눌렀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언젠가는 오겠거니 했던 행복을 잡았으니 그래야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말고삐를 풀고 유유자적 산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그러면 말수는 지난 날의 지옥에서 겪었던 아프고 고된 기억을 상실해 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환자에 집중했고 한가한 시간에는 자신에게 집중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고 꽃을 가꾸었다. 좋은 것만 보고 듣기 위해 고립된 전선의 병사처럼 그야말로 의식적으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그 사투는 죽음이 아닌 생이었고 피가 튀지 않고 따뜻한 온기가 흘렀다. 고향 통영을 가끔 떠올리는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 역시 상념 속에 있지 않으면 일부러 호주머니 속의 먼지처럼 꺼내 들었다.

인생의 환멸은 땅에 묻고 꺼낼 이유는 손을 꼽아도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부모님 얼굴은 이제 희미해졌다. 때로는 어둠 속이어서 형태조차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잊혀지고 있다.

이는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됐다. 그것이 저승에 있는 부모도 그렇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다. 대신 그는 바다에 달려들었다.

여름날 고운 백사장을 끼고 도는 낮은 파도를 향해 마구 달려나가듯이 그렇게 바다를 품에 안고 달려나갔다. 배를 밀어내고 노를 젓고 그물을 들어 올렸다. 힘이 들어도 그 순간은 뱃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심장도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그러다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처단하는 장면에 이르면 말수는 살인 직전에 쥔 똑같은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이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고기만도 못한 놈은 양념을 넣고 끓인 매운탕이었고 숯불에 구운 생선에 불과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상황이 기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상의 한순간이었다. 그 장면에 이어 다른 장면으로 이어졌다. 지루할 새가 없었다. 막간극의 중간 단계가 사라졌다. 방화와 살인. 이 역시 말수는 지금껏 죽은 자를 위해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 자가 스스로 죽지 못하고 타인의 손을 빌린 것은 되레 죽은 자가 죽인 자를 위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죽어가면서 그들은 말수에게 죽여줘서 고맙다고 말했을까.

나는 너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다고, 그러니 백번 엎드려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는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그러나 말수는 받지 않고 외면했다.

그 말 조차 말수는 벌레처럼 싫었다. 이렇게 말수는 통영의 시절을 확실하게 정리해 두었다. 그러니 그 일은 언제나 아련한 것으로 남아 있을 뿐, 기억하거나 거부할 일은 아니었다.

노무자로 끌려가 태평양 어느 섬과 그 섬에서 용희를 만났 던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부와 뼈를 다루는 칼솜씨가 좋았던 덕분에 의사행세를 했던 그 시절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입가에 미소가 엎질러진 물처럼 번들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행복한 순간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그처럼 자신의 전부를 녹여 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부상병을 치료하는데 모든힘을 쏟아부었다.

째고 자르고 꿰매면서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았다. 자다 일어나서 들이닥친 젊은 피를 위해 또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말수는 거뜬했다. 간혹 졸려 칼잡은 손 그 상태로 존 적은 있어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환자가 신음하면서 자신의 몸과 말수의 손 사이에 있던 실을 잡아 당겼다. 그는 그 정도 일 외에는 다른 것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꾸 실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말수는 눈을 떴다.

'마저 꿰매줘요.'

입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 입밖으로 말은 새어 나오지 못했으나 아직 남아 있는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렸다. 말수는 그런 병사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일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벌어진 상처를 합쳐 놓았다. 그러고 나면 센 파도 같던 불안은 사라지고 평온만이 남아 돌았다.

광산에서 곡괭이 질을 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었다. 같이 삽질을 하는 동료들은 동료가 아니었고 짐승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그들을 벗어난 것은 구더기 속을 탈출한 파리와 같았다.

날고 쉬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다리 많은 파리. 말수는 파리의 생활은 할 수 있으나 구더기 생활은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는 벌써 흙이었다.

백태가 낀 눈, 썩어 가는 몸통, 흐르는 물과 드러나는 뼈다귀. 시간은 흘러 백골과 섞여 흙이 된 자신을 말수는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목뼈와 분리된 해골을 들어 올렸다.

이게 나다, 말수. 턱이 이빨과 분리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수는 머리뼈를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용희가 장식해 놓은 예쁜 꽃이 놓여 있었다.

용희를 간호사로 천거한 것은 진짜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말수는 용희를 통해 삶의 의지를 다졌고 미래를 꿈꿨다.

언제나 그늘에서만 자라지만 그 어느 꽃보다 향이 좋은 난초. 물 한 모금으로 한 달을 버티는 그런 여자 용희. 기어 가서라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 행복. 그리고 상해.

이런 기억은 수시로 소환해도 좋았다. 죽음 앞에서 사랑을 나눴던 일, 무너진 성당의 잔해 속에서 살자고 다짐했던 맹세는 그 무엇보다도 숭고했다. 말수는 내려놓았던 해골을 다시 들었다.

뼈와 근육과 살점은 다 어디로 갔는가. 말수는 든 해골이 가벼운 이유를 알았다. 백골과 눈이 마주쳤다. 말수는 자신과 용희도 나란히 흙 속에서 썩어 백골이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산 말수가 죽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처참한 광경들 가운데 그중 제일 나았다. 말수는 그나저나 미스터리한 인물이고 싶었다.

용희말고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용희도 동의할 것이다. 과거는 보자기에 싸서 꼭꼭 묽어 놓고 절대 풀지 않으리라.

그러나 우리 둘의 지난날은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다. 조선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한의사였고 일본에 유학 간 엘리트 여자.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종군의사로 참여했고 부상을 입고 상해에 왔으며 전쟁터에서 수많은 일본인을 살려낸 전쟁 영웅.

부상 때문에 전선 대신 상해에 터를 잡은 조선인이며 일본인. 이것이 이들 부부가 공식적으로. 대내외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살아온 삶이다. 둘은 그렇게 잡은 행복을 놓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그 손이 팔 근육처럼 단단해졌다. 고통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아픔을 참기 위해 눈을 감을 날이 없었다.

눈을 감을 때는 행복이 가슴까지 치솟아 오를 때였다. 바람이 부는 날 펄럭이는 치마를 입고 들판을 달려가는 용희. 데이지를 한 아름 꺾어 들고 마주 달려오는 말수.

그들은 이제 사람이 됐고 사람 가운데서도 좋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런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포목점 집주인을 만났다. 중년의 조선 남자를 치료했다.

그리고 세상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았다. 조선독립운동을 알았고 국공합작이니 내전이니 하는 말도 들었다. 그는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었다. 시내 도서관에서 미국의 잡지도 찾았다.

'여보, 어제 타임지를 봤는데 전선이 일본 쪽에 유리하지 않은가 봐요. 일본이 진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는데, 과연 일본이 질 수 있을까.'

'그러게요. 저도 그런 생각은 처음 해 봐요. 그런데 조선독립운동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임정은 조선에 상륙시킬 대규모 부대를 모아 훈련 중이라고 하던데요. 다른 소식 들은 거 없어요?'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포목점 주인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 사람을 일부러 만날 생각은 없어요.'

'잘 생각했어요. 그 사람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안 사람은 좋아 보이지만. 얼굴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아요.'

'나도 그럴 생각.'

둘은 이런 대화를 하기도 했다. 어려은 질문도. 어려운 답변도 아니었다. 해골을 들고 말하는 말수와 바느질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용희.

그러다가 각자 환자를 받았고 그러다 보면 또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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