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인파, 기차 경적음, 트럭과 군인들, 멀미, 중국 땅인데 일본이 점령한 만주. 그리고... 점례는 감은 눈 사이로 검은 점과 흰빛이 무수히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군용막사에서 점례는 세상의 끝이 여긴가 보다, 생각했다. 더 갈 곳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 많은 군인들과 군가 소리, 삶과 죽음이 하나도 다르지 않은 전쟁터, 그곳에서 점례는 유지 호사카를 만났다.
장교 숙소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세상의 끝에는 막장 말고도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만주를 거쳐 경성으로 그곳 인사동에서 유지 삼촌을 만난 것은 다 유지 덕분이었다.
유지가 없었다면 그녀는 고향으로 갔을까. 환향년 손가락질을 받다가 대들보에 목매 달아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슬픈 가정은 그만두고 점례는 지금 파리유학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점례는 어느 사이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멀리서 황금마차가 다가왔다. 고삐를 잡은 여인은 어서 타라고 했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돌려 세웠다.
환상이다. 꿈인가. 그는 엎어진 화구를 조심스럽게 챙겼다. 거리 상점들이 하나 둘씩 불을 밝혔다. 한 사내가 점례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리지 않았어도 그는 달리는 것 이상으로 빨랐다.
흐릇한 형상, 누군가. 이번에는 여인 대신 휴의였다. 그는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군복을 입고 있다. 총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곧 돌진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만, 쏘지 마. 점례는 눈을 떴다. 극도의 피로감이 엄습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일어나서 찬물을 찍어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쓱쓱 손에 쥔 연필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잠시 후 소녀 하나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얼굴이 흐릿하게 하얀 여백을 채웠다. 빛나는 마차를 타고 온 여인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밖은 잠시 전에 보았던 환영처럼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가로등 불빛이 빛났고 그것이 바람이 불면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후하게 길게 한숨을 내쉰 점례는 파리에 오면 모든 것을 잊고 그림만 그리자고 다짐했으나 그것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잘하고 있는데 하필 그때 편지가 왔다. 안 봐도 되는 것을,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난 후 점례는 마음이 심란했다. 참의원의 편지만 아니었다면, 거기에 휴의와 동휴에 대한 이야기만 없었더라면 점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닥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점례는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이 자신을 가로막더라도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을.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시인의 길을 갔던 그 젊은 청춘을, 점례는 그가 갔던 그 길을 갈 수 있고 가고자 했고 그 결심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심감이 서자 점례는 다시 차분해졌다. 경성에 있을 때 점례는 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쓰고 다니는 젊은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어느 날 그 시를 필사한 작은 시집을 손에 들었다.
정식 출간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그런 것에도 손을 뻗쳤다. 불순한 내용으로 시민의 의식을 마비 시킨다며 세상에 나오는 것을 방해했다. 집요하고도 비열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습관에 따라 그 시를 외웠다. 갑자기 시가 떠올랐다. 먼 이국땅에서 소리 내 읆으면 기분이 새로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가슴 속이 소금에 저민 생선처럼 축 늘어졌다.
점례가 이러고 있을 때 유지도 유지 나름대로 편지 때문에 마음을 썩히고 있었다. 휴의니 동휴니 하는 조선인이 언급된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일신의 걱정이 앞섰다.
천황제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알겠지만 책임을 온전히 군부에게 물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은 옳지 않았다. 군부라면 자신도 군부가 아닌가. 죽기로 싸웠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죽어 나갔던가.
지금도 잠결에 들려오는 사자의 비명 때문에 유지는 간혹 잠을 설치는데 아버지는 왜 그래야 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의 분위기가 패전으로 기울고 있어도 그래서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것이 군인일 수는 없었다.
희생자를 또 다른 희생물로 삼으려는 그것에 대해 유지는 반기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가 지웠다가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묘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
일본을 떠나 올 때 완전히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살자고 다짐했으나 그러지 못할 처지에 이르고 보니 그는 당황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밖으로 나오던 점례를 마주쳤다.
약속한 것은 아닌데 산책 나온 점례와 센 강변에서 딱 만난 것이다. 둘은 서로 놀랐고 반가웠다. 서로 상대에게 달려왔다.
‘나 배고파.’
유지가 말했다.
‘나도.’
점례가 웃으며 받았다. 점례는 늘 이렇게 대하는 유지가 고마웠다.
'어디가? 이 밤중에, 그것도 혼자서.'
하고 나무라지 않는 유지. 사랑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동지를 넘어 나의 사랑이다. 점례는 기쁨에 극에 달해 울고 마는 사람처럼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았다.
‘당신이 만들어 주는 된장찌개를 먹고 싶어.’
‘여기에 된장은 없어. 조선으로 갈까. 된장찌게 먹으러?’
농담을 했으나 유지는 받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만들면 되지.’
‘당장은 안돼. 메주를 쑤어야 하고 발효하는 데 시간이 걸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나오는 게 아냐.’
‘그런가. 그럼 먹고 갈까.’
‘그래요.’
‘모처럼 술이 당기는군.’
‘미투.’
점례가 영어로 찬성을 표했다.
둘은 요기도 하고 술도 먹을 수 있는 간이 술집으로 들어갔다. 늦은 저녁이 아니라 저녁을 막 먹었거나 먹으려는 사람들로 식당은 조금 붐볐다.
노랑머리, 파란 눈들이 동양인 남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호기심 어린 눈길로 시선을 마구 굴렸다. 둘은 그런 눈에 익숙해서인지 관심 밖이라고 따돌리고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먹고 그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유지는 아버지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해야 한다고 조금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써야죠. 당연히.’
점례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런데 잘 안 되네. 몇 번 썼다가 다 버렸어. 아버지를 모욕할 순 없잖아.’
점례는 순간 뜨끔했다. 유지의 입에서 모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것이야말로 모욕이라는 듯이 멍하니 유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누구보다 부친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지가 아버지에게 모욕이라니.
‘당신도 읽었잖아. 전쟁의 책임을 군부에 돌리자고 아버지는 천황의 동생에게 편지를 썼어. 하지만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는 아니야. 나도 군부잖아. 난 고급장교였어. 군인이었다고.’
유지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편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점례는 휴의나 동휴로 대화가 옮겨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가 조선인을 꺼내면 아무래도 점례는 불편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상은 빗나갔다. 전혀 다른 데서 점례는 유지의 고통을 보았다.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편지를 받지 못한 것처럼 여기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아니면 그것에 대해 코멘트 하지 말고 유학 생활의 순조로움에 대해 그리고 그림에 대해서만 적으라고 조언했다.
아버지 편의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영사관하고 소통도 잘 되고. 자신은 물론 점례도 그림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특히 당신은 요즘 글쓰기에 빠졌으니 곧 단편 소설 하나가 나올 거라고.
아버지는 이제 피카소와 같은 위대한 화가를 아들로 둘 수 있다고, 아니면 모옴이나 모파상 같은 대단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유지는 그런 말을 열을 올리면서 하는 점례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술잔에서 입을 뗐다.
점레는 아직 다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듯이 입술을 약간 들썩였다. 하지 못한 말을 유지가 대신 해 주면 어떨까. 며느리는 더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 줄 수는 없을까.
그런 말이 나오면 점례는 당황할 것이다. 아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유지는 그 말을 입에 담기 위해 눈을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점례의 말에 덧붙여 나와 함께 온 동지 점례는 자신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프랑스어도 유창해 자신이 배우고 있다고 그런 칭찬의 말을 하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기대했으나 나오지 않자 오리혀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점례는 편지에서 떨어져 나와 화랑가로 시선을 돌렸다. 유지와 함께 어느 모임이 참석했다.
그러면 유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 상황이 오면 점례는 자신도 모르게 떨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듯이 몸이 떨려왔다.
유지는 사람들에게 손잡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내 부인이라고도 했고 동지라고도 했으며 애인이라고도 했다. 상황에 따라 유지는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그것에 불만은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에서 유지는 나를 그냥 점례라고 했다. 점례 마사코. 그래 내 이름은 점례이며 마사코다.
‘그럼 책임이라든가 군부 이야기는 아예 빼 버리자고요.’
점례가 강조했다. 그러나 유지는 자신의 의견을 반드시 내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고 확실히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답장을 놓고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점례가 또다시 묘안을 냈다. 각자 편지를 써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보내자고. 당신도 아들, 나도 아들.
‘어때요?’
유지가 눈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잔을 들어 건배했다.
‘좋았어.’
둘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