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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6:02 (금)
강물도 풀리고 산속의 눈도 녹기 시작하는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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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풀리고 산속의 눈도 녹기 시작하는 봄이 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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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에서 휴의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관 한 명도 같이 있었는데 그는 마시다 만 술이 못내 아쉬운 듯 석양보다는 노량진으로 다시 건너가기를 바랐다.

거기라면 마음 편히 한 잔 더 할 수 있는 비밀장소가 있었다. 휴의는 해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오자 부관이 바라는 대로 다시 타고 왔던 나눗배를 이용해 노량진으로 돌아왔다.

강물은 풀리고 있었다. 그늘진 구석에는 얼음 덩어리가 뭉쳐 있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깨졌고 아직 그러지 않은 얼음은 이따금 깨지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부관은 휴의가 왜 마포로 왔다가 다시 노량진으로 가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장소를 자주 옮겨 적의 추격을 피하려는 목적도 아닌 것 같았다.

최근들어 추격당한다거나 미행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한 곳에서 잠자코 있어도 되는데 자꾸 외출하는 것이 되레 불안을 재촉했다. 옮겨 다니기를 수시로 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곳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었다. 이동에 관한 것은 전적으로 휴의에게 맡겼으나 때로는 자신의 의견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부관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 오는 인왕산 자락에 있는 동료때문이었다. 방에만 있는 날에는 두통 때문에 참을 수 없었고 어쩌다 잠을 자면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날 묻어줘요, 추워요. 대장님.'

벌떡 일어나면 식은 땀이 흘렀다. 급해서 묻기는 커녕 솔가지 몇 개 꺾어 놓고 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도 그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휴의의 꿈속에서 보챌 일은 아니었다.

휴의는 꿈을 꾸고 나면 어디든 움직여야 했다. 터질 것 같은 두통은 밖으로 나오면 잠잠해졌다. 노량진에서 마포로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때로는 영등포 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나 휴의는 대개 한강을 넘나들었다. 강물을 보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명년 봄에 인왕산에 한 번 오르자.'

그는 부관에게 말을 하면서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 이유를 부관은 알고 있었다. 두 명의 부관 가운데 한 명이 죽은 곳이 바로 인왕산이었다.

철수하는 독립군 부대를 엄호하던 휴의 소대는 적과 교전하면서 선두에 섰던 부하 하나가 그 자리에서 죽는 피해를 봤다. 나머지 한 명은 부상병이었는데 그가 솔가지에 덮힌 부관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슴을 스쳐 지나간 총알 이어서 치료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 산을 넘자 마자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은 피가 과다 출혈로 이어지면서 안색이 창백해 졌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한시가 급한 휴의 부대는 잠시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가 곧 죽을 것을 알았다. 숱한 전장에서 보아온 바에 따르면 부관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를 이기고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부관이 그런 상태였다. 휴의는 그와 작별을 준비했다. 그것은 길게 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슬픔이 아무리 크고 진해도 헤어질 결심을 한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부관도 자신이 죽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부대장에게 어서 피신하라고 재촉했으나 숨이 떨어질 때까지 휴의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에 그런 호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부대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휴의는 그런 부하들에게 애초 계획이었던 작전대로 각자 도생하다가 상해로 잠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명의 대원들은 각기 자기 식대로 작별 인사를 마치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하산했다.

휴의는 허리춤의 권총을 부관에게 건네주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마지막 고통으로 괴로워 하기보다는 스스로 택하는 마지막 저승길을 빠르고 쉽게 끝내라는 의미였다. 지금까지는 타의에 의해 움직였다면 인생의 종착역은 자기 결정권에 맡긴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장님, 전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할 수 없어요. 저를 처리해 주세요. 그리고 대장님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그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눈을 한 번 꿈벅한 그는 이내  고통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발을 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보니 군화 사이로 피가 번져 있었다. 발에도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휴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게, 친구. 저승에서 만나면 날 원망말게.'

총성 한 방이 산의 골짜기를 타고 저멀리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 소리를 신호로 휴의는 먼저 달려 간 동료들과 합류하려는 생각보다는 추격대를 피하기 위해 내쳐 달려 내려갔다. 총소리를 들은 추격대는 미친개처럼 소리치고 달려 들었다. 

휴의는 그들보다 더 빨리 달리면서 진달래 꽃이 활짝 피는 봄에 다시 찾아 오마하고 약속했다. 바위 밑에 암장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돌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장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려올 때 큰 바위를 확인했고 그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대검으로 바위에 그의 이름자인 신동만의 늦을 만자를 대충 새겨 놓았기 때문에 주검의 위치는 확보한 상태였다.

휴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겨울도 지나가고 있다. 삼월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아직 찬바람이 냉골을 휘감고 돌지만 보름 후쯤이면 산골짜기의 눈을 녹인 바람이 기온을 끌어 올릴 것이다.

그는 다른 생각 없이 제일 먼저 그 일을 하려고 했다. 땅을 파고 장사 지내주고 싶었다. 적의 손에 넘어간 동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이 스스로 처리한 부하의 죽음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가 상해로 가는 일정을 자꾸 미룬 것은 그같은 이유도 한 몫했다. 살아서 돌아간 동료들은 임정과 떨어진 끈을 찾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수가 복귀했으나 애초 계획에 어긋나게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은 대원들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산 속으로 숨었고 일부는 야밤에 고향에 들러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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