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조정은 이런 식으로 정리해 두었다. 황실이나 군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시에 따른 대책이 내놓기 어려웠다.
정쟁을 일삼을 일도 아니었고 책임을 물을 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안보다는 밖이 더 중요했다. 의원은 이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여론은 그렇게 밖으로 쏠렸다. 의원은 애국심을 강조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합심해서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피자의 마지막 안식처인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략은 먹혀 들어갔다. 전선을 더욱 확대하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원의 주장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애국심이 바닥 깊은 곳에서 부터 넘쳐 흘렀다. 의원이 입에 침을 흘리면서 열변을 토할 때는 모두가 숨죽였고 움음지었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군중을 보면서 의원은 자신 앞에 적이 있다면 당장에 박살 낼 듯한 기세로 주먹을 휘들렀다. 격한 분노가 뜨거운 공기를 타고 하늘로 퍼졌다.
그러고 나서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집이 아닌 술집으로 찾아든 그는 대취한 상태로 료칸에서 뻗었다. 그 순간 의원은 분노와 회한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양심은 속일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의원의 마음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방의 구석에 쓰러진 그는 몸을 말고는 쥐새끼처럼 숨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몸을 온전히 감출 쥐구멍은 없었다. 총독이라는 자는 평화 시에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죽음의 목전에서는 소변까지 지리지 않았던가.
그 냄새, 암모니아 썩는 냄새가 나는지 그 와중에도 의원을 코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역겹다, 더럽다. 그는 제대로 발음을 하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그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던가. 권총을 들고 적과 맞서 싸우지 못한 소심함이 앞섰다. 일본 육사 출신이 보여야 할 위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신의 육사 선배인 총독을 생각할 때 더욱 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이렇게 숨어 있지 말고 나가서 싸우자고 했으면 의원은 기꺼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의원의 가슴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것이 총독책임인가? 내가 왜 먼저 앞서지 못했을까.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비서가 놀란 듯이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의원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한참을 지나서야 멈추었다. 둘 중 누구라고 숨기보다는 숨겨둔 권총을 꺼내 들어야 마땅했다.
이런 일에 순서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반성도 하고 참회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처참한 죽음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는 위로의 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내렸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매일 술을 먹었고 취하면 씁쓸한 기분을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울었고 잠이 들면 울기를 멈추었다.
그 무렵 총독은 자신이 한 뒤처리에 만족감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적의 목을 쳤고 참의원도 그것을 보았다.
누구도 이런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본국의 정계나 황실에서도 나의 이런 자랑스런 무용담이 지금쯤 널리 퍼졌을 것을 생각하니 총독은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턱수염을 연신 쓸어내리면서 죽을 때까지 조선 총독은 자신 것이라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참의원은 눈치 빠른 인사답게 일을 잘 처리했던 것이다.
본국에서 칭찬의 소리를 담은 서신이 속속 도착했다. 용감한 행위를 치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맨 뒷줄에 걸친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사전에 적발하지 못한 것과 총독 관저까지 괴한이 들어온 것에 대한 문책 비슷한 문장이었다.
‘어쨌든 옥체를 보존한 것은 잘한 일이며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무장관리를 해두시오.’
백번 지당하고 옳은 지적이었다.
그는 그런 서신을 받기도 전에 벌써 총독 관저를 이중 삼중으로 방어하는 시설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에는 10미터 간격으로 참호를 세웠고 이십 사 시간 경비를 서도록 했다.
경비병은 착검을 하고 착탄을 한 상태에서 접근하는 누구든 사전 경고 없이 찌르거나 발포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호기심 어린 백성 하나가 그 옆을 지나다가 정말로 죽여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병사의 총에 그 자리에서 죽는 일이 발생했다. 병사는 놀랐으나 놀라움은 곧 칭찬으로 이어졌다.
‘제군들은 이 병사를 본받으시오.’
모아 놓은 참모장은 살인자를 불러 세운 후 이런 칭찬의 말을 한 후 일주일간 포상 휴가를 주었다. 부러운 눈으로 동료들은 자신들의 총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나도 쏘고 나서 이런 칭찬을 받고 휴가를 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이후 흰 옷 입은 사람들은 그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개미들도 피해 갔고 새 들고 그 앞으로는 날지 않았다. 그야말로 철통 경비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총독은 자신의 수모를 의원 못지않게 겪은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혼자 있지 않고 참의원과 같이 있으면서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더군다나 체신머리 없이 오줌을 지리다니.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사람이 없자 오른손으로 사타구니를 잡고 세게 꼬집었다. 스스로 내린 벌이었다.
아픔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그는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보면서 3층 관저에서 쪽방의 구석진 곳에 숨기보다는 대항해서 싸우지 못한 것을 참회했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얼마든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서고 있는 지금 이 마당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것이었다.
더구나 참의원 앞에서 오줌을 지린 사실이 치욕으로 남았다. 그가 입이 무거운 것은 알겠지만 술김에 혹은 저도 모르게 총독이 오줌을 쌌다고 소문낼 것이 두려웠다.
그는 지릴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 손으로 참의원을 살해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사건이 끝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장검을 꺼내기보다는 권총으로 참의원을 저격해야 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아닌 격멸해 마땅한 적이 한 일이다. 그 적은 자신이 처치했다. 이런 식의 시나리오를 생각하자 총독은 또다시 화가 나서 이번에는 발을 굴렀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총독이 제풀에 지쳐 화를 멈출 즈음 전열을 정비한 휴의 군대는 신촌을 거쳐 마포를 지나 노량진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