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희는 거리로 나섰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리게 걸었다.
플라타너스가 잎을 떨구고 가지를 일부 드러냈다. 앞선 나무에서는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피하지 못한 전투기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었구나 같은 마음도 일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렀다. 둥근 열매 사이로 흰 구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 곧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상해서 처음 맞는 겨울은 어떻지 용희는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이 들었다. 눈이 온다는 것, 하얀 눈을 본다는 것에 마음이 들떴고 얼마나 추울지 난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웠다.
아무렴 시골 죽마을 보다 춥기야 하겠는가. 대신 많이 왔으면 좋겠다. 통행이 불편해 환자가 적어도 하얀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다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다.
비록 같이 놀아줄 친구는 없지만 말수에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다. 그녀는 눈 덮인 들판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표식을 남기며 걷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도 어제 처럼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날 것이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용희는 병원문을 열기 전 잠깐 둘러볼 요량으로 걸었는데 제법 많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아쉽지만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너무 늦지 않기 위해서는 되돌아가야 한다.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잘 보이지 않았던 조계지의 건물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이 났고 그것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런 건물들을 지은 유럽 사람들과 유럽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빅벤 모양을 본뜬 시계가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높이 걸려 있었다. 저 건물은 필시 영국사람이 영국을 심어 놓기 위해 지은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건물은 커다란 기둥이 우람한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저게 이오니아식인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고딕 아니면 르네상스식, 그녀는 온갖 건축 기법을 생각나는 데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녀는 프랑스에 가고 싶었다. 저 건물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면 지을 수 없을 것이다. 확실치도 않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층수를 세면서 프랑스 건물이라고 생각한 빛나는 대리석으로 둘러쌓인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프랑스라면 여기보다는 더 좋을 것이다. 거기서라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종일 걸어 다녀도 하나도 없다. 자신을 감출 수 있을 때 용희는 마음이 편했다. 여기서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여기는 일본인 천지가 아닌가. 피아노 음계처럼 박자를 맞추며 걸어가는 군인들도 많다. 누군가 등 뒤에서 용희야, 너 용희 맞지? 남양군도 하면서 덥석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온몸에 식은땀이 싸하고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그것은 심장을 관통하고 두개골을 뚫고 지나갔다. 잠깐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상해에서도 그녀는 불안했다. 그것은 말수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후에 더 심해졌다. 중국은 조선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열강에 먹힌 중국의 처지는 용희 자신이었다.
이 큰 나라가 어찌 저 멀리 바다 건너온 이방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가. 난징조약이며 개항이며 치외법권 같은 말들이 용희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용희의 발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어쩌면 지금쯤 환자가 대기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리석은 생각을 떨치기 위해 용희는 다른 사람이 보아도 서두른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숨을 가다듬으며 병원 앞에선 그녀는 안의 상황이 어떤지 눈이 아닌 마음으로 상상해 봤다. 그리고 간판을 한 번 보고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부지런한 환자는 없었다.
말수는 복장을 차려입고 차트를 보면서 일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같이 나가자고 했으나 그는 오늘 환자들이 많아 미리 준비해야 한다면서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8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식사 후 용희가 산책한 시간은 30분 정도였다. 오고 가는데 그 정도 시간뿐이었는데 용희는 오늘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보고 가던 걸음을 되돌려 사 먹고 싶은 마음처럼 프랑스는 그날 이휴 용희의 마음 한구석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보고 느낀 것이 많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