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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0-06 18:20 (목)
이 길을 계속 가야 할 지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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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계속 가야 할 지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8.1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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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허리춤의 회중시계를 끌러 손에 쥐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것이 점차 온기를 품었다. 권총을 잡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 시작은 헤어지는 여인처럼 매몰찼으나 때가 돼서 뒤돌아보면 작은 온기 로 살아나곤 했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오후 4시 30분, 이제 곧 시작할 것이다. 실패를 해도 시작은 있고 끝은 있다. 성공해도 마찬가지다. 휴의는 숨을 가라앉히고 움직이는 초침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지금이 그때인가 하고 고정된 눈을 작은 원판에서 떼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시계를 보는 순간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했다. 성났을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심장의 박동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언제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 초침을 볼 때였다.

어떤 경우든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노을이 자신들이 섰던 곳에서 아래쪽으로 빛을 내뿜었다. 저곳에 언제 있었지? 마치 오래전의 일처럼 휴의는 자신이 내려왔던 곳을 올려다봤다.

해는 곧 지고 주변은 어두워 질것이다. 자명한 이치 앞에서 휴의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이 그처럼 뚜렷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서 너 명의 학생들이 늦은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힘이 없었고 허리에 맨 책보는 그들의 어깨처럼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한 창 팔팔해야 할 아이들의 저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필경 과락을 받아 나머지 공부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나왔을 것이다. 손에 묻은 냄새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것을 닦았다는 이유때문에 저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무심한 듯, 아무런 감정을 섞지 않고 휴의는 시계에서 눈을 떼고 학생들이 지나가고 난 뒤의 빈 운동장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누런 황토 바닥이 곧 그보다 더 진한 피로 물들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저 학생들은 삽질로 피를 닦아 낼 것이고 차라리 화장실 청소를 자청할 것이다. 피의 비린내를 참을 수 없다며 차라리 화장실 청소로 바꿔 달라고 하소연 할 것이다.

'선생님, 피 대신 똥을 닦게 해주세요.'

'안 된다, 너희들은 똥 닦을 자격도 없어.'

선생님은 매몰찼다. 

학교에 온 아이들의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담임을 닥달하면서 내 아이에게 피를 닦는 일만은 시킬 수 없다고 윽박지르고 항의하고 읍소했다. 그래도 먹히지 않자 학업을 그만두면 모두 담임 책임이라고 몰아 붙였다.

'그러면 선생인 제가 닦을까요?'

'좋지요.'

휴의는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 그 피의 주인공들이 이렇게 자신의 앞뒤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피비릿내가 그 정도로 혐오감을 주는지 새삼 놀랐다. 

휴의는 고개는 그대로 둔 채 좌우 옆으로 눈을 돌렸다. 출동 명령을 기다리는 눈들이 반짝 반짝 하고 어둠속의 고양이처럼 번쩍였다.

이들은 필경 피를 흘릴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많이 흘린 자는 죽을 것이고 아주 조금 흘린 자는 부상병으로 남는다.

휴의는 피를 생각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피는 어떤 경우든 기분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의 피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빠져 나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 대신 자신이 그럴지도 몰랐다. 휴의는 피가 모두 빠져 나간 창백해진 얼굴의 자신을 떠올렸다. 핏기 없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하늘을 보거나 혹은 코를 땅에 박고 영원히 그 자세로 있는 자신을.

이런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줄 병사들은 없을까. 그들도 나에게 이런 온정을 베풀 만한 여유는 있다. 그까짓 눈짓 하나 보내는 것, 어려울 것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휴의는 그런 눈빛으로 병사를 바라 봤고 눈이 마주친 어떤 병사는 정말로 자신이 보냈던 눈빛과 똑같이 동정어린 눈길을 주었다.

고맙다, 네가 내 마음을 아는구나. 큰 위로가 된다. 전투를 앞두고 자신들의 퇴로는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동지의 탈출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우는 두고두고 자랑해야 마땅하다.

그래 저 눈길, 방금 전에 나에게 던졌던 저 눈길을 나는 신의주에서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받았다. 그때 그 표정 하나로 나는 죽었던 힘을 살렸고 용기를 얻었고 마음의 평안을 가슴 깊숙한 곳에 심어 놓았다.

이런 마음이 들자 휴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의식적으로 지으면서 부하들을 다시 한 번 둘러 보았다. 이 순간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말을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얘기나 듣고 싶은 말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한 터였다.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도 있었고 어서 빨리 뛰어 들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의 눈동자도 보였다. 그 의지는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에 두려움이 사라지면 의지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어떤가. 두려움은 아니다. 그것이 없는 단순한 용기다. 그 용기는 신념이다. 아니다, 회한이며 복수다. 휴의는 자신은 어떤 경우인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아마도 이 순간 조국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은 그와는 상관없는 것이 돼버렸다.

독립에 대한 열망도 그와 비슷했을 것이고 내가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같은 영웅주의적 사고도 아니었다. 지금 휴의는 자신을 생각하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따라서 자신이 만주 토벌대 군인으로 저지른 악행에 대한 반성의 의미 같은 것은 애초에 자리잡을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점례인가. 맞다. 지금 이 순간, 점례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런 판단은 정확했다. 그래서인지 시계를 보면서도 상해나 상해에 있는 관계자들 역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점례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딱히 그녀가 앞에 있다고 해도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적들을 몸으로 방어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기에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이런 혼란스러웠던 내 마음을 별 것 아닌 것 처럼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맞을 것이다.

이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다. 휴의는 휴하고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다고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직장인과 같은 신세였다. 

휴의는 독립 전쟁 역시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불쑥 직업이 뭐요 하고 묻는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내 직업은 독립전쟁이오, 하고 답할 것이기에.

이렇게 까지 마음이 심란한 적은 없었다. 휴의는 그것이 조선땅이라는 공간에 자신이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훗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과 같은 전투를 앞두고 그런 망상의 꼬리를 이을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 다시 왔을 때 고생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여긴다면 그 귀향은 올바른 것인가. 휴의는 흔들렸다. 흔들리는 마음을 동료나 부하들이 알까 봐 숨기지 않았다.

뭘 감추고 할 만한 것이 안 된다고 여긴 까닭이다. 부하들은 아직은 이런 휴의의 마음을 알 지 못한다. 그런 자신이 있었기에 휴의는 연달아 휴하고 한 숨을 쉴 수 있었다.

휴의는 이번 작전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이 길을 계속갈 지 아니면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살아 있다면.

살아서 적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나서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그 생각을 해야 한다. 휴의는 자신의 삶이 무장 독립운동으로 죽을 때까지 있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젊었다. 더 늙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바로 타향으로 도망치듯 떠나오는 것이 지금보다는 낫다. 장사를 하자. 산 속의 중이 되자.

지금까지 경험한 숱한 일들은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야 한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다. 눈앞의 닥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상해에서 그런 명령을 받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사나이 약속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그런 다음 시간을 두고 나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자.

휴의는 운동장에서 시선을 다시 시계로 돌렸다. 5분이 지나 있었다. 빠르다. 보고 있으면 느린데 안 보고 있으면 빠르게 가는 것이 시간이다.

그는 무전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애초 목적지 였던 수성동 계곡 보다 더 적진 깊숙이 들어왔다. 상대는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으나 왜 애초의 장소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 항의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휴의의 결정을 믿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다만 적의 공격으로 부터 최소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한 현명한 판단으로 이해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총독부를 공격한 선발대의 후방이지만 전방보다 더 위험하다고 휴의는 그 순간 느꼈다. 아군이 후퇴할 즈음이면 적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굉장한 인원으로 뒤쫓을 것이다.

그들을 막아내야 한다. 화가 난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덤벼들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기로 싸우면 실제로 서로 죽는다. 죽어도 할 수 없다.

탈출하는 동지들이 안전한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한다. 휴의는 어쩌면 자신의 부대가 오늘의 작전으로 전멸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두려움이 약간씩 몰려왔다. 그것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바로 죽지 않고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에 대한 공포였다.

단 한 발의 총알이나 한 번의 깊숙한 대검으로 생과 사의 시간이 짤라에 불과하다면 죽음은 더 이상 위협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고 피를 쏟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더 최악인 것은 부상병으로 포로가 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포로는 고문을 의미하고 고문은 지옥이다. 천당을 믿지 않는 휴의는 지옥은 믿었다. 더구나 동족에게 받는 고문은 그 아픔이 남달랐고 치욕은 배가 됐다. 이미 맛본 지옥을 더는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휴의는 부하들도 자신처럼 권총을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꼭 건의해야지. 작전에 투입되는 병사들에게 그럴수만 있다면 소총과 함께 권총을 지급하라고.

그것은 자신의 최후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며 결코 마지막을 경솔하게 처리하는 것은 아니며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붙잡히는 것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더 낫다.

가장 최악은 벗어나야 한다. 휴의는 낮은 자세로 자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포로가 되느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

악명 높은 순사들과 그들은 보조하는 조선인들이 행하는 고문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휴의는 그 순간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아니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자신이 일본 관동군 출신이고 그곳을 탈출했다가 잡혀 고문을 받았던 사실까지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가 그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는 그 순간 연달아 총소리가 들렸다. 선발대가 총독관저에서 지르는 기관총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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