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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의 달은 높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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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의 달은 높게 떠올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10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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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그들을 멋지게 따돌렸다. 우체국에 들렀던 것은 혹시나 모를 미행자를 유인하기 위한 묘수였다. 그는 우체국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와 바로 황실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 명의 접선자를 만나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할머니는 어느 새 변장을 끝내고 진짜 할머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련된 양장 차림의 곱게 늙은 여인은 시골 촌노로 변해있었다. 흰옷에는 얼룩 무늬 반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치마는 해졌으며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집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있어 누가 봐도 거지꼴 간신히 면한 서민층이었다. 그녀의 몰골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겨우 피죽을 얻어먹은 것처럼 핏기가 없었고 걷는 걸음은 활력이 떨어졌다.

그렇게 할머니는 휴의가 건네준 보따리를 이고 서대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머리에 인 것은 왕관의 무게와 견줄만한 것이었다. 무겁기도 했지만 그것은 상해 독립군의 명줄을 잇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가지고 상해에 도착해야 한다.

할머니는 종로통을 벗어나는 것이 급해 서둘렀다. 어둠이 내리기 전 안전가옥에서 한숨을 돌린 그녀는 보따리를 세게 껴안으면서 독립자금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내일 일찍 경성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잠이 필요했다. 그 무렵 휴의는 인사동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임무의 절반은 완수됐다. 예상했던 기간보다 짧지고 길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이었다.

그는 내일 이곳을 떠나 상해로 간다. 그러기 전에 점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다시 만날 그날을 언약해야 한다.

그는 그녀가 일하는 조선일등 화랑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어스름 불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초저녁이었다. 달은 멀리서 떠올랐으나 아직 빛을 밝히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그녀는 지금 안에 있을까. 아니면 전시 준비를 위해 다른 곳에 있을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일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별로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그 사이 점례를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자 휴의는 그동안 만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쫓기는 몸이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두 번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그러려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다 된 밥에 재 뿌릴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이 개인적 욕심에 앞섰던 것이다. 무엇보다 점례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이제 작전은 끝났다. 편한 마음으로 점례에게 상해로 간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있으라.'

그것 마저 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더는 점례를 볼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점례가 그동안 얼마나 변했고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어 휴의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그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알아야 한다. 휴의는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주변을 크게 돌아서 다시 원위치로 왔다. 미행하는 자는 없었다. 화랑에 불이 들어왔다. 주인인 듯한 사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열려진 틈으로 벽에 걸린 유화와 각종 화구들이 눈에 띄었다. 휴의는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흥정하는 체하면서 점례의 소재를 확인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행인 가운데서 서성이고 있을 때 저쪽에서 화구를 어깨에 맨 한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점례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사내가 마주 나와 그녀 쪽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휴의는 점례의 존재를 모른 체 했다. 다행히 사내는 몇 마디 하고는 점례와 헤어졌다. 아마도 저녁 약속 때문에 나가다 마주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가게문을 아예 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한 삼 분쯤 후에 휴의는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입구에 있는 붓과 그림을 보면서 화구를 구입하는 손님처럼 행동했다. 남자가 나갔으니 안에는 부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인은 몸져누웠다고 했다. 그사이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휴의는 주인장을 불렀다.

‘안에 누구 있소. 붓 하나 팔으쇼.’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였다. 이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휴의는 안쪽으로 두어 걸음 더 들어갔다. 점례는 계단을 다 내려와 우뚝섰다.

'휴의.'

입술 모양으로 휴의는 점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례.'

휴의도 답례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었다.

점례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안에 삼촌 부인이 있다고 조심하라는 투였다. 그녀는 휴의가 빨리 볼일을 보고 가게를 나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불안한 기색을 휴의를 알아챘다. 그런 표정을 그는 수많은 추격과 도피 과정에서 보아왔다. 다급하게 무엇을 바라는 긴장된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는 표정 말이다.

휴의도 그럴 생각이었다. 삼분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해로 갈 거라고 말했다. 언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음에 조선에 오면 그때는 길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술대회서 꼭 수상해.’

그는 점례의 손을 잡기 위해 한 발 더 다가갔다. 이층에서 누가 내려온다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가 위쪽을 견제하고 있을 때 점례는 창밖을 주시했다.

'무사히 다녀와.'

그말을 하면서 점례가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떨어졌다. 워낙 빠른 순간이었기에 그녀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휴의는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배가 출출했다. 그는 안국동을 거쳐 총독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되레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검문이 있다면 광통교 쪽에 집중될 것으로 보았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종로서의 인원들은 그쪽에서 대대적인 밤 작전을 펼쳤다. 휴의는 총독부를 앞에 두고 유유히 사직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통인 시장에 들러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북악산에 올랐다. 산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경성역으로 나갈 것이다. 바람은 선선했고 하늘의 달은 높이 떠올랐다.

휴의는 눈을 감고 점례를 생각했다. 그리고 상해에 도착해 임정 요인을 만나는 짧은 꿈을 그날 밤 휴의는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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