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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6:02 (금)
짧은 도취의 순간을 뒤로 하고 그녀는 종로 3가를 조용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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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도취의 순간을 뒤로 하고 그녀는 종로 3가를 조용히 외쳤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29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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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두 팔을 벌리고 우뚝 솟은 바위를 향해 몸을 던지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원찮은 몸의 용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는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떨어져 내린 사람은 내가 아닌 그들이다.

그러나 말수의 뇌리는 한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투기의 돌진과는 다른 것이었다. 살 수 있는데도 그러는 것은 어떤 집단 최면 말고는 이해될 수 없었다. 번지점프에 나선 연예인들처럼 그들은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하면서 쉴 새 없이 낙하했다.

생각 같아서는 달려가서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말수는 그들을 돌봐줘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오금이 저려오자 말수는 소변을 참기 위해 다리를 꼬았다.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다. 말수는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그들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기까지 했다.

군인과 여자와 아이들이 지르던 불과 하루전의 그 함성에 대해 말수는 오만 인상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빨리 잊을 수 있을지 머리를 가로젓기만 했다. 용희는 살아날 것이다. 그가 돌봐야 할 대상은 뚜렷했다.

그날 밤 말수는 흰 포말 위에 붉은 피가 일렁이는 절벽이 벌떡 일어서서는 자신을 덮쳐 오는 꿈을 꾸었다. 절벽처럼 벌떡 일어난 그는 이마가 온전한 짚어 보았다.

그리고는 피 대신 땀이 흥건한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찮아, 말수는 그런 말을 입으로 되풀이하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을 다독였다.

경성에 발을 디딘 점례는 감회가 새로웠다. 고향도 이런 고향이 없었다. 지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점례는 이제 자신은 살았다는 것에 확실한 안도감을 느꼈다.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왔으니 제나라에 온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숨죽였던 지난날이 마치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점례는 기차역에서 내린 사람답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대했던 경성역이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은 그때처럼 분주했고 하늘은 더 맑고 푸근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어디에도 자신의 손가방을 받아 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혹시나 기다렸던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오지 않을까, 그녀는 그런 설레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점례는 혹시 마중 나온 사람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부러 몇 차례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미리 나와 기다리지 않은 상대에게 보여주는 그런 언찮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맞이하는 그의 태도가 불만인 것처럼 점례는 반짝이는 가죽구두의 끝으로 땅을 몇 번 차기도 했다. 그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이 모든 행동은 경성에 도착한 기분을 느껴 보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기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그런 산뜻한 기분이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삼 년 전의 점례가 아니었다.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품고 겁에 질려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무언가 다가올 기대감에 들떠 처분만 기다리던 점례는 거기에 없었다.

세련된 옷차림으로 가죽 가방 하나를 들고 그녀가 광장을 가로질렀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행세로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도 이제는 싫었다.

그녀는 경성에 새로 온 누군가가 부러워할 모던 걸의 발자국을 뽐냈다. 멀리서도 그녀가 제법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잊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났다는 듯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지 삼촌을 찾아야 한다. 곧 해가 질 것이다. 아무리 제나라라고 해도 여자 혼자서 밤을 맞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여관에 들면서 허물없이 혼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해지기 전에 삼촌을 만나 유지의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점례는 서둘렀다. 약속에 늦은 것처럼 서둘렀다. 유지 생각이 한 번 더 머리를 스쳐 지나가자 다른 것은 시시해졌다.

그녀가 광장을 질러 종로 쪽으로 방향을 잡을 때 저쪽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군용트럭이 줄지어 들어왔다. 점례는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추 보아 십여 대였는데 그곳에는 짐대신 군인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으로는 막 도착한 트럭에서 수십 명의 여자 애들이 내리고 있었다.

타는 것도 처음이었고 내리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들의 행동은 굼뜨고 어색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나 되레 그 행동이 위태롭게 보였다.

짜증 섞인 호각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군홧발 소리가 뒤엉켰다. 겨우 하차한 그녀들은 트럭의 한쪽에 줄지어 섰다. 그때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안고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눈과 점례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뜨거운 불기둥이 갑자기 가슴을 치고 달아났다. 숨이 꽉 막혀왔고 심장의 고동이 기차 연기처럼 솟구쳐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이 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만들고 있었다.

현기증이 심해 그녀는 잠시 서서 머리에 손을 댔다. 이마에서 불이 났다.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깊은 바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할 수 있다.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 있다. 그녀는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기 위해 가방을 잡지 않은 남은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서너 번 쳤다. 그러자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줄 선 여자들이 대오를 유지하면서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저쪽에서도 십여 명의 젊은 여자들이 마주 와서 합쳐졌다. 도합 30여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점례는 눈을 감았다. 이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경성에 오면 그 기억은 사라질 줄 알았는데 기억을 살린 것은 만주가 아닌 경성이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데 마치 그런 처지에 몰린 것처럼 점례는 체념의 시선을 그녀들에게서 서둘러 거두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들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쾌한 기분은 불쾌한 일들로 인해 급하게 식었다. 짧은 도취의 순간을 뒤로 하고 점례는 종로 3가를 조용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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