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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이탈리아 기행(1816)-나의 제2의 탄생, 진정한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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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이탈리아 기행(1816)-나의 제2의 탄생, 진정한 재생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04.26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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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는 37살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제2의 문학인생을 활짝 꽃피웠다.
▲ 괴테는 37살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제2의 문학인생을 활짝 꽃피웠다.

[의약뉴스] 괴테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새벽 3시, 여행 가방 하나와 오소리 가죽 배낭 하나만을 꾸려서 홀로 우편 마차에 몸을 실었다’고 썼다.

당시 37세였던 괴테는 이미 유럽의 저명인사였다. 25살이던 1774년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더구나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추밀 고문관이었고 광산 운영 책임자이며 국방위원회 의장직을 역임했다.

한마디로 프리드리히 대왕 다음쯤 가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수행원 하나 거느리지 않고 나 홀로 외국 여행을 그것도 무려 이십 개월 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진실 여부를 따질 이유 없다.

그러나 말이 홀로 여행이지 그는 현지에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수많은 저명인사를 만나고 그가 알고자 하는 분야의 해박한 지식인을 곁에 두면서 여행목적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위대한 사람 앞에 사람들이 꼬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굳이 작가가 자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스파이라는 오인을 피하기 위해 감추기도 했지만 이름을 이용해 보통 여행객은 볼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을 가까이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심지어 교황의 의자에서 낮잠을 자는 특권까지 누리게 됐으니 그의 로마 여행은 황제 여행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듯 싶다.

그는 여행 중에 숱한 귀부인의 도움을 받았다. 독일에 있을 때도 슈뢰더 부인 등과 교류했던 그는 로마에서 앙케리카 부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들로부터 자신이 알지 못하는 회화나 조각 등에 안목을 키우고 자신이 쓰고 있는 문학작품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괴테에게 여성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예술혼을 태우는 원천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보고 배운 것을 독일에 있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들이 고스란히 이 여행기에 담겼다.

특별석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하고 여러 대의 마차를 타고 성 안토니우스 아바스의 축일을 즐겼다. 하인을 거느리고 폴크만의 여행서를 따라 골목을 걸었다. (그는 폴크만의 책을 여러차례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지적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이 작품을 썼다. <빌렐흠 마이스터의 수업>, <타소>, <파우스트> 같은 걸작을 내놓기 위해 여행 내내 단 하루도 게으르게 보내지 않았다.

밤에 잠이 들 때 이튿날 일과를 준비했고 눈을 뜨면 곧장 그것을 실천했다. 로마에서 보낸 기간 동안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렇게 말하면 뽐내는 것 같지만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장기간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그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여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괴테도 그 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괴테에게 로마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바다와 같은 곳이었다. 저녁이 되면 실제로 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만월의 달빛 아래를 거닐었다.

왜 하필 이탈리아였고 로마였느냐는 질문은 우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세계 그 자체였고 로마는 세계의 수도였다. 괴테 같은 유명인사도 이탈리아 앞에서는 속된 말로 ‘꺼벅’ 죽었고 로마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찬양하기에 바빴다.

읽는 내내 얼마나 로마가 대단하면 저런 식의 비굴한 표현이 나올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읽으니 재미가 더해졌다.

여기서 잠깐 괴테가 꺼벅 죽었던 대목을 읽어보자. (문장이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따로 발췌했다.)

11월 1일 로마. 드디어 나는 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했다. 피렌체 등 다른 도시를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너무나 강하고 순간마다 더 고조 되어 한 시도 멈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곳에 도착하니 마음도 안정되고 평생 안정될 듯하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그 감동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괴테 아버지도 일찍이 로마를 여행하고 나서 거실 벽에 그곳 지도를 걸어 놓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괴테도 아버지를 따라 꿈꿔 왔던 로마 여행을 실제로 하고 있다. 꿈이 아닌 실물로 그림 스케치 동판 목판 석고 코르크 세공 등 일찍이 알고 있던 것들이 눈 앞에 즐비하게 펼쳐져 있으니 그 감격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상상했던 그대로인 동시에 모든 것이 새롭다. 여기 와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마흔이 되기 전에 위대한 것을 연구하고 습득해서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자 한다. 몸소 로마를 보고 나서 내가 로마 땅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나의 제2의 탄생, 진정한 재생이 시작됐다.

만성절 대축제, 티치아노와 라파엘로의 불후의 명작, 시스티나 성당에 걸린 미켈렌젤로의 최후의 심판, 성당 전체가 모자이크로 반짝이는 성세칠리아 성당, 벨베데레의 아폴로 상, 모든 것을 작게 보이게 하는 원형극장, 키케로의 묘석 등을 보고 감탄했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웠다. 그리고 그렸다. 괴테는 실제로 자신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천재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잠깐 동안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다가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그래야 이득이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은 것이다.

: 괴테는 이탈리아 체류 기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림은 물론 조각 식물 농작물 동물 심지어 골상학 등에 한눈을 팔았다.

자신이 그 분야의 최고 천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거라는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이 그를 그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천재가 될 수는 없다.

괴테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를 알았다. 적절한 선에서 나아가고 멈출 줄 아는 지혜 덕분이다. 괴테는 로마뿐만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로마에 버금가는 감동을 받았다.

공화국을 떠날 때도 새벽 3시였는데 나폴리로 향할 때도 괴테는 그 시각에 출발했다. 유럽 시간이 우리와 다르다 해도 여행 출발이 이른 것만큼 확실하다. 부지런한 괴테다.

그런 부지런함 때문에 괴테는 불타는 베수비오 화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폴리를 보고 나서 죽어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새로운 세계를 보면 마음이 뛴다, 나폴리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폼페이의 비참함과 온갖 색채로 빛나는 소렌토의 절경, 로마에서는 공부하고 싶은데 이곳에서는 그저 즐기고 싶다, 나폴리에 오면 머리가 모두 이상해 진다, 나폴리 사람들은 자기네가 살고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믿으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참으로 비참한 곳으로 평가한다, 같은 감상기를 남길 수 있었다.

섬 중의 여왕, 시칠리아도 괴테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짧은 한마디만 보태자.

시칠리아 없는 이탈리아는 우리들 마음에 아무런 심상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칠리아야 말로 모든 것을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팔레르모의 기후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폴리를 떠나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굉장한 폭풍을 만나 멀미는 둘째치고 죽음을 넘나드는 공포에 시달렸다 해도 괴테의 위와 같은 몇 마디로 금세 사라진다.

여행기를 읽었으니 여행을 떠나는 일만 남았다. 괴테처럼 유명하지도 돈과 명성이 없어도 충분히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 단순한 여행기 이상의 이 책을 옆에 끼고 날 밝은 날 밤에 로마의 만월을 즐겨보자. 그랜드 투어는 멀리 있지 않다.

한편 괴테는 여행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오면서 수많은 예술품을 가지고 왔다. 예술에 대한 소유의 집착이 대단했다. 귀향할 때 가지고 갈 목록을 틈나는대로 정리했고 정리한 것을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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