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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그는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한 마리 노고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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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한 마리 노고지리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4.06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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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휴의와 어울렸다. 그가 애초 목적했던 훌륭한 군인의 길로 가는 적합한 곳이었다. 이 일에 일생을 바치기 위해 그는 흠뻑 빠져들었다.

고향과 몹시 떨어져 있어 잡념을 떨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최전선에서 때로는 육박전을 벌여야 하는 그런 곳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는 대규모 적과 싸우기보다는 밀정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숨어 지내는 자를 찾아내거나 그들이 밖으로 나와 무언가를 도모하기 전에 처치하는 임무였다.

그것은 고도의 정보력과 심리전을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애초 계획했던 대로 딱딱 떨어졌다. 사상 무장도 더 들어찰 곳이 없을 만큼 충만했다.

그는 독립군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다. 독립이 가당찮았고 그래서 그런 활동을 하는 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쁜 짓에 정의감이 불타올랐던 그의 심성과도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기에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복무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자고 돈도 버는 직업에 무한한 만족을 느꼈다. 그의 팀은 최근 목숨값으로 최대치가 걸린 독립군 두목격인 인물을 사살하는 임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체포하면 좋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 아니면 홀로 사람을 만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귀신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더 전의가 불타올랐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우고 싶었다.

독립군 수배자는 이미 한차례 본국의 중요 인물을 암살했고 그보다 더 큰 또 다른 일을 도모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사방팔방으로 그의 행적을 좇아 종일 머리를 짜내고 시내를 염탐하면서 휴의는 문득 왜 그는 그런 일을 벌이는지 궁금했다.

조선 신민이 본국의 인물을 해치는 일과 조선독립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그 가상한 용기의 원천을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일본이 조국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신민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차별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차이마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것으로 믿었다. 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저 믿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자연히 될 것을 그들은 자기 나라를 찾는다고 이국만리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잘못된 결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그는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일망타진이나 발본색원 같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어느 날에는 음식점을 급습하기도 했다.

팀원이 아닌 단독으로 쳐들어갔는데 한 번 늦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미쳐 먹다 만 국그릇은 아직 따뜻한 김이 올랐고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수저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결국 휴의는 실수를 저질렀다. 급히 뒤를 따랐으나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진 적을 찾는데 허탕을 치고 그는 부대로 복귀했다.

잡을 수 있는 것을 놓쳤다는 허탈감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심했다.

분노로 그는 얼굴이 붉어졌으며 자신의 주먹을 부대장이 부르기 전까지 시멘트벽에 마구 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마침내 부대장이 그를 호출했다. 작고 왜소한 몸집에 안경을 낀 그는 담배를 물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들어섰는데도 그는 아무런 기척이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휴의는 부동자세를 유지하면서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할복하겠다는 자세였다. 한참을 세워둔 부대장은 옆으로 오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재떨이를 들어 휴의의 머리를 내리쳤다. 담뱃재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오래 묵은 니코틴 냄새가 코로 스며들렀다.

동시에 흐르는 피가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보는 피맛이었다.

'이 조센징 새끼, 오냐 오냐 대해 줬더니 제멋대로야. 이 새끼야 일을 그르치고도 살겠다고 찾아왔어. 거기서 죽었어야지. 놈을 놓치고도 네가 사람이야. 조센징놈은 이래서 안돼.'

분을 못이겨 벌떡 일어선 그는 벽에 걸린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네가 내 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배신해.'

칼집을 빠져 나온 칼이 피가 흐르는 얼굴앞에서 어른 거렸다.

휴의는 죽여달라고 한 마디했다. 정말 죽을 각오였다. 겁에 질렸다기 보다는 잘못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부동자세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대장이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너란 놈은 분명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단 말이야.

사태파악을 아직 하지 못한 휴의에게 그는 칼을 제자리에 걸어 놓고는 다정한 눈빛을 보였다. 방금전의 성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휴의의 얼굴에 묻은 재를 털고 이마의 상처도 닦은 다음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그자의 소재를 알아 냈는지 물었다. 휴의는 자초지정을 말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저주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부대장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험란했던 여정이 떠올랐는지 그는 갑자기 부산을 가보았느냐고 말했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내가 그곳 출신이라고 그러니 나도 너처럼 조선사람이라고 휴의의 어깨를 툭 쳤다.

조선사람끼리 잘 해보자는 심사였다. 그는 조선인으로는 최고 지위에 올랐다. 일본은 두 갈래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일진은 본토인으로 구성했고 이진은 바로 부산 출신의 부대장이 맡았다. 두 조직을 경쟁시키면서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육사 생도 시절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장교 수업을 받았다.  생도 가운데 으뜸으로 뽑여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대표로 썼다. 그의 책상앞에 걸려 있는 혈서로 충성한다는 신문기사를 그는 부적처럼 아꼈다.

출정을 떠날 때는 기사를 외우면서 임무수행을 다짐할 정도였다. 아무도 그의 충성심과 노력을 따를 수 없었다. 일본인들도 조선인인 그가 자신들 보다 나라에 더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주에서 그는 비교 대상이 없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부대장은 언제나 그가 한 일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다행히 만주군 사령관은 그와 뜻이 맞았다. 사령관은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그를 평가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서랍을 열면서는 휴의를 칭찬했다.

'괜찮아, 오늘 실수를 내일은 하지마. 단독으로 치고 나가지도 말고. 앞으로 수족처럼 부릴 부하 한 명을 붙여줄게.'

그는 그 말을 끝내고 서랍속에서 꺼낸 돈을 휴의에게 주었다. 그것은 부대장이 주는 개인돈이었다.

'가서 쓰고 와.'

휴의는 감격에 겨워하면서 부대장실을 나왔다. 부대장은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실수를 했고 그와 같은 실수를 휴의에게서 본 것이다. 그는 그가 열정과 강한 충성심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휴의는 상관의 칭찬을 받자 힘이났다. 혼이 나고 나서 칭찬은 그에게 약이됐고 비로소 새알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알 속의 노른자가 더는 아니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

기껏해야 수 백 명 정도에 불과한 독립군을 전멸하지 못하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수치였다. 지금 조선인이 할 일은 항일이 아니라 절대복종과 충성으로 가득 차는 일이었다.

신세를 갚아야 하는 의무감에 휴의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부대장의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평생동안 배운 것보다 오늘 이 시간 배운 것이 훨씬 더 많고 깊었다.

꼭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득안고 밖으로 나온 그는 돈을 쓰기 위해 술집을 가거나 여자를 찾지 않았다.

대신 아까 놓친 음식점 주변을 배회했고 그 옆의 음식점으로 들어가 주인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를 여러차례 한 후 그는 편한 마음으로 시내를 걸었다.

마침 오월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그는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한 마리 노고지리였다. 매일 저축해 놓은 재산처럼 불어나는 확고한 신념은 그를 더 강하고 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높은 곳이 어떤 곳인지 아랫사람들에게 알려 주려는 의욕이 펄펄 끊었다. 손쉬운 일을 하면서 쉽게 승리를 따오지는 않겠다. 그런일은 자신이 아니어도 할 사람이 충분히 많다.

부대장은 이번 작전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일부 성공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보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휴의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주었다.

완전히 신임한 사람에게만 털어놓은 비밀도 꺼내 들었다. 넌 조선놈이 아닌 일본놈 맞다. 우린 같은 일본놈이고 일본을 위하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태어났다.

휴의는 지금 이 시간부로 부대장을 아버지로 삼았다. 죽을 때 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을 놓치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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