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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태는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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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태는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6.21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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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처럼 올해도 풍년이 들 것이다. 상여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황금들판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러면 정태는 송아지 한 마리를 더 살 계획을 세웠다. 상여를 따라가면서도 정태는 자신의 논이 저만치 있다는 것을 알고는 흡족했다.

슬쩍 웃음기가 비쳤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누가 보지 않아도 낯빛을 바로 했다. 그리고 곡을 했다. 곡소리에 맞춰 대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이마에 맨 새끼줄이 머리를 죄어왔다. 어릴적 틀었던 상투처럼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평생 할 것도 아니고 곧 벗어 버릴 것이다.

그는 아픔을 참고 동여맨 새끼줄을 이마에 바로 오도록 아래로 내려간 것을 위로 치켜 손으로 고정했다. 그러면서 뒤따라오는 용순을 힐끗 봤다. 그녀는 고개를 아예 땅에 박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세 며느리 가운데 그래도 제일 효도한 것이 용순이었다. 제일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용순이 힘을 썼다.

큰아들, 작은아들이 있었지만 다들 옆으로 비켜섰다. 처음에 그녀는 돈 되는 것은 맏아들이 다 가져가고 빚만 떠넘기느냐고 정태에게 화를 냈으나 정태의 효심을 꺾지는 못했다.

그녀는 무려 30년이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셨다. 이런저런 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까, 정태는 우선 용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당연히 그러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형수 대신 책임을 져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발인이 끝나고 적당한 시기에 위로해줄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이제 장지가 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몇 보 정도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만큼 하루에도 서너 번씩 다니던 길이 오늘은 색달라 보였다.

엄마를 따라 이 길을 달렸다. 긴 칼을 찬 왜놈들이 온다고 엄마는 허겁지겁 정태의 손을 잡아끌었다. 행길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행여 잡힐세라 정태는 온 힘을 다해 엄마를 뒤따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한 시절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달리던 그 길은 지금 정태는 되돌아보고 있다.

긴 시간이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저 논이 생길 리 없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엄마는 한 푼도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 않았다.

꼬박꼬박 모아서 보탰고 그 돈이 종잣돈으로 살을 키워 정태는 논을 장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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