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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고향은 하동이고 이름은 연순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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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고향은 하동이고 이름은 연순이라고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6.22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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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나갔던 주인 할아버지는 어스름 무렵 여러 명의 군인과 함께 들어왔다. 헐떡거리는 검장군과 막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검은 짚 차들이 한 대도 아니고 네 대가 늘어서 있고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군화 발자국의 뚜벅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요란하게 짖는 개소리와 겹쳤다. 검장군을 매 놓고 민구는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에 쫓겨 교련복을 입을때 처럼 서둘렀다. 군인들이 마당에 모여 복작댔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였다.

민구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무심한 척 방안으로 들어올 때 여유를 부렸다. 놀라는 표정도 문을 닫고 나서야 지었다. 처음 식사를 할 때 할머니가 했던,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학교에서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이런 것인가.

심장이 조금씩 뛴 것은 붉은 입술 사이로 나왔던 그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말은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금지 표지판의 붉은 글씨를 보고도 볼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을 때 가졌던 것만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마당을 쳐다보는 것도 금지돼있는 것처럼 느껴 시선은 그쪽에 있어도 몸은 문 뒤로 숨겼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급히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는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군복에 권총이라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나갔던 할아버지가 30분 후쯤 다시 들어왔다.

차 안에서 어디론가 무전을 치고, 받고 그것의 내용을 가지고 온 것이다. 굳은 몸짓과 경직된 걸음에서 민구는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언뜻 보였던 표정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대령도 있었고 소령도 있었다. 민구가 옷이나 모자에 박힌 계급장을 보고 직책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은 형 때문이었다. 형은 장교가 얼마나 센지 계급장을 그려 가면서 알려 준 적이 있었다.

이게 밥풀떼기며 이런 건 말똥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 노트를 보면서 민구는 그들이 왜 군대에 있지 않고 서울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유에 호기심이 생겼다. 알아내려고 그쪽으로 마음이 끌려갔으나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주인 할머니는 여러 번 찻잔을 들고 그들이 있는 거실로 나왔다. 식모는 더 분주했다. 과일을 깎기도 했고 저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녁 준비가 다 됐을 때 그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우루루 밖으로 몰려나가 세워져 있는 검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떠나자 주인 할머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드라마가 아닌 뉴스를 보는 할머니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화장을 하기 위해 화장품 몇 개를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민구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마당으로 나와 거실 쪽을 무심한 듯 슬쩍 보았다. 문틈으로 보는 것보다 높은 마당에서 보는 것이 거실을 한눈에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방에 따로 텔레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평소에도 냉정했던 할머니는 민구가 어슬렁거려도 모른 척했고 먹다 남은 과일을 먹어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떠들썩했던 거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쥐죽은 듯 고요했고 할머니는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손에 묻은 것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화장을 자주 했고 그때마다 진하게 했다. 특히 턱 부분을 유난히 길게 마사지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튀어나온 그 부분을 억지로 밀어 넣기 위해서였다.

아직 옆집 누나는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10시 넘어서야 오는데 오늘은 11시가 됐어도 아직 왔다는 기척이 나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통금 사이렌 직전에 들어올까, 민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누나가 일 대신 공부를 그렇게 한다면 어떨까 그려보았다.

민구 방에서 대각선에 있는 누나의 방은 민구 방보다 더 좁았는데 침대 하나와 옷 넣는 가구 하나가 전부였다. 어느 날 누나는 옷걸이에 못을 박아 달라고 어렵게 입을 뗐고 민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도 의자도 없는 방은 단조롭기보다는 썰렁했다.

작은 가구 위에 잡지 한 권이 있었던 것이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잡지는 민구가 길거리 가판대에서 보던 것이었고 말 탄 여자가 고삐를 잡지 않은 왼손에 길고 가는 갈색의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럴 것도 없어 못을 박아 주고 내려져 있던 옷을 걸어주지도 않고 민구는 허겁지겁 나왔다. 그때 누나는 사탕 한 주먹을 쥐어주면서 먹어봐, 미제야 하고 말했다.

누나는 늘 시간에 쫓겼다. 이른 아침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아침도 먹지 않고 저녁은 대개 먹고 들어왔다. 집은 말하자면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물론 취사를 할 수 있는 부엌도 없었으므로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에는 가끔 민구의 부엌을 빌려 썼다. 라면이나 간단한 면 요리를 할 때 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내 방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누나는 늘 웃으면서 더 먹어, 라고 말했고 민구는 덜어주는 것을 마다 않고 다 받아먹었다.

옆방 누나가 어떤 경로로 그 집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나처럼 외삼촌의 소개로 왔는지 아니면 누가 다리를 놓았는지 말을 안 해 알지 못하지만 주인 할아버지와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누나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라고 했다.

여기서 멀어, 누나는 언젠가 고향을 묻은 민구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멀어, 아주 멀어서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해. 그리고 자기 이름이 연순이라고 했다. 소연순.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은 먼데 허공을 바라고 보고 있었다. 고향에 대해 그녀의 출생지에 대해 그리고 가족에 대해 더 묻고 싶지 않았다. 슬픈 얼굴과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듣으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연순은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다른 곳에 산다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럼 하동에는 누가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늦었고 누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동생은 작은아버지 집에 산다고 했다. 누나는 독립하면 동생을 데려와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했다. 그 순간 누나의 크고 동그란 눈이 잠깐 빛을 냈다.

민구는 좋겠다. 부모님 다 계시고 대학 다니는 형도 있고. 연순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부모님과 형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그것을 가늠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고아나 다름없는 누나는 그런 나를 보면서 또 한 번 웃었는데 이번에는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준 숙제를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없어 풀지 못할 때 짓는 그런 쓸쓸한 표정만이 어른거렸다. 문제가 생겨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고 해도 들어 주지 않는 그런 처지에 있는 누나는 자신의 그런 위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럴 나이였다. 그녀는 겨우 17살이었다. 그래서 민구는 주인 할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백번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군인의 집에서 산다고 하면 부모와 떨어져 있는 어린 여자라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말하자면 옆방 누나의 버팀목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주인 할아버지 내외의 눈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다. 개똥이 있는지 수시로 마당으로 나갔고 똥이 있으면 끝이 가늘지 않은 대나무 낚싯대를 휘게 만드는 깔때기라도 잡은 듯 기뻤다.

어떤 때는 주인 할아버지의 워커를 닦아 놓기도 했다. 더러웠던 것이 반짝일 때면 흥얼거리기도 했다. 아 임 인 러브 포 더 베리 퍼스트 타임 같은 팝송이었다. 내가 잘하면 옆방 누나가 편하고 주인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그녀의 미래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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