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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검은색과 흰색이라 둘은 쉽게 구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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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과 흰색이라 둘은 쉽게 구분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6.16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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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올 때는 걸었다. 버스비를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40분 정도 거리는 식은 죽 먹기나 손등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다. 그런 의도도 없었는데 휘파람을 불기 위해 저절로 입술이 앞쪽으로 비쭉 나오기도 했다. 버스에서 할 수 없는 것을 길거리에서 할 때 민구는 기분이 좋았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에는 매일 13킬로를 왕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호를 타고 처음 서울역에 내렸을 때 많은 차에 어리둥절했다. 걸어가면 될 것을 왜 차를 타야 하는지 못마땅했다.

등굣길을 외운 후에는 하굣길은 무조건 걸었다. 등굣길도 그러고 싶었으나 애들이 걸어 다니는 가난한 애라고 놀리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버스를 탔다.

걸으면 될 것을 굳이 왜 타는지 타고나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 절약이라는 것도 크지 않았다. 신호등 몇 번 걸리고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겨우 20분 차이 정도였다.

버스 안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타는 것에 익숙치 않아 멀미도 있었고 만원 버스는 앉기보다는 매번 서 있어야 했다. 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않는 것 같은 행동도 몸을 뻣뻣하게 했다. 언제나 여학생들이 있었고 눈을 어디에 둘지 고민거리였다. 그러다 보면 버스에서 내일 때 쯤이면 온 몸의 삭신이 쑤시곤 했다.

그래서 하굣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었다.

무엇보다 걸으면 도끼에게 얻어터진 날도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그러려니 하는 너그러운 기분이 들어 좋았다.

까짓것 맞는 것이라면 이골이 났다. 자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익숙해져서 재수 옴 붙은 것이지 별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선생들은 아이라고 봐주지 않고 마구 매질을 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든다고 때리고 창밖을 본다고 주먹을 날리고 교실 청소가 엉망이라고 분필 도막을 던졌다. 공부 못한다거나 옷이 더럽다거나 수업료를 제때 내지 않았다고 맞을 때는 울어야 속이 풀리기도 했다.

이런 생각도 걸을 때면 불쑥불쑥 나왔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와서는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았다.

거리는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였다. 무엇보다 민구가 걷는 길옆에는 옆방 누나가 일하는 맘모스 백화점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화재로 죽은 자리에 다시 세워진 백화점을 지날 때마다 민구는 떨어져 내리는 사람의 환영에 시달리기보다는 누나가 예쁜 옷을 팔면서 짓는 미소를 생각했다.

광장에서 멈춰 서는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구경거리는 가득했고 그것들을 보는 것은 들판에서 풀을 뜯는 소 떼를 구경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웠다. 소가 가면서 대야 같은 똥을 철썩철썩 땅에 떨어트린다 해도 이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그 똥을 찍어 먹기 위해 이름 모를 새가 갑자기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날아갈 때 아직 마르지 않은 똥이 흩날리는 것보다 나았다.

서울의 거리는 시골의 모든 것보다 보기에 좋았다.

심지어 버스에서 품어 대는 매연의 긴 꼬리조차 그랬다. 휘경동에서 우로 돌아 구리 쪽으로 빠질 때 언덕이랄 것도 없는 그곳을 버스가 지나가면 매연은 그야말로 불타기 직전의 고무 연기를 검게 뿜어 댔다. 그것조차 구경거리였다. 먹을거리를 보는 것은 더 말해 무엇하랴.

그 가운데 압권은 가판대에 수북이 쌓인 책이었다. 민구는 언제나 책들의 제목을 보았다. 제목만으로도 그는 온갖 상상을 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잘 때까지 그 생각은 이어져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행세하기도 했다.

가판대에는 책 말고도 신문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신문 사이로 반쯤 벗은 여자들의 잡지 표지 사진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넓은 초원 위에서 말을 타고 있었는데 말은 검은색이었고 그녀들은 흰색이라 둘의 대비가 돋보였다.

어떤 여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고 또 어떤 여자는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서양 여자들은 담배를 피고 술을 먹고 반라로 초원을 질주하는 것이 취미인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길거리에서 민구는 배웠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눈길은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신문을 사면서 민구처럼 그런 여자들을 눈여겨보았다. 애나 어른이나 관심사가 같은 것은 그뿐이었다. 가판대의 여자 사진이 바뀔 때는 늘 기대와 흥분이 교차됐다.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바뀌었는데 그런 날은 빨리 걷기도 하고 일부러 되돌아 가기도 했다.

서양의 여자들은 텔레비전에서보다 거리에서 더 익숙해져 만나기라도 하면 아는 체를 해도 될 만큼 친숙하게 다가왔다.

외국의 소설책들은 가지런히 세워져 있지 않고 과일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손님들이 고르다가 그대로 둔 것을 상인이 미쳐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해 본들 금방 다시 그렇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인지 리어카 책 장수는 그런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가운데‘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큰 글씨의 같은 책 여러 권이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책 표지에 두 명의 남녀가 꽃을 주고받는 장면 때문이었다. 꽃이라면 민구도 할 말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아니 옆 방에 사는 백화점에 다니는 누나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구능에 놀러 갔다 누가 놓고 내린 장미 한 송이를 발견한 것은 집 가까이 와서였다.

비닐에 쌓여 있는 장미꽃은 가지고 내여야 하는 것을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민구는 그 꽃을 옆방 누나에게 주었다. 비닐을 벗기고 준 것은 사지도 않은 것을 그대로 주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잘못을 덜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주슨 것을 선물인 척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꽃은 싱싱했고 버리기가 아까웠다.

책 속의 남자가 여자에게 내미는 그 꽃이 민구가 옆방 누나에게 주는 꽃이라는 생각이 들자 철길에 누워 누가 더 오래 버티냐고 내기를 걸었을 때 느꼈던 그 쿵쾅거림이 갑자기 몰려 왔다.

민구는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뛰던 가슴은 타던 모닥불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확 수그러들었다. 수음하고 나서 급속히 죽었던 자신의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책 표지속의 다정한 남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대자의 죽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신문들은 커다란 검은 글씨로 그의 죽음을 알리고 또 알렸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래야 한다고 재촉하는 듯했다. 그러나 알아서 무엇에 쓰라는 말은 없었다. 그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없었다. 라디오 뉴스처럼 그냥 콱, 죽었다는 것이다.

라면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들었으나 민구는 같은 것을 반복 해도 언제나 새로웠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여전히 놀라웠는데 그것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죽지 않고 살아서 명령을 하고 지시를 내려야 했고 반항하지 않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국민이 지켜야 할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사서 보는 사람 옆에서 민구는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내용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선생이 말하지 않은 어떤 말들이 신문 속에 혹시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것을 민구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살아 있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로 확인할 때마다 민구는 가슴이 또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종일 몇 번이고 그렇게 내려앉은 마음은 저녁이 돼서도 잘 진정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낚시질을 하다가 주변이 물로 차오른 것을 보고 허겁지겁 뭍으로 달려나갔던 그때 그 심정이 지금과 같을 것이었다. 저녁이 올 때까지 민구는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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