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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것과 속편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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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것과 속편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27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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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그것은 축축한 기분이 들 정도로 한 시간 이상 계속됐다. 맑은 하늘은 흐려졌고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회색빛은 그것대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파란 것이 가슴을 크게 벌리라고 한다면 회색은 벌렸던 것을 다시 오므리라고 말하고 있다.

들뜬 마음은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와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파란 하늘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계속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했으나 장례식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마른 대지는 적셔졌고 신록은 더 푸르러 졌다.

비 오는 사이로 장미 가시가 늘어진 길을 나는 건너가고 있다. 이 길을 지나야 신호등 앞에 설 수 있다. 광장으로 가는 다른 길도 있지만 굳이 이 길로 가는 것은 오월의 장미가 한가득 피어 있기 때문이다.

노란색 하얀색 분홍색 붉은색 등 그야말로 색의 향연을 장미가 수놓고 있다. 누가 장미 아니랄까 봐 그 짙은 향은 걸어가는 내내 코를 자극했고 그 자극은 무엇을 하려는 충동을 억제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 같은 날은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이미 시작한 것을 정리해 보는 것이 좋다. 차분하게 앉아서 비 내리는 밖을 보면서 차 한잔해도 나쁠게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벌려 놓기도 하고 그것을 수습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가 오고 때로는 해가 뜨는 것처럼.

길의 끝에서 나는 잠시 멈춰섰다. 여기서 향을 끝낼 수는 없다. 시간도 그리 바쁠 것이 없었으므로 멈춘 그 자세 그대로 냄새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옆의 노란 장미 향으로 생각했으나 방향이 틀렸다. 옆이 아닌 다른 곳이었고 그것은 머리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고개를 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녹슨 철망을 의지해 가시 줄기 하나가 아래로 뻗어 있었고 그 줄기 끝에 빨간 장미가 활짝 피어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사그라들 것처럼 맹렬하게 피어 있었는데 비가 온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되레 비를 머금고 있어 더 돋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서 있자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일과는 괜찮게 출발하는 셈이다.

장미 꽃과 그 향기에 취한 인생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 마치 네 잎 클러버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순간 엄습했다. 올리브 향이 가득한 식당 앞을 지나다가 식욕이 닥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금세 비가 그쳤다. 추적거리는 빗줄기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은 지금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나는 비도 해만큼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몇 번 털고 나자 금세 날씨는 잊고 신호등 앞에 멈춰섰다.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 무리가 밀물처럼 다가왔다.

사람의 냄새를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길은 넓어 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공간이 있었으므로 한쪽으로 물러나 막 횡단보도를 건넌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가고 난 자리가 비어 있을 즈음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스크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렸다. 서린 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뿌연 앞을 제대로 보기 위해 손등으로 안경을 위로 밀어 올렸다.

불편했다. 이런 불편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편도 생활이 되면 편할 것이다. 처음부터 편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속이 편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굶었다. 배고픈 것과 속편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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