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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만개한 으름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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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만개한 으름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1.31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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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급한 대로 하나를 따서 먹었다. 먹을 때 손톱 밑에 낀 때가 조금 거슬렸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목이 타는 듯이 말랐다.

급하게 산길을 달려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갈증은 금세 해소됐다. 서너 개를 연거푸 먹었다. 그제야 주변에 눈에 들어왔다. 으름은 천지에 널려 있었다. 수백 개는 족히 될 열매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어서 와서 따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오지 않았다면 화를 낼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직 덜 익은 것은 익은 것에 비해 숫자가 아주 적었다. 한꺼번에 핀 꽃처럼 여기저기 만개한 열매를 보니 풍족한 마음에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졌다.

어린 것이 무슨 시름이 있을까만은 어린 나이는 그런 나이대가 갖는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고민이라는 것은 단것 먹고 종일 노는 것이었다.

숙제나 책 읽기 이런 것들이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으나 그것은 친구가 아니었다. 노는 것은 오로지 들로 산으로 싸 돌아다니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종일 놀고 잠자리에 들 때면 다음 날 놀 것을 생각하면 잠이 잘 왔다. 꾸중은 잠시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그만이다. 나중 일은 나중일. 나는 그렇게 세상과 마주 섰다. 그리고 오늘, 으름을 실컷 먹고 있다.

이럴 때는 형의 존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떨어지면 바로 바다로 직행하는 낭떠러지까지 혼자는 올 수 없다. 친구들과도 안된다. 이곳은 말하자면 먼 곳이다. 집에서 아주 멀어 초등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그런데 서너 살 더 먹은 형과 함께 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혹 부모님이 나중에 눈치채더라도 벌은 형이 받을 것이고 나는 뒷전에 밀린다. 그러니 지금 순간은 생일날이거나 명절날이다.

생일날에는 선물도 있고 맛있는 반찬도 있고 군것질거리도 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나는 먹고 또 먹고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형과 눈이 마주쳤는데 형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해도 너무한다. 뭐 그런 어이없는 표정이 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어름 맛은 정말 대단했다.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는 표현은 점잖다. 하수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신선이 먹고 울고 갔다는 천도 봉숭아는 껌딱지다. 이브가 먹은 사과 맛도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맛을 나는 지금 그리워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뒷간을 들락거렸다. 밤하늘의 별은 보이지 않았다.

날은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고 불나방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도 나는 일어났다. 왔다 갔다 이리저리 쏠려 다녔다. 마치 밀물에 떠올랐던 쓰레기 같은 신세가 나였다.

그러나 나는 으름을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하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단 순간도 나는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밥을 먹지 못했다. 혀가 뚱뚱 부어올랐다. 아리고 쓰렸다. 얼마나 많은 으름을 먹었으면 그랬을까. 마치 모래알 씹듯이 밥알을 넘기면서도 나는 혀의 부기가 내려앉으면 혼자라도 으름을 먹으러 낭떠러지로 달려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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