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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경회루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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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경회루에 얽힌 사연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10.2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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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마루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모습이다. 지붕선이 날렵하고 건물이 서로 조화롭다.

북악산과 인왕산의 배경을 압도하는 건물, 바로 경회루다.

이 건물은 경복궁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으로 척 봐도 그 위세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왕권을 확고히 한 태종은 외국 사신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물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박차정을 시켜 건물을 세우게 하고 완성된 건물 이름을 하륜에게 짓도록 명했다. 경회루라는 이름이 나오자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에게 쓰게 했고 이를 편액으로 삼았다.

경회루에 올랐다. 일 층을 거쳐 왕의 걸었던 이른바 왕의 계단을 통해 이 층에 올라가니 과연 ‘차경 중의 차경’이었다. (왕은 궁내에서도 걷기 보다는 가마를 이용했으나 계단을 오를 때는 신하가 업고 다니지 않았다. 넘어져 다칠 위험이 있었기에 직접 걸어 올라갔다고 한다.)

왕궁의 여러 부속 건물의 지붕들이 오색 찬연하게 빛을 발했다.

목조로 완성된 이 층 바닥은 모두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예인들이 드나들던 곳과 대신 그리고 왕이 있는 곳이다.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그때의 그 현장을 돌아보는 감회는 남다르다.

미리 공부하고 가서인지 태종과 단종과 수양대군과 연산군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태종은 앞서 언급했으나 생략하자.

단종의 비극은 이 자리에서 시작됐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숙부 수양대군은 단종을 압박해 이곳에서 옥쇄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이 옥쇄를 건넬 때 수양은 무릎을 꿇고 울며 굳이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연산군은 이곳에서 하라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유희를 즐겼다. 전국 각지에서 뽑힌 수천 명의 기생(흥청)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주 가무를 즐겼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나흘도 아니고 주야장천 이러니 소문은 급기야 백성들에게까지 퍼졌다.

‘흥청망청’ 논다는 말은 이 때 생겨났다. (흥청은 연산군 10년 즉, 1504년 왕명으로 채홍사 등이 모집한 기녀를 말한다.)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극과 고통의 현장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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