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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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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9.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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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다. 그런 술이 목구멍에 탁 걸릴 때가 있다. 마치 생으로 먹히게 된 도마뱀이 두 다리를 목젖에 대고 버티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 이 표현은 실제로 군생활 중 선임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는 수시로 도마뱀을 날로 먹었는데 몸통을 잡고 머리부터 넣으면 들어가지 않으려고 놈이 앞발로 목젖을 밀며 저항하는데 그때 간지럼 때문에 기침을 하면 살려주고 기침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삼켰다고 했다.)

가령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럼, 아빠는 아빠 노릇 제대로 했어요.”

스물도 안된 놈이 사람을 죽이고 7년이나 빵에서 썪었다고 빈정대는 아버지에게 딸은 오빠를 대신해 이렇게 쏘아 붙인다. 출소 후 모인 가족의 술판이 개판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기서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 사람이 이장호다. 맞다. 그 유명한 이장호 감독이다.)

술술 넘어가기는 커녕 목구멍에 제대로 걸린 형국이다.

막 나온 상환( 류승완)의 기분은 말 안해도 엉망인데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위로는커녕 이런 말을 들으니 출소 후 생활은 안 봐도 비디오다. 더구나 형사도 찾아와 중범자들은 보호관찰 대상이라고 눈을 부라린다. 부담 갖지 말라면서도 재범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수작질을 하니 그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했어도 사람 본성이라는게 바뀔 수 없다고 눈을 치겨 뜨는 형사에게 상환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럼 내가 살인자 본성이 있다는 말이냐고 대들지만 그가 살아갈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상상해 보면서 영화를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런 상상은 대개 맞아 떨어진다.)

자, 이쯤되면 어느 정도 영화의 얼개가 그려지는가.

 

살인 당시 상환은 공고 졸업반. 그들 말대로 공돌이다. 졸업해 봤자 무슨 일을 하겠나.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니 어디 품이나 팔아야 하는 현실은 그도 그의 친구들도 다 안다. 그러니 졸업을 앞뒀다고 해서 무슨 설렘 같은게 있을까.

당구장에서 욕지기나 하고 시덥잖은 주접을 떠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예고생들과 한 판 붙었다. 이유라는 것이 뭐 대단한게 아니다. 그냥 자존심 때문이라고 해두자. 거기서 상환은 맥주병으로 상대를 죽인다. 출소 후 술판은 앞서 이야기 했다. 그는 형의 소개로 카센터에서 작업복에 기름칠을 한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그가 살인자로 막 출소한 전과자라 해도 보기에 좋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골목에서 싸움판이 벌어지고 상환은 거기에 끼어 든다. 죽인 친구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세상에 나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차라리 세상이 나에게 맞춰야 한다.

문제아로 찍히면서 회사에서 짤린 상환은 깡패, 건달, 양아치로 불리는 세계로 뛰어든다. 보스는 형의 친구인 성빈( 박성빈).

이 과정은 여로모로 아쉽다.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혹은 사회의 관심과 협조, 혹은 친구들의 호의가 있었다면 상환이 바로 나쁜 길로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시점을 늦췄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고 그 아쉬움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으니 피장파장이라고 하자.

이제 그가 갈 곳은 지하 세계뿐.

그곳에는 돈도 있고 멋도 있고 가오도 세우고 그가 보기에 이만한 직업이 없다. 가진 것 없고 대가리 나쁘고 배운게 없는자에게 딱 안성맞춤이다. 더구나 자신은 남 밑에 있을 성격이 아니다. 타고난 양아치라고나 할까.

양아치가 됐으니 하는 일은 싸움질이 되겠다. 그즈음 화면은 피곤에 절은 강남서 강력반원을 비춘다.

차 안에서 음식을 먹고 뻗치기를 하는 형사들도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보낸다. (인생이 뭐 별거 있나. 누군가는 죄를 짓고 또 누군가는 그런 자를 잡는게 인생이다.) 잠복근무 중인 형사가 사라지면 이번에는 조폭의 세계다.

상대와 거대한 한 판이 기다리고 있다.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잘 됐다. 보스는 이번일 만 끝나면 한턱 낸다고 하니 어서 끝장을 보고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허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피라미들은 칼받이에 불과하다. 즐기려던 싸움은 죽는 싸움이 됐다. 때린 담임을 씹창 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상대의 칼에 여러 번 찔린 상환은 몇 발짝 걷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는다.

마침 형도 상환을 이 지경으로 이끈 친구 성빈과 난투중이다. 두 장면은 교차 편집 됐다. 그러니 여기도 싸움질, 저기도 싸움질 온통 싸움질 뿐인 장면이 화면을 꽉 채운다. 지겹기도 하고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가고 싶은데 감독은 관객의 그런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다.

싸움은 눈 오는 날 바바리 코트를 세우고 여자를 기다리는 낭만이 아니다. (대개 조폭 영화는 여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본드 걸은 아닐지라도 조폭의 애인 정도는 나와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없다. 눈여겨 보라.)

멋진 전투신을 보여주면서 양아치 세계의 의리를 다루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거짓과 허황된 우연도 없다. 그러니 보고 나면 체증이 풀리기보다는 명절날 고속도로처럼 꽉 막힌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잘 만들었네, 하는 뒷말을 남긴다. 오그라드는 신파도, 여자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나이의 거짓 배짱도 없다. 오로지 싸우고 죽이고 허튼 소리 지껄이다 끝난다.

그런데 시간이 무려 2시간이다. 지껄이는 장면만도 그럴싸한 화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 자기가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멋짐보다는 비참함이 앞선다.

선무당이 사람잡듯이 멋 모르고 덤볐다가 황천길로 가는 길은 폭력의 세계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나쁘게 사느니 죽는게 나은가, 자문해 본다.

국가: 한국

감독: 류승완

출연: 류승완, 박성빈

평점:

 

: 류승완 감독은 감독으로 배우로 일인이역을 해냈다. 그의 저력에 당시 충무로 영화판이 떠들썩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작품이 데뷔작이기 때문이다.

저예산으로 작품성에 흥행바람까지 몰고 오자 류승완 신드롬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되레 이상한 것이다. 그는 <저수지의 개들>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첩혈쌍웅>을 만든 오우삼 감독이나 배우 성룡을 흠모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영화에 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러나 모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재창조했다. 단순한 오마주 그 이상의 것이다.

시덥잖은 대화가 큰 싸움으로 번지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하나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부패, 악몽, 현대인, 죽거나 나쁘거나는 단락져 있으나 따로 노는 것은 아니라 깡패처럼 붙어 다닌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됐고 끝내 마침표도 함께 찍었다. 화려한 액션도 볼 만 하고 출연진의 연기력도 빼어나다. 흑백 필름이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초반 당구장에서 지껄이는 대사가 일품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돌아 가지만 그 와중에 큐대에 초크를 묻히고 ‘졸라게’ 웃긴 대사를 날리고 그 역할에 당구장 주인도 한 몫 거든다. 사소한 일로 싸우는데 나중에 대형사고 터진다. 이게 우리 때와는 다르게 명분이 없다고 나름대로 분석도 한다.

똥 야부리, 시방새, 씨발놈아 등 그들 세계의 언어가 담배 연기에 섞인다. 경찰에 대한 불만도 서슴없이 나온다. 무슨 날만 되면 ‘뽀치’는 챙기면서 막상 사고가 터지면 사람이 없다고 인력 탓만 한다.떡값 챙길 사람은 있어도 사고 처리할 인원이 없는 것이 오늘날 경찰의 현실이라는 것. (세무서 위생과 소방서 파출소도 뜯는데 혈안이라고 핏대를 올린다.점잖은 먹물의 입에서 나오는 불만이 아니다. 최하층의 인간들이 내뱉는 이 말, 지금은 사라졌는가.)

여기서 질문하나. 발레하는 사람과 건달의 공통점은? : 걸음걸이. 다 좋은데 코믹한 부분이 없다.( 아니 있다. 류승완이 목딸딸이 치는 장면이다. 이는 웃기기보다는 이후 전개되는 죽음과 연결되는 어떤 범상한 연결고리로 보인다. 그래서 엄청나게 웃긴데도 웃을 수가 없다.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 갔다기보다는 되레 빠졌기 때문인가.

영화는 에레미야 11장 23절( 실제로는 10장 23절인데 오기했다고 한다.) 을 옮기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나이다.”

죽을 때 죽은 친구의 환영이 어른거리는 장면은 공포라기 보다는 괴기쪽에 가깝다.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 한다니 놓친 관객은 시간내서 한 번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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